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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주황태후 허황옥(許黃玉,서기 33~189년,인도의 아유타국공주)이 허씨 도시조"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담배를 피운 사람이 허균(許筠)"불평등한 계급사회에 과감히 도전했던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큰 공감을 불러일으켜불멸의 의학서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펴낸 한국의 히포크라테스 허준(許浚)2009년 7월31일 동의보감은 한국에서 7번째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조선 침술의 대가(大家),현대 침술의 효시 허임(許任)소치 허유,미산 허형,남농 허건 3대의 한국남화(韓國南畵)는 우리 예술사의 자랑일문의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한국남화의 거목현대인물은 허정(내각수반).허화평.허삼수.허문도허창수 전경련회장(2011년2월,GS그룹회장.경남고.고려대경영학과졸)등우리나라 허씨(許氏)는 김해허씨(121,031명).양천허씨(130,286명).경주허씨(6,774명).광산허씨(1,669명).분성허씨(11명).시산허씨(태인,2,029명).양천허씨(130,286명).태인허씨(6,472명).하양허씨(16,344명).함창허씨(115명) 등 총 32본관에 인구는 지난 2000년조사때는 300,448명이었다.그러나 우리나라의 모든 허씨(許氏)는 같은 뿌리라며 허씨대동보(許氏大同譜)를 간행하고 있다.우리나라 허씨(許氏) 성(姓)의 연원은 가락국(駕洛國)의 시조인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왕비(王妃)인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옥(許黃玉,서기 33~189년)에 두고 있다.허황옥은 원래 인도(印度)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서 16세에 배를 타고 지금의 경남 창원시 웅동면 앞바다에 이르러 김수로왕의 영접을 받고 왕후가 되었다. 그 후 아들 10명과 딸 두명을 두었는데, 허왕후가 자기 성이 이어지기를 간청하자 수로왕은 맏아들[태자(太子)] 거등(居登)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둘째아들에게 허씨(許氏)로 사성(賜姓)하여 허씨 성은 수로왕비 허황옥의 성을 따르게 한 데서 유래한다.나머지 일곱 왕자는 불가에 귀의하여 하동칠불(河東七佛:경남 하동에 七佛寺가 있다)로 성불하였다고 전한다.<허씨대동보(許氏大同譜:정사보 丁巳譜)>와 가락국기(駕洛國記) 등의 문헌에 보면 허황옥은 서기 48년 16세때 배에 석탑을 싣고 일행을 태운 배가 긴 항해 끝에 목적지인 가야의 도두촌(渡頭村)에 도착했고,도두촌이 내려다 보이는 망산도(望山島)에서 봉화가 피어올랐다. 그곳이 창원시 웅동면 앞바다라고 한다.그녀의 배를 보고 가야인들은 탄성을 흘렸고,보고를 들은 수로왕은 신하 구간(九干) 등에게 계수나무 노가 달린 배를 저어가서 대궐로 모셔 오라고 명령하였다.그러나 허황옥은 한마디로 거절했다.“내가 너희들을 모르는데 어찌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느냐 ” 신하가 아니라 수로왕이 직접 나와서 맞이하라는 것이었다수로왕은 할 수 없이 대궐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임시로 장막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린 후에야 허황옥은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상륙하였다.수로왕이 임시궁전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서두르지 않았다고 하며 수로왕을 만나기 전 치러야 할 자신의 의식을 행하였다. 높은 언덕에 오른 그녀는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을 제의 장소로 삼은 것은 의도적인 행위였다.이는 자신이 건너온 바다신과 자신이 살아갈 토착신을 연결시키는 제의였는데 중보자는 물론 자신이었다. 제의를 마친 허황옥은 비로소 수로왕이 기다리고 있는 장막 궁전으로 나아가 자신이 데려온 신하들을 수로왕에게 소개하였다. 이는 자기 세력과 수로왕 세력 사이의 연합을 제의한 것이다.수로왕은 "나는 공주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는데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에는 매우 다행한 일이오"라며 환영하였다.이는 수로왕이 허황옥의 연합제안을 수락해 토착세력인 구간 등을 제치고 허황후 집단을 가야의 왕비족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하늘에서 <금줄>을 타고 구지봉에 내려온 수로왕과 아유타국에서 <붉은 깃발>의 배를 타고 온 허황후가 배타적으로 가야 왕실을 구성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허황옥은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수많은 보물들을 백성들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자기 집단과 토착세력을 화학적으로 융합시켰다. 「가락국기」에도 "허황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했다"고 기록되어있다.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이 땅이 꺼진 듯이 슬퍼했다"는 기록도 그녀가 토착민을 억압한 이주자가 아니라 가야 토착민과 화학적 융합 속에서 금관가야의 공동시조였음을 말해준다.참고문헌 <가락국기>가락국의 김수로왕(金首露王)은 허황옥(許黃玉)과 결혼해서 2명의 딸과 열명의 아들을 낳아 그중 둘째아들에게 허씨(許氏)로 사성(賜姓:성을 내림)하여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로 시조가 국제결혼 및 여성이 도시조(都始祖)로 받들어진 문중이다.그 뒤 김수로왕(金首露王)의 10세손 구형왕(仇衡王)이 신라에 양국(讓國합병)케 됨으로써 가락국(駕洛國)은 망하고 자손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지자 살게 된 지역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또 허씨(許氏) 일파에서 인천이씨(仁川李氏)로 분파되고 양산이씨(梁山李氏)도 인천이씨로부터 분관된 것이다.따라서 허씨(許氏).김해김씨.인천이씨.양산이씨는 모두 같은 혈족이라며 종친회명을 <가락중앙종친회>를 조직하여 가락국 후손들의 친목을 다지고 있다.김해(金海)지방에서 살게된 후손은 김해허씨(金海許氏),하주(河州:하양河陽)에 옮겨 살게 된 후손은 하양허씨(河陽許氏),공암(孔巖:양천 陽川)에 터를 잡은 후손은 양천허씨(陽川許氏)이며 시산(詩山,지금의 태인 泰仁)에 이주하여 세거한 후손은 태인허씨(泰仁許氏)로 각각 관향을 삼게 되었다.아울러 허씨(許氏)에서 인천이씨(仁川李氏)가 갈라졌는데 신라때 허기(許奇)란 사람이 사명(使命)을 받아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마침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이 일어나 당나라 현종(玄宗)을 호종(扈從:왕가를 뒤따르며 호위함)한 공으로 당나라 황실의 성(姓)인 이씨(李氏)를 사성(賜姓:성을 내려줌)받고 소성백(邵城伯)에 봉(封)해졌다고 한다.고려조에 와서 그의 후손 허겸(許謙)이 역시 소성백(邵城伯)으로 봉해져 소성이씨(邵城李氏)로 관적(貫籍)하여 시조가 되었으며 양산이씨(梁山李氏)도 인천이씨(仁川李氏)로부터 분관(分貫)하였다. 즉 김해김씨(金海許氏),허씨(許氏),인천이씨(仁川李氏),양산이씨(梁山李氏)는 한 형제이므로 성(姓)은 다르나 같은 종씨(宗氏)이기에 혼인을 안한다.김수로왕의 후손들은 이런 이유로 '가락중앙종친회(駕洛中央宗親會:가락국의 후손이기에 가락종친회라고 함)'를 조직해서 혈족의 유대를 다지고 있으며 모든 허씨(許氏)는 같은 뿌리이기에 허씨대동보(許氏大同譜)를 간행하고 있다.허씨(許氏)는 조선조에 정승(政丞:정1품 재상) 6명을 비롯 고려와 조선에 걸쳐 숱한 인물을 배출해 명문의 지위를 누렸다. 특히 양천허씨(陽川許씨)는 조선조에 정승 5명을 배출했으며 한시대를 주름잡기도 했다.양천허씨(陽川許氏)의 분파(分派)는 크게 동주사공파(東州使公派),판도좌랑공파(版圖佐郞公派),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의 3파로 나뉘어지고 다시 몇개로 세분된다.허난설헌(許蘭雪軒).허균(許筠) 남매는 조선조에 양천허씨(陽川許氏) 가문이 낳은 천재들이다. 아버지는 부제학(副提學:홍문관의 정3품)과 경상도 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와 부제학을 지낸 주기파(主氣派)학자 허엽(許曄)이다.장남은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장관)를 지낸 허성(許筬)이며 차남 허봉(許 )은 부사(府使정3품)에 올라 당대의 뛰어난 재사들로 일가족이 모두 5문장(文章)으로 명성을 떨쳤다.허균(許筠)은 1569년(선조2년)에 태어나 1618년(광해군10년) 50세 때 능지참형을 당하기까지 벼슬에서 여러 번 쫓겨나는 등 실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그는 벼슬길에 있을 때도 자유분방한 사상과 행동으로 당시 보수적인 유림들로부터 미치광이 패륜아 부도덕자로 조소를 받았으나 오늘날엔 선구적 사상가(思想家)로 새로운 평가를 받고 있다.재승덕박(才勝德薄)의 성품 탓으로 드러난 많은 인간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썩고 병들고 불평등한 계급사회에 과감히 도전했던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적서(嫡庶)의 차별이 심해 서자의 등용을 제한하던 당시의 제도와 관습에 항거했고 마침내는 세상을 변혁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은밀히 동지들을 규합해 두 차례에 걸쳐 쿠데타를 시도하기도 했다. 끝내는 이 같은 기도가 발각돼 능지처참의 혹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회개혁 사상을 담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우리 고전문학의 백미이다. 그의 분신과도 같은 홍길동(洪吉童)은 서민 대중의 우상으로 살아 숨어왔다. 그의 문재(文才)의 한 면을 보인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점에서도 국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기록 참고>중국을 여러차례 왕래하며 천주교 서적을 처음 들여왔으며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담배를 피운 사람이 허 균(許筠)" 이라는 설도 있다.27세로 요절한 허난설헌(許蘭雪軒)도 규원(閨怨),추한(秋恨),유선사(遊仙詞)등 주옥같은 시(詩)들을 남겨 우리 여류 문학사에선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조선시대의 뛰어난 여류 시성(詩聖)으로 평가받고 있다.여성 특유의 감상과 애상적 시풍(詩風)으로 독특한 시(詩) 세계를 이룩했고 그의 작품 일부를 동생 허균(許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건네 주어 중국에서도 허난설헌집(許蘭雪軒集)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다.양천허씨는 조선 중기에 당파싸움의 중심에 있기도 했다.그 중에서도 서인(西人)의 영수(領袖:단체의 대표가 되는 사람) 송시열(宋時烈)과 예송(禮訟:예법에 관한 논란) 시비를 벌였던 남인(南人)의 영수 허목(許穆).허적(許積)은 조선 당쟁사의 거두(巨頭)들이다.12촌간이던 이들은 남인(南人)이 득세하면서 허적(許積)이 영의정에 허목(許穆)이 우의정(右議政:정1품 정승)에 나란히 올랐으나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처벌 문제를 놓고 의견대립을 보여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갈렸다.특히 허목(許穆)은 학문에서 송시열(宋時烈)과 쌍벽을 이룬 당대의 대유학자로서 당시 허문(許門)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그는 학.문.서(學.文.書)의 삼고(三古)라 불렸으며 특히 그의 전서 (篆書:전자체로 쓴 글씨)는 <동방 제일>로 일컬어졌다고 한다.오리(梧里) 정승 이원익(李元翼)의 손주 사위이자 선조 때의 문장가.풍류객인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외손이기도 한 그는 대유학자였지만 벼슬길엔 나가지 않고 있다가 56세에 처음으로 참봉(參奉:종9품)에 천거됐다.그러나 이 자리에도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하다 63세때 비로소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정5품)이 되었고 나이 80이 되던 1674년(숙종1) 2차예송(禮訟) 논쟁때 남인(南人)이 서인(西人)을 누르고 집권하게 되면서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 이조참판(吏曹參判:종2품차관)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정1품 정승)에 올랐다.이들에 앞서 성종.연산군 때에 각각 우의정(右議政:정1품 정승)을 지낸 허종(許琮).허침(許琛) 형제와 허종(許琮)의 현손(玄孫:고손자)으로 선조때 좌의정(左議政:정1품 정승)을 지낸 허욱(許頊),허침(許琛)의 아들 허굉 무오사화(戊午士禍:1498년(연산군 4) 류자광 등의 훈구파가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에 대해 일으킨 사화)때 5현(賢)중 한사람인 허반(許磐) 등도 모두 양천허씨(陽川許氏) 인물들이다.상우당(尙友堂) 허종(許琮)은 일찍이 세조때 이시애 난과 장영기 난(張永奇亂)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고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 국방장관)로 승진된 뒤에는 북정도원수(北征都元師:전쟁이 났을때 군무를 통할하던 임시 무관직으로 병권을 도맡았음)로 변방의 여진족을 소탕했다.문.무(文武)에 모두 명성을 떨친 그는 우의정(右議政:정1품 정승)으로 있던 1479년(성종10년), 계비윤씨(연산군의 생모)를 폐위하는 조정회의에 가던 중 누나의 충고에 따라 일부러 말에서 개울로 떨어져 훗날 갑자사화(甲子士禍)때 화를 면했다는 일화가 있다.허침(許琛)은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 잡으려 애썼고 시문(詩文)에도 뛰어났다.재능 많은 허씨 전통의 한 갈래는 남도(南道) 진도(珍島)의 운림산방(雲林山房)에서 <3代畵脈>으로 피어났다.소치(小痴)허유(許維),미산(米山) 허형(許瀅),남농(南農) 허건(許楗)으로 이어지는 3대의 한국남화(韓國南畵)는 우리 예술사의 자랑스런 한 줄기이다.일문의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역시 이들에 못지 않은 한국남화의 거목으로 허씨문중을 크게 빛냈다.조선조의 허씨 인물 가운데 또 하나 특기할 사람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펴낸 한국의 히포크라테스 허준(許浚)이다.그는 선조의 어의(御醫)로 있으면서 의서(醫書)를 저술하라는 명을 받고 양예수(楊禮壽) 정예남(鄭禮男) 김응탁(金應鐸) 등과 집필에 착수했었으나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으로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작업이 중단됐고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는 모함을 받아 한때 유배까지 되었다.허 준(許浚)은 이 같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집필을 시작한지 15년만인 서기 1610년 25권에 달하는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 우리 의학의 새로운 전통을 수립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의학이 발달된 지금도 한.중.일에서 한의학의 바이블로 평가되며 독일에서까지 번역본이 출간됐다.한편 2009년 7월31일 조선시대 불멸의 의학서인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은 한국의 7번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됐다.대한민국 문화재청은 동년 7월 31일(한국시간) 유네스코 사무국 마쓰우라 사무총장이 중앙아메리카 바베이도스 수도 브리지타운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9차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한국이 등재 신청한 동의보감 초간본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승인했다고 말했다.이로써 한국은 1997년 훈민정음과 조선왕조실록의 두 건을 시작으로 2001년에는 직지심체요절과 승정원일기 2007년에는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 조선왕조의궤에 이어 모두 7건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하게 됐다.우리나라의 세계기록유산은 아시아에서 가장 많고 세계에서는 6번째로 많아 문화선진국으로서의 위상을 높였다.또한 동의보감이 조선시대에 한글로 번역됐었다는 사실도 2009년 7월 31일 확인됐다.이래호 전북대 연구교수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간한 반년간 학술지 <장서각> 21집에 게재한 논문에서 한글 필사본 동의보감의 서지적 특징과 국어학적 특징을 자세히 소개했다.이 필사본은 <내경편>의 1권, 3권, 5권 총3권만 전해지며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소장한다. 이 교수에 따르면 번역본 동의보감은 문법적 특징 등으로 볼때 19세기 중반 정도에 언해(諺解)됐으며 어려운 한자어를 많이 쓰고 있어 전문 지식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언해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있다.이 교수는 "1970년대 이후 10여 종의 번역본이 나오긴 했지만 조선시대의 한글 번역본이 발견되기는 처음"이라면서 "한글 번역의 통일성을 기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고 당시 언어의 쓰임과 어휘의 변천을 연구하는 자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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