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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 족보, 최초 기로소, 최초 호당, 최초 문형, 최초 당대 9봉군문과급제자 만 367명 배출한 '능병기달권'의 명가영의정 권철,도원수 권 율은 부자지간(父子之間)우리나라 권씨(權氏)는 조선씨족통보 등의 문헌에는 총 60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안동과 예천을 제외한 본관은 세거지명이라고 한다.안동권씨(安東權氏) 시조는 권행(權幸)이다. 시조 권행은 원래 신라의 종성(宗姓)으로 왕실 성씨인 경주김씨(慶州金氏,신라김씨)이다. 경주김씨는 금궤(金櫃)에서 태어난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로부터 비롯되었다.대보공 '김알지'는 신라 4대 석탈해왕(昔脫解王) 9년 봄 어느날, 서라벌(徐羅伐)의 시림(始林)에 강림한 난생(卵生)의 설화로 탄생하였는데, 이때 닭이 울어 이를 알렸다고 해서, 시림은 계림(鷄林)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알지'를 석탈해왕이 궁중에서 길러 사위를 삼고, 왕위도 물려주려 하였으나,김알지는 이를 사양하였다.그의 6대손 미추왕(味鄒王)부터 왕위에 즉위하여,신라 56왕 가운데, 경주김씨(신라김씨)가 38왕위를 이었다. 김알지(金閼智)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수류는 욱포(郁甫)를 낳았으며,욱포는 구도(仇道)를 낳고,구도는 미추(味鄒)를 낳았는데, 미추가 신라 왕위에 올라, 경주김씨(신라김씨)는 대보공 김알지(大輔公金閼智)에서 시작 되었으며, 미추왕 즉위 후 태사공 권행의 수성(受姓)까지 668년이며, 태사공(太師公) 권행은 미추왕의 22세나 23세이고, 김알지의 29세나 30세 손이다.(경주김씨편 참조)신라 말 경애왕 때 천년사직의 신라가 부패하고, 잇단 민란으로 국운이 기울자, 신라 변방의 비장(裨將:막료.막비)출신인 후백제의 견훤이 서기 927년 신라를 침입하여, 포석정에서 경애왕(박혁거세의 후손)을 시해하고, 왕실을 유린하자 이에 격분한 당시 고창군 별장(別將:정7품무관)이었던 김행(金幸)은 이 고을의 성주인 김선평(신안동김씨 시조),장정필(안동장씨 시조)과 뜻을 같이 하고, 향병을 모아 고려 태조 왕건과 함께 고창군 병산(지금의 안동 와룡면 서지리)에서 견훤의 대군을 격파하고, 일명 '병산대첩'에서 전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 중의 한사람이다.당시의 고창지역은 후삼국의 전략상 요충 지역이었으며, 이곳에서 세사람의 도움으로 열세에 있던 고려태조 왕건은 우세해질 수 있었다.이곳의 병산대첩의 승리는 역사적으로 후백제의 멸망과, 천년사직 신라의 고려에 손국(遜國) 등 고려에 의한 삼국통일에 큰 영향을 준 싸움이었다.김행(金幸)의 공을 크게 여긴 왕건은 김행에게는 수훈이 크다 하여, "능병기달권"(能炳機達權:김행은 기미(機微)에 밝고 정세를 밝게 판단해 권도에 통달했다,또는 "행(幸)은 능히 기미(幾微)를 밝혀 귀순(歸順)하였으니, 권도(權道,상황에 따른 임기응변으로 일을 행하는 도리)의 적절함에 통달(通達)하여, 권도가 있다)"이라며 권씨성(權氏姓)을 하사(下賜)하였다고,문헌 전고대방(典故大方:단군(檀君)부터 시작하여 한국 역대 인물에 대한 전거(典據)를 밝힌 인명사전으로 강효석이 엮음)에 기록되어 있다.왕건은 권행.장정필.김선평 세 사람을 '삼한벽상아부공신(三韓壁上亞父功臣,벽상공신은 940년 신흥사를 중건할 때 공신당의 동서 벽에 초상이 그려진 공신)'에 책록하고,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 품계)으로, 태사(太師:태사는 삼사(三師)의 정1품)에 제수(除授:추천의 절차를 밟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림)했다.왕건은 이후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하고, 고창군 별장(別將:고려때 무관 정7품)이었던 권행(權幸)에게 안동부(安東府,동쪽지역을 안정시킴)를 식읍(食邑:공이 많은 사람에게 고을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하는것)으로 주었고, 본관을 안동으로 하게 되었다.한편 삼국통일에 공을 세운 이들 3인을 기리기 위해, 서기 983년(성종2)에 세운 삼태사묘(三太師墓)는 안동 북문동 24번지에 있으며, 매년 2월과 8월에 제향한다.안동권씨 시조 묘는 안동 서후면 성곡동 천등산에 있다. 한편 태사공 권행의 후손인 권옹이 한때 실전되었던 태사공의 묘소를 찾고 묘를 수호하기 위해, 스스로 그 계하에 부장되었다 한다.[계 파] 검교공파,광석공파,군기감공파,동정공파,별장공파,복야공파,부정공파,부호장공파,수중공파(종파),시중공파,좌윤공파,중윤공파,호장추공파,추밀공파,급사중공파등이있다.[집성촌] 경북 안동시 법상동,와룡면 이하동,북후면 연곡동,풍천면 가곡동,경북 청송군 진보면 광덕동,경북 월성군 양북면 구길리,예천군 용문면 저곡리,영주시 영주동,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등[족보발간] 성화보:1476년(성종 7,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을사보:1604년(선조 38),갑오보:1654년(효종5),신사보:1701년(숙종 27) 갑인보:1734년(영조10),후갑인보:1794년(정조18),정미보:1907년(순조 1) 신축보:1961년인구조사에서 안동권씨는 2000년에는 총196,566가구에 629,291명이었다. 안동권씨는 서기 1411년(태종11) 권극중이 문과에 장원급제한 것을 비롯,모두 10명의 장원급제자를 포함 문과(文科:대과)에 367명,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에 99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913명,역과(譯科:중국어.몽고어.여진어.일본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기 위해 보던 시험)에 9명, 의과에 4명,음양과에 1명,율과(律科: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기위한 시험)에 5명 등 1,398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여 명성을 떨쳤다.안동(安東)은 경상북도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757년(경덕왕16)에 고창군으로 개칭하였다.940년(태조 23)에 안동부로 승격되었다가, 995년(성종 14) 행정구역 개편 때 길주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안동대도호부로서 경주와 함께 경상좌도(慶尙左道)의 대읍으로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석릉(石陵).고령(古寧).화산(花山).능라(綾羅).지평(地平).일계(一界).고장(古藏)등의 별호가 있었고,1896년 경상북도 안동군이 되었다.1963년 안동읍이 신안동시로 승격되었다가,안동시로 개칭하였다.1995년 안동군이 안동시에 통합되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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