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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최고의 문창시장, 정감있고 살기 좋은 - 문창동 행정복지센터

 

꿈과 희망이 있는 미래도시 중구

동행정복지센터안내

우리동현황

문창동은

대전광역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토박이를 중심으로 협동심이 강하고 통 단위 이웃 사랑회가 조직되어 서로 돕고 사는 미덕을 지닌 지역입니다. 대전천변에 인접한 주거 상업 지역으로 재래시장(문창시장)과 오토바이 거리 및 숙박시설이 들어서 있어 소규모 상거래가 활발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지역특성

  • 대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토박이가 많아 협동심이 강하고 통단위 이웃회가 조직되어 서로 돕고 사는 미덕을 지닌 지역사회임.
  • 대전천변에 인접한 주거.상업지역으로 대전 제일의 재래시장(문창시장)과 오토바이거리 및 숙박시설이 들어서 있어 살기좋은 지역임.

동현황

(2019.10월말 현재)

동현황
면적 인구수 세대수 주민조직 관할법정동
0.46㎢ 4,866명 2,575세대 13통 77반 문창동
  • 전통행사
  • 동명유래
문창동 엿장수 놀이의 유래와 전승

이 지역은 일찍부터 상공인이 살았던 곳이기에 상업이 성행하였다. 따라서 지금도 이 곳에는 그 상업의 전통은 이어져 신남부시장, 문창시장 등 주로 구 문창2동에 집중되어 시장이 형성되어 있으며 이곳의 복지시설로는 문창 1. 2지구 노인회 등이 있다. 이 문창동의 엿장수 놀이는 지금도 전해져 내려와 대전광역시 민속경연대회에 출연한 자가 있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문창동 엿장수놀이는 남쪽에 사는 황씨라는 사람과 북쪽에 사는 김씨라는 사람이 엿도가를 경영하면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엿장수는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가난하고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하던 직업이었다. 그러나 마음씨만은 착하고 의리가 있어서 한 번 연을 맺으면 늙어서 죽을 때가지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엿장수를 거느리고 살던 황씨와 김씨는 매년 대보름날이 되면 실컷 먹고 놀게 해주었다. 엿장수들은 이러한 주인이 고마워서 서로 주인에게 잘하려고 충성심을 발휘하였다. 엿을 더 많이 팔려고 하는 것은 물론 사사로운 일까지 도와주며 살았다. 이처럼 아름다운 이야기가 다른 지방으로 퍼져 나가자 전국에 있는 엿장수들이 모여 들었다. 그리하여 서정은 엿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자 사이가 좋던 황씨네와 김씨네는 서로 경쟁상대가 되었고, 차츰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엿장수들도 주인을 따라 둘로 갈라졌다. 그리하여 서정엿이라고 불리던 엿도 황씨네엿, 김씨네엿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상대방의 엿을 비방하는 뜻에서 ‘김가엿’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몇 대를 내려오는 동안 이들의 엿도 인기가 떨어졌다. 엿도가들도 서서히 몰락해 가고 있었다. 그런 어느 해 김씨네 엿도가에 어떤 낯모르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김씨에게 큰 돈을 내놓고 일본 구주에 가서 자기와 엿도가를 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하였다. 일본에는 엿 만드는 기술이 없으니 그 곳에 가서 자기와 한 삼년쯤이면 큰 부자가 되어 나올 수 있다고 했다. 김씨는 장사가 잘 안 되는 데다가 황씨네가 보기 싫어서 이름도 잘 모르는 사람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엿 만드는 기술을 가르쳤다. 일본인들은 물엿 만드는 기술을 익히자 쌀가루와 버무려 떡을 만드는 기술을 개발 했다. 그 뒤 임진란을 일으킨 그들은 그 떡을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의 식량으로 공급하였다. 일본인들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하여 이렇게 치밀하게 준비하였던 것이다. 김씨는 전쟁이 끝난 뒤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누구하나 그를 반겨주는 이가 없었다. 그가 미워하던 황씨는 임진왜란때 죽고 없었다. 다만 그의 후손들이 엿도가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황씨의 죽음이 꼭 자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씨는 옛날 엿도가가 있던 자리에 다시 엿공장을 차리고 엿을 만들었다. 전쟁 뒤에 먹을 것이 없던 때라 엿은 잘 팔렸다. 돈을 벌은 김씨는 황씨가 일본사람의 칼에 맞아 죽었다는 자리에 매년 정월 대보름 거리제를 지내주었다. 그 뒤 김씨는 세상을 뜨면서도 이 거리제는 영원토록 지내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김씨네 후손들은 김씨의 유언대로 준행했다. 이 사실을 알게된 황씨네 후손들은 대보름날 거리제에 참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황씨네와 김씨네는 하나가 되어 거리제를 지냈으나 서먹서먹한 마음은 풀 길이 없었다. 두 엿장수들은 화해의 뜻으로 엿가락처럼 생긴 동아줄을 만들어 가지고 줄다리기를 하였다. 그런데 매년 이긴 편은 엿이 잘 팔리고 진 편은 안 팔렸다. 그러자 두 집 엿장수들은 신나게 줄다리기를 하다가도 맨 마지막에는 원 위치로 돌아가게 하여 비기고 마는 풍속이 생겼다. 그런 다음 모두 하나가 되어 엿타령을 하고 가위치기를 하며 신나게 놀았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엿이 잘 팔렸다. 그리고 엿이름도 두 집의 성을 따서 黃金엿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엿장수 놀이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국문학자 지헌영 선생의 말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후까지도 이 놀이가 전승되고 ‘황금태’라는 상표로 서정엿이 일본에 수출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황금태’는 일본구주지방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조선태’의 원조일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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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동의 옛이름은 오동촌이었다.

문창동은 백제 때는 우술군이었다가 신라시대에는 비풍군에 속한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는 공주목 산내면에 속해 있다가 고종 32년 회덕군 산내면으로 변경되었다. 그 당시 장이 섰던 자리라 하여 장터라고 불렀다고 한다. 1914년 총독부가 군. 면을 통합 할 때 대전군 외남면 서동리(西洞理)로 변경되었다. 그러다가 대전군 대전읍 서정(西町)으로 편입되었고 1부제 실시로 대전부 서정이 되었다. 해방 후 1946년 행정 개편시 일본식 명칭을 버리고 문창동으로 개칭하였으며, 1949년 대전시 문창동이 되었다. 그 뒤 1970년 7월 1일 문창동이 문창1동과 2동으로 분리되었다. 1977년 구제실시로 중구 문창동이 되었고 1989년 1월 1일 부로 대전직할시 중구 문창동이 되었다. 법정동은 문창동이고, 행정동은 문창 1,2동이다.그러나 이곳은 구 도심군에 인접하여 있기 때문에 최근 인구가 감소됨으로써 1998년 1월 1일을 기하여 두 개동을 다시 문창동으로 통합하게 되었다.

오동나무가 많았던 마을, 학문적 기풍을 꿈꾸는 마을

대전천변에 자리한 문창동은 동으로 동구 효동, 인동과 구계를 이루고 북동으로 대흥동과 접하고 서쪽으로 부사동과 그리고 남쪽으로 석교동과 접하고 있다. 본래는 오동나무가 많았던 마을이라 하여 오동촌이라 했던 이곳은 개화기에는 대전의 서쪽에 있다해서 서동(西洞)이라 하다가 일제 때 서정(西町)이라 불렀던 곳인데 마을의 학문적 기풍을 조성한다는 뜻에서 1946년 왜식 동명 일제 개정때 문창동이라 이름 짓게 된 것이다. 이곳의 옛 마을로는 오동촌, 연자방아골, 물레방아골 등이 있다. 오동촌은 오동나무가 많았던 역촌이었는데 총무체육관에서 인동사거리로 가는 충무로의 보문교 전 우측 천변일대를 가리킨다. 6.25직후에는 후생주택이 많이 들어섰던 마을이었으나, 그 뒤 도심의 급속한 발달에도 큰 변화가 없는 곳이 이곳이다. 서동은 한자로 서동(西洞)이라 표기하며 달리 장터라고도 한다. 현재 보문교 부근에 있는 이곳이 장터라고 하는 이유는 조선조 때 이곳에 장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 1914년에 일제가 행정구역 개편때 부사동 장군봉을 헐어서 그 흙을 이용하여 제방을 쌓고 흙을 돋와 대전천의 범람을 막으면서 장터 서쪽을 서동이라 하였다. 연자방아골은 달리 미나리광이라고도 부르는데 구 문창1동사무소 자리이다. 연자방아가 있어 이 주위의 마을을 연자방아골이라 불렀으며, 또한 이곳에는 미나리가 많이 났기 때문에 미나리광이라 부르기도 했다. 물레방아골은 물방아골이라고 부르는데 현재 문창동 행정복지센터 근처에 있었던 마을이다. 연자방아가 물레방아로 대체되면서 그 주위의 마을 이름 또한 물레방아골로 바뀌게 되고, 축약하여 물방아골로 불리게 되었다. 무덤거리는 부사동 천주교 성당의 부근에 있던 마을을 일컫는다. 이 문창동에는 보문산에서 발원하여 대사동을 거쳐 문창동과 인창교 남족으로 흘러서 대전천과 합류하는 대사천이 있는데 지금은 모두 복개 되었다. 문창동과 동구를 이어주는 다리로 충무로가 있는 보문교와 동구 인동과 이어주는 인창교 그리고 동구 효동과 이어주는 문창교 등이 있다. 뒤늦게 도시가 개발된 지역이라 문창동 네거리, 보문교 네거리 등 네거리와 도로변에 오토바이 가게가 많아서 붙여진 오토바이 거리가 있다. 또 지금의 인창로 33(문창동 18-3번지)일대 앞자리를 미루나무 거리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미루나무가 많은 거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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