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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물설치문중/유래

양성이씨

  • 작품명

    양성인이여 깨어나라

  • 조각가

    배정문

  • 이미지
  • 작품설명

    시조 이수광을 바탕으로 9개의 파로 이루어진 양성이씨 문중을 표현하고 9개파의 높은 기상을 아홉개의 덩어리로 표현함으로써 양성이씨의 기상과 후대에 문중의 발전을 표현하여 선대의 업적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정면의 가운데 부분은 오얏 꽃의 개화형상을 단순화하여 문주의 번영과 화합을 다짐하며, 중앙에 양성이씨 마크 형상을 표현하였다. 하단의 나뉘어진 부분은 양성이씨의 억겁의 뿌리를 나타내어 문중이 표현하고자 하는 유래를 바탕에 둔 작품이다.

  • 유래

    양성이씨(陽城李氏)의 시조 이수광(李秀匡)은 송나라 태생으로 고려 문종조(1046~1083)때 삼중대광 보국(輔國)의 벼슬과 양성군(陽城君)의 군호를 받아 득성하였다.
    시조 이수광은 고려 문종 조 때 누차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강유 겸전한 인품으로 상호이해와 설득과 무마로 동침야욕을 봉쇄하고 선린우호관계를 맺어 나라를 안연(安然)하게 한 공을 세워 정난공신 제일로 책훈되고, 출장입상과 덕망이 높아 당시 세인들이 당나라 곽자의(郭子儀)에 비유하였다.
    송나라가 구원을 청해오자 왕명으로 원정, 한 달에 세 번 승첩을 거두매 황제가 연회를 베풀고, “고려대신 이수광은 공관천하(功冠天下)요, 명양후세(名揚後世)하리라”고 써주시고, 특진금오위대장군(特進金吾衛大將軍) 상주국(上柱國)의 작위를 내리니 당시 사람들이 영귀공자(榮貴公子)라 칭송하였다.
    양성을 본관으로 삼게 된 것은 이수광이 정난공신 제일로 책훈되고, 양성을 채읍(采邑)으로 하사 받은 사패지지에 연유되었다. 시조의 유지(遺祉)가 양성향교의 곁이라고 하며, 묘소는 그 뒤쪽 몇 리쯤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표지(標識)가 없어 실전했다. 양성은 고구려 때 사복흘(沙伏忽), 신라 때 적성(赤城), 고려 초 양성(陽城)으로 정한 지명으로 안성시 양성면과 평택시 죽백동 일원의 옛 지명이다.
    현 경기도 평택시 죽백동 산 43의 7 유좌지원에 1848년 헌종 14년 시월, 시조 휘 수광의 단과 5세위까지 설단 하였다. 1984년 5월 20일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신월리 산 20 무갑산 능골에서 4세 부마공(駙馬公) 휘 영주(英柱), 배위 순정공주(順正公主), 계배위 정씨의 묘소를 시조단하에 천묘하였고, 2013년 11월 3일 황해도 신계군 마서면 중용리에 묘소가 위치한 6세 석탄공(石灘公) 휘 수방(守邦)의 단비(壇碑)를 추가 설단하여 명실상부하게 시조묘역을 성역화하고, 매년 음 10월 1일 세향을 받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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