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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유래검색

  • 성씨

    호(扈)

    문중

  • 유래

    우리나라 형씨(邢氏)의 시조 형옹(邢 )은 당나라 태종때 사람으로 고구려 영류왕 17년 영류왕의 요청으로 당나라에서 파견한 8학사 중의 한사람이라고 한다.<진주형씨세보별록>에 따르면 그는 고구려에 들어와 당나라의 문화,문학,유교의 보급에 공헌하였다고 하며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 품계)을 지내고 남양으로 관적(貫籍)을 하사 받아 남양에 뿌리를 내렸다.그 후 13세손 형방이 고려 충목왕때 문하시중(門下侍中:고려조에서 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하던 종1품 정승)을 지내고 대광보국(大匡輔國:1품)에 이르렀으며 경남 진주 반성에서 살았다.1280년(충렬왕 6) 도원수(都元帥:전쟁시 임시직으로 군(軍)의 총참모장)가 되어 일본 '일기도'에서 왜군을 정벌하는데 공을 세워 지밀직사사(智密直司事:고려때 밀직사의 종2품)에 올라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기에 후손들은 형 방(邢昉)을 1세조로 받들고 본관을 진주(반성)로 하였다그후 시조 형옹의 16세손 형공미(邢公美)가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좌복야(左僕射:고려 문종 때 둔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정2품부총리)에 이르렀으며,이후 문하시중(門下侍中:백관을 통솔하던 종1품 정승)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진주형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2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시험)에 2명 등 4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인구조사에 의하면 진주형씨는1985년에는 1,226가구 5,145명이었으며,2000년에는 1,820가구 5,822명이었다.진주(晉州)는 경상남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757년(경덕왕16) 9주5소경제(九州五小京制)의 실시와 함께 강주도독부(康州都督府)로 고쳤다가 혜공왕때 청주(菁州)로 개칭되었다.1939년 진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나머지 지역이 진양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진양군이 진주시에 통합되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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