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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평윤씨(坡平尹氏) 시조 윤신달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현신(賢臣)으로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기까지 항상 "인의(仁義)와 도덕(道德)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충간(忠諫)했다고 전한다.그는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큰 역할을 하여 벽상삼한익찬2등공신(壁上三韓翊贊二等功臣:940년 신흥사를 중건할때 공을 세운 공신들의 초상을 공신당의 동.서 벽에 그려진 사람을 벽상삼한공신)에 책록되었으며,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 품계)으로 태사(太師:삼사의 하나로 정1품)의 관작을 받았으며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파평(坡平)으로 삼아 가문의 기틀을 다져왔다.시조 윤신달의 5세손 윤관(尹瓘:1040~1111)이 고려 문종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선종때 합문지후(閤門祗侯:고려때 나라의 의식을 관장하던 합문의 정7품)와 좌사 낭중(左司?中:정5품)을 지내고,1107년(예종3) 여진정벌에 원수(元帥:총사령관)가 되어 17만 대군을 이끌고 함주(咸州)와 영주(英州)등 9지구에 성(城)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토평하고 개선했다.뒤에 벼슬이 수태보(守太保:삼공의 하나로 정1품).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 정승).판병부사(判兵部事:병부의 으뜸벼슬).상주국(上柱國:상주국은 첫째가던 훈공).감수국사(監修國史:고려 때 종1품이나 정2품의 재신이 겸했는데 사서를 편찬한 '사관의 장관'을 감수국사라 함)에 이르러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그는 특히 별무반이라는 특수부대를 편성하여 여진정벌에 나서 적 5천명을 죽이고 130명을 생포하는 등 북진정책을 완수한 공으로 영평백(領平伯,영평은 파평의 별호,백은 5등봉작의 4번째로 식읍700호를 국가에서 받아쓰게 함)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파평(坡平)으로 하였다.(이하 파평윤씨 편 참조)파평 윤씨의 시조 윤신달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경기도 파평(파주)에 있는 파평산 기슭에 용연(龍淵)이라는 연못이 있었다. 어느날 이 용연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서리면서 천둥과 벼락이 쳤다.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향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린지 사흘째 되는날,윤온 할머니가 연못 한 가운데 금으로 만든 궤짝이 떠 있는 것을 보고 금궤를 건져서 열어보니 한아이가 찬란한 금빛 광체속에 누워있었다. 금궤 속에서 나온 아이의 어깨 위에는 붉은 사마귀가 돋아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잉어 비늘이 나 있었으며, 또 발에는 황홀한 빛을 내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윤온 할머니는 이 아이를 거두어서 길렀으며 할머니의 성을 따서 윤씨(尹氏)가 되었다. 잉어에 대한 전설은 윤신달의 5대손인 윤관의 일대기에도 나온다. 윤관이 함흥 선덕진 광포(廣浦)에서 전쟁 중에 거란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강가에 이르렀을 때 잉어떼의 도움으로 무사히 강을 건너 탈출하였다. 이번에는 장군의 뒤를 쫓던 적군이 뒤쫓아와 강가에 이르자 윤관 장군에게 다리를 만들어 주었던 잉어떼는 어느틈에 흩어져 버리고 없어졌다. 그래서 파평 윤씨는 잉어의 자손이며 또한 선조에게 도움을 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용연(龍淵:일명 가연)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눌로리에 있으며,태고적부터 지하수가 솟아나는 천연의 연못이다. 옛부터 종중(宗中)에서 준설한 것으로 보이나 기록(記錄)은 찾을수 없다. 근대에는 1900년 강화문중(江華門中)에서 준설하고 “파평용연(坡平龍淵)”이라는 비석(碑石)을 세웠다. 그러나 6.25동란 당시 크게 훼손되어 1972년 3월에 문정공파(文定公派) 종중에서 파평윤씨시조발상지비(坡平尹氏 始祖 發祥址碑)를 새로 새겨 건립하였다.연못 주위는 초장(草場)이었는데,1976년 3월 태울공파(太蔚公派) 예산종중(禮山宗中)에서 수양버들 150株, 은행나무 6株, 벚나무 5株를 식수 하였다. 옛부터 “윤씨연못”으로 공칭(公稱)되어 왔으나 세부 측량 당시에 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유(國有)로 편입되어 있었다. 그때문에 일제강점기에 파주읍에 거주하는 노(魯)모씨가 개답(開沓)하기로 허가를 받은 것을 발각(發覺)하고,윤씨 종중에서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한 결과, 지적대장에는 “윤씨 연(尹氏淵)”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던 것을 1977년 1월 14일 대종회에서 종중소유로 소유지 이전등기를 했으며 면적은 2,531평이다.전설에 따르면, 용연에는 용인이 살고있어 연못가가 불결해지면 뇌성이 진동하고 폭풍우가 친다고 전한다. 시조에 관한 전설이란 신라 진성왕 7년(서기 983) 음력 8월15일 용연위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요란한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용연 위에 한개의 옥함이 떠 올랐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고을 태수에게 고하여 태수가 연못가에 나가보니,용연 연못에 떠오른 옥함이 연못 가운데로 밀려 들어가는 것이었다.그러던 중 어느날 날이 저물 무렵 연못가에 빨래를 하던 한 노파가 옥함이 다시 떠오르는 것을 보고 이를 건져내어 열어보니, 그 속에는 오색의 우모(羽毛)에 쌓여 있는 어린 사내 아기가 있었다.찬연한 서기를 발하면서 옥함에서 나온 사내 아기는, 융준용안(隆準龍顔)으로 코가 우뚝하여 용의 상을 닮았으며,양쪽 어깨에는 붉은 사마귀가 있어 일월(日月)을 상징하고,좌우 겨드랑이에는 비늘이 81개가 돋아 있었으며,발에는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어서 북두칠성의 형상과 같았고,온 몸에는 광채가 솟아서 눈을 부시게 하였는데 이 아기가 파평윤씨 시조이다.이러한 탄생 설화를 가진 시조 태사공은 파주산 아래에 살면서 학문과 무예를 닦았는데, 파평산 마루에 말이 달릴 수 있는 길을 닦고 궁마 훈련을 했다. 파평산 마루에서 말을 달리며 무예를 연마 하던 곳이 치마대(馳馬臺) 라고 하는데,지금도 태사공이 길을 닦았던 석축 일부가 남아 있다.치마대에서 태사공이 기마술을 연습 할때 애마가 죽자, 작은 철마를 만들어 그 곳에 두었는데 후일 어떤 철공이 그것을 훔쳐 갔다가 그만 즉사를 했고,그때 함께 갔던 사람이 두려운 생각이 나서 흙으로 구운 작은 말을 가져다 놓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태사공이 학문을 닦았다는 금강사(金剛寺)도 그 사지만 남아 있다.태사공은 파주에서 임진강을 건너 개경을 내왕할때 공이 강을 건널때에는 항상 강물이 갈라지며 홀연히 백사장이 드러나서 신발을 적시지 않고 강을 건넜고,송도에 있는 조정에 출사 한뒤에도 말을 타고 파평면에 있는 사저에서 강너머로 내왕 하는데 말의 빠르기가 나는 듯 하였고,강을 건널 때는 물이 양쪽으로 갈라졌다고 하여, 이를 두고 이곳을 ‘물결을 끊고 마시듯이 강을 건넌다’ 하여 여음진(如飮津)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가 음진(飮津)으로 고쳤는데,이것이 다시 후세에 음이 변하여 임진강이 되었다고 전한다.또,윤씨(尹氏)가 잉어를 먹지 않는 이유는 5세 문숙공 윤관(尹瓘)장군이 함흥 선덕 진광포(鎭廣浦)를 건너서 적군을 추격 하다가, 복병에게 포위를 당해 위급한 지경에 있었는데,부하장수 척준경(拓俊京)의 힘을 입어 간신히 살아 나와, 20여명의 부하들이 보호해서 포위망을 벗어나 돌아 오다가 광포에 당도 했는데 해는 저물었고,광포는 물이 들어와서 다리가 보이지 안았다.그 광포에 물이 없을 때는 드문드문 다리를 놓고 건너 다니고,물이 들어올 때는 건너지 못하여 불통되던 곳인데,그날은 물속으로 다리의 형체가 보이므로 간신히 건너 왔는데,쫓아 오던 적군이 이 다리를 건너고 있을 때,물속에 보이던 다리의 형체가 보이지 않아 적군이 물에 빠져 죽었다. 문숙공은 잉어떼가 다리를 놓아 건너왔다고 해서, 그 포구 이름을 모일‘徒’ 비늘‘鱗’자 도인포(徒鱗浦)라 했고,잉어가 공을 도와 드렸다 해서, 윤씨들은 잉어를 먹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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