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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윤보의 후손 3대에 걸쳐 대청댐 지역에대전지역 최초의 사회복지시설 “미륵원”이라는 여정 지어지나가는 길손에게 편의 제공회덕황씨(懷德黃氏)시조 황락(黃洛)은 한나라 유신(儒臣)으로 서기28년(유리왕 5)에 교지국(월남의 한지방,다른 설은 일본으로 가다 풍랑을 만났다 함)에 사신으로 가던 중 폭풍을 만나 평해에 표착하자 월송정에 상륙하여 우리나라에 귀화하고 평해에 정착 세거하였다고 한다.그후의 후손은 고증할 자료가 없으며 후손인 황윤보(黃允寶)가 고려때 호부전서(戶部典書:정3품 장관)와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문하부의 종2품)를 지내고,좌명공신으로 회천군(懷川君)에 봉해지자 그를 1세조로 받들고 본관을 회덕(懷德)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1세조 황윤보의 묘는 대전광역시 대덕구 마산동에 있다.황윤보의 후손은 3대에 걸쳐 현재의 대청댐 지역에 '미륵원'이란 여정을 지어놓고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사비를 들여, 의제공을 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미륵원(대전시기념물 제41호)은 대전광역시 동구 마산동 대청호변에 있는 원(院)으로 고려말 우왕의 폐위를 반대하고 낙향한 황윤보가 설립했으며 회덕황씨 2대 황연기(黃衍記),3대 황수(黃粹),4대 황자후(黃子厚)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110년동안(1332~1440) 삼남(三南)과 서울을 오가는 여행자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했다.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되어 있으며 미륵원은 충청도 향풍의 근원이 되었다.미륵원(彌勒院)은 여말 조선초(麗末朝鮮初)에 대전을 본관으로 하는 유일한 성씨인 회덕황씨 집안의 선행으로 운영된 역참으로 남루(南樓)에 걸린 제영기(題詠記)는 목은 이색,하륜,변계량,정인지,우암 송시열 등이 회덕황씨 일가를 찬(撰)한내용이다.미륵원은 황윤보의 아들 황연기 때부터 운영하였다고 하며 황연기의 유언으로 대대로 110년간운영되었으나 16세기 초에 이르러 미륵원의 운영이 갑자기 중단되었는데, 그 이유는 후손 황호가 금성대군을 도와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처참한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라고한다.이 사건으로 형제와 직계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결국 회덕황씨가 소유하고 있던 산지와 토지 대부분은 은진송씨 문중의 차지가 되었다고 한다.회덕황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5명,무과(武科:무관을 뽑기위한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였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로 나뉘어 3년마다 실시)에 4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시험)에 15명 등 24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회덕황씨는1985년에는 1,553가구 6,636명,2000년에는 2,264가구에 7,393명이었다.회덕(懷德)은 대전광역시 동구와 대덕구 일대에 있던 옛 지명으로, 940년(태조 23)에 회덕현으로 이름을 바꾸어 1018년(현종9) 공주(公州)에 편입되었다가,1172년(명종2)에 감무(監務:작은현에 중앙에서 판견한 감독관)를 설치하면서 독립하였다. 1413년(태종13)에 군.현제 개편으로 회덕현으로 정해진 이래 조선시대 명맥이 이어졌다.1914년 군.면 폐합으로 회덕군이 폐지되고 진잠면(鎭岑面)일원과 공주군 현내면을 합하여 대전군으로 개칭되었고 1935년 대전부로 승격됨에 따라 대덕군이 신설되었으며 1995년 대전광역시 대덕구가 되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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