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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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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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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양화씨 시조 화명신(化明臣)은 중국 명나라 사람으로 조선 중엽 정유재란(丁酉再亂)때 귀화했다. 중국의 낭야(瑯 )사람인 그는 명나라 중엽 이부상서(吏部尙書:고려때는 정3품 장관)를 지냈으며 본래의 성은 화(花)씨였다고 하며,이름은 화광신(花光新)였다고 한다.한국인이 된지 4백여년이 지났으나 족세(族勢)는 아직 많지는 않은 편이다.16대를 이어오며 전국에 945명여명이 살고 있다. 관향(貫鄕)인 경남 진양(晋陽)을 중심으로 경남지방과 부산시 일원에 주로 모여 살고 있다.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화(花)씨의 세계(世系)는 명나라개국공신인 화운룡(花雲龍)에서부터 비롯된다. 대사마(大司馬군사업무 총괄하는 병조판서(兵曹判書)를 달리 이르는 말) 대장군(大將軍:고려때는 종3품)을 거쳐 벼슬이 영상서사(領上書事)에까지 올랐으며,그의 아들 화선(花善)은 상서도성(尙書都省고려때는 정무(政務)를 맡은 상서육부(尙書六部)를 통할(統轄)하던 관청)장관인 상서령(尙書令:종1품 정승)을 지냈다고 한다.문헌에 의하면 명나라 말기에 만주의 여진족이 강성해지면서 북경을 점령한 청군(淸軍)이 낭야(瑯 )에 까지 밀려들자,시조 화명신(化明臣)은 "어진 사람은 기회를 알고 행(行)한다"며 <예의의 나라>인 조선으로 일가를 이끌고 망명했다.경기도 광주(廣州)교외의 소영대(沼靈臺)에 터를 잡고 정착한 그는 이름도 성도 숨기고 살았다.조선 성종때 그의 이름이 조정에 알려졌고 성종은 "중국의 화(花)씨가 조선에 귀화한 것은 향화(向化)의 의리"라며 "화(化)"자를 성(姓)으로 하사했다.경성군(慶城君)으로 봉해진 그는 도승지(都承旨:승정원의 정3품 왕의 비서실장)에 기용됐다. 그러나 화(化)씨는 득성(得姓)시조 이후의 사성보첩(賜姓譜牒)을 잃게 되어,헌종 때 후손들이 안동부(安東府)에 보존돼 있는 족보를 가까스로 찾아냈으나, 원본이 크게 훼손돼 정확한 선계(先系)를 밝히지는 못하고,화명신(化明臣)의 6대손으로 알려진 화섭(化燮)을 1세조로하여 세계(世系)를 잇고있다.화섭(化燮)은 강원도 영월에서 중국 귀화인의 후손인 시(柴),마(麻),천(千)씨와 더불어 "선대(先代)의 고향에서 먼 곳에 와 고락을 함께 하자"며, 도원(桃園)결의로터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 정유재란이 일어났을때 그는 원병 14만명을 이끌고 온 명나라 마귀(麻貴)제독을 만난다. 마귀(麻貴)가 도원수 권율(權慄)이 거느리는 조선군과 연합,울산에서 조산성(鳥山城)을 포위하고 공격했다가 흑전장정(黑田長政)의 왜군에 패해 경주로 물러나 재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그는 마귀(麻貴)의 군막을 찾아가, "신주[(神州(中國)]의 무신(武臣) 집단 후손인 나에게 병력을 주면 왜군을 무찌르는 선봉에 서겠다"고 요청했다.마귀(麻貴)는 화섭(化燮)을 중군(中軍)선봉장으로 삼고 건주기병(建州騎兵) 1만8천명을 거느리게 했다. 그는 명조의 무신(武臣) 후예답게 이들 병력을 지휘, 울산에 포진한 왜군을 몰아내는데 혁혁한 무공을 세운다. 이후 곳곳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등 전공을 세웠다.1598년(선조31년) 7년전쟁이 끝난 뒤, 그에게는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 영양(英襄)의 시호가내려졌다.우리나라에 건너와 가문을 연 이래 처음으로 조선의 훈신(勳臣)이 된 것이다. 전주이씨(全州李氏)를 아내로 맞았던 그는 전쟁이 끝난 뒤 경남 진양(晋陽)으로 옮겨 터를 잡았다.그래서 진양화씨가 되었다.그 곳에서 여생을 마친 중시조 화섭(化燮)은 진양땅 명석면(鳴石面)의 용장(龍藏)골에 묻혔다.그의 외아들 화봉상(化奉祥)은 선대의 후광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품계)의 가자(加資:조선때 정3품 통정대부 이상 당상관의 품계)를 받았다.진양화씨(晋陽化氏)는 득관조 이후 안동권씨(安東權氏),파평윤씨(坡平尹氏),성산이씨(星山李氏), 김녕김씨(金寧金氏),연일정씨(延日鄭氏),창녕조씨(昌寧曺氏),진양강씨(晋陽姜氏),의성김씨(義城金氏) 등 영남의 명문 거족들과 통혼하여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며 양반가문의 전통을 굳혔다.해방 후에도 화(化)씨는 시조 화섭(化燮)이 터잡은 경남지방을 벗어나지 못한채 현재 15세 종손 화명재(化明載)씨가 종가의 정통을 계승하고 있다.일제 때 창씨개명을 강요당했다가 해방후 호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사무착오로 화(化)씨 아닌 하(河)씨로 등재돼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그동안 뿔뿔이 흩어진 일가간에도 내왕이 끊겼으나 최근 서울,강원도 등지의 일가를 찾아내 결속을 다지고 후손들이 가장 번창한 진양(晋陽)을 중심으로숭묘록(崇墓錄)을 간행하고 인광재(仁匡齋)를 건립하는 등 조상의 빛나는 얼을 되새기고 있다.인구조사에 의하면 진양화씨는1985년에는 400가구에 1,592명이었으며,2000년에는 252가구에 824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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