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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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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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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황씨 1세조 황사청(黃士淸)은 조선 선조때 사람으로 학자(學者)였다. 그는 평해(平海.경주에 속한 현)에서 살다가 임진왜란때 양주(楊州)로 피난하여 정착하였다.후손들은 선조의 세거지인 경주를 본관으로 삼아 계대(系代)하고 있다.황사청(黃士淸)의 선대는 평해황씨로 황란(黃鸞)의 5세손이며 어모장군(禦侮將軍:정3품 당하관)으로 충좌위(忠佐衛) 에서 벼슬을 지낸 황진운(黃進雲)의 둘째 아들임이 '평해황씨세보(平海黃氏世譜)'에서 밝혀졌다.황락(黃洛)의 후손 금오공(金五公)황온인(黃溫仁)과 그 후손인 정랑공(正郞公),황란(黃鸞)의 5세손인 황진운(黃進雲)의 둘째아들인 황사청(黃士淸)등은 고향인 경주(慶州)에서 어릴 때 임진란때 함경도지방으로 가던 중 가족과 헤어져 경기도 양주군 산내면(山內面)에 정착 은거하면서부터 본관을 경주(慶州)로 하여 후손이 계승하였다. 7세손 황치홍(黃致弘)은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품계)와절충장군(折衝將軍:정3품당상관품계)에올랐으며 행용양위부호군(行龍 衛副護軍:종4품)을 역임하였고,8세손 황기석(黃基錫)은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당하관품계)에올라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궁내부주사(宮內府主事)를 역임하였으며 서당(書堂)을 세워 후학을 위하여 면학(勉學)에 전념하였으나 정미의병(丁未義兵)으로 인하여 이 역시 파손되었으며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고 그대로 본관을 <경주(慶州)>로 족보(族譜)를 편찬하였다.그후 9세손인 황해철(黃海哲)이 족보(族譜)를 재편찬하고자 실관(失貫)된 본관(本貫)을 찾기 위하여 1982년 경북 울진(蔚珍) 월송(越松)에 가서 문의하던 중 경남 양산(梁山)에 거주하는 황우찬(黃宇贊) 족장(族丈)이 병진보(丙辰譜)에서 황사청(黃士淸)을 찾아 평해황씨(平海黃氏)후손임을 확인하였으며,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황(黃)장구 족장(族丈) 족보(族譜)에도 역시 동재(同載)되어 있고 국립도서관(國立圖書館)에도 또한 동일하게 등재(登載)되어 있으므로 확실히 평해(平海)에서 분관(分貫)되었음을 확인하였으나,근 4백 년간을 <경주(慶州)>로 내려온 관향(貫鄕)을 존중하여 평해(平海)로 복원할 수 없어 황사청(黃士淸)을 1세조로 하고 그 후손들이 계승하고 있다.경주황씨는 조선시대에 황헌(黃獻,1607년생)이 1637년(인조15) 별시(別試:나라에 경사가있거나 병년(丙年)마다보던 과거)무과(武科:무관을 뽑던과거) 병과(丙科)에 급제하는 등 모두 3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인구조사에 의하면 경주황씨는 2000년에는 총 2,643가구에 8,501명이었다.경주(慶州)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65년(탈해왕9) 시림(始林)에서 김씨 시조가 탄생하여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다. 307년(기림왕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다. 935년(태조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왕건에 손국하자, 경주로 개칭하고 식읍을 주었고,그를 사심관으로 삼았다.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전역과 천북면과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로 승격했으며,경주군은 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955년 경주군과 통합하여 시로 승격하였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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