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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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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신 엄흥도 서예가 엄한명,청렴한 대신 엄집엄씨(嚴氏)의 시조는 서기 742년~755년간에 정사(正使)로 부사(副使)인 신시랑(辛侍郞)과 함께 당나라의 파락사(坡樂使:새로운 악장을 전하는 임무를 띤 사신)라는 사절임무를 띠고 신라로 들어왔다가 그대로 머물러 귀화한 엄임의(嚴林義)이다.시조 엄임의(嚴林義)는 한나라 시인(詩人) 부양(富陽:일명 엄자능선생 嚴子陵先生)의 후예이며 당나라 상국(相國) 화음(華陰)의 일족이라고 한다.영월엄씨족보와 문헌에 의하면 엄임의(嚴林義)는 당현종(玄宗:제6대왕,재위:712년~756년)이 새로운 악장(樂章)을 만들어 이를 주변의 여러나라에 전파하기 위해 보낸 파락사(波樂使)로 신라에 들어왔다가 본국에서 정변(政變)이 일어나자 돌아가지 않고 현재의 영월땅인 내성군(奈城郡)에 정착한 것이 우리나라 엄씨의 시원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그 후 고려조에 와서 그를 내성군(奈城君)에 추봉하였고,후손들에게 영월을 식읍(食邑:나라의 공신에게 내리어 그곳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하던 고을)으로 하사하자 후손들이 그곳에 살면서 영월(寧越)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특히 엄씨의 본관지인 영월읍 하송리에는 처음 정착하면서 직접 심었던 은행나무가 "한국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수령"을 자랑해 <천연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되었으며신기하게도 이 은행나무는 경술국치(庚戌國恥)때와 8.15해방때 동편의 큰 가지가 부러졌으며 6·25 때는 북편의 가지가 부러지는 등 국가의 대이변이 있을 때 마다 무언의 예시가 있었다고 한다.파락사로 같이 들어온 신시랑(辛侍郞)과 함께 엄(嚴).신(辛) 양 성씨(姓氏)는 다 같이 영월을 본관으로 삼았고 타국으로의 귀화 후 외로움을 달래며 서로 종씨(宗氏)라 부르게 되었으며,양 성씨의 후손들은 시조의 유훈에 따라 혼인도 않고 의좋게 지내고 있다.시조 엄임의(嚴林義)의 묘는 영월의 영흥리에 있다.시조 엄임의(嚴林義)는 고려시대에 호부원외랑(戶部 員外郞:정6품)을 지냈으며 아들 3형제중 큰아들 엄태인(嚴太仁)이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조선시대에 병기 만드는 일을 맡아 하던 군기시의 명예직 벼슬)으로 영월군(寧越君)에 봉해졌다.엄씨는 시조의 3형제 엄태인.엄덕인(嚴德仁).엄처인(嚴處仁)대에서 3파(派)를 이루었고,엄태인의 7세손 엄용도(嚴用度)가 조선에서 봉상시정(奉常寺正:조선시대에 제향과 시호에 관한일을 맡아보던 관청,정(正)은 벼슬)을 지냈으며,아우 엄이도(嚴以度).엄안도(嚴安度)는 군기시정(軍器寺正:조선시대에 병기 만드는 일을 보던 관청으로 책임자는 도제조(정1품)였으며,제조(정2품) 다음의 자리가 '정(正)'으로 정3품)을 지냈다.엄용도의 6세손인 엄흥도(嚴興道:시호는 충의 忠毅)는 영월의 호장(戶長:고을 아전의 맨 윗자리)으로 있을 때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유배를 와서 살해 당하자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돌보지 않았을 때 혼자 단종의 시신(屍身)을 수습해 장례를 치른 뒤 몸을 숨겼다.현종때 송시열(宋時烈:호는 우암.좌의정)의 주청으로 그의 후손이 등용되었고 영조때는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문(旌門:충신.효자를 기리기위해 집앞이나 마을 입구에 세우던 홍문)이 세워졌으며 엄흥도는 공조참판(工曹參判:종2품차관)에 추증(追贈:공이 많은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나라에서 그의 관위를 높여주던 일)되었다.엄덕인의 증손 엄광(嚴光)은 고려시대에 상서좌복야(左僕射:문종 때 설치한 상서도성 소속의 정2품부총리)를 지냈으며 14세손 엄흔(嚴昕)은 조선 중종때 식년문과(式年文科:3년 즉 병년마다 보던 정기 과거시험)에 급제하고 전한(典翰:홍문관의 종3품으로 왕의 자문에 응하고 문한의 처리를 담당)을 거쳐 사인(舍人:의정부의 정4품) 등을 역임하였다.그의 현손 엄집(嚴緝)은 현종때 문과에 급제하고 숙종때 공조판서(判書:정2품장관)로서 장희빈(張禧嬪)의 처벌을 주장하였으며 다음해 좌참찬(左參贊:의정부의 정2품)에 이르러 지병으로 사퇴했는데 청렴함으로 유명하였다.엄집의 현손(玄孫:현손은 4대 후손) 엄석정(嚴錫鼎)은 헌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府使:정3품수령)를 거쳐 대호군(大護軍:대장군이 바뀐 명칭으로 보공장군이라고도 하며 오위에 딸린 종3품)을 지냈으며 고종때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장관)에 올랐다.엄한명(嚴漢明)은 영조때의 뛰어난 서예가로서 고금의 서법(書法)을 집대성한 집고첩(集古帖)을 만들었으며 그의 아들 엄계응(嚴啓膺)은 정조때 서화가이자 시인으로 이름이 높았고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조선초기에는 왕명의 출납과 궁중의 숙위를 담당했음 지사는 2품)에 올랐다.이밖에 광해군때 폐모론(廢母論)에 반대 상소하고 인조반정뒤 부응교(副應敎:종4품)를 지낸 엄성(嚴惺)과 인조때 경상좌도수군절도사(節度使:조선시대에 각 도에 두었던 수영의 수군을 통솔하던 정3품 수사.절도사)과 도총관(都摠管:오위도총부에서 군무를 총괄하던 최고 군직으로 정2품)을 역임한 엄황(嚴愰)이 유명했으며,효종때 좌부승지(左副承旨:승정원의 정3품 승지)를 지내고 현종때 한성좌윤(左尹:조선시대 한성부의 종2품서울시부시장)을 지낸 엄정구등이 뛰어났다.영월엄씨는 크게 3파로 나뉘는데,군기공파,복야공파(僕射:고려때 중서문하성의 좌.우복야 정2품부총리),문과공파 등이 있으며,고려시대에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보문각은 고려시대에 경연과 장서를 맡아보던 관아로 직제학은 정4품)과 전의시(典儀寺:제사를 주관하고 왕의 묘호와 시호를 제정하는일을 보던 관아로 충렬왕 34년(1308년)에 봉상시를 고친이름) 판사(判事:전의시의 정3품 으뜸벼슬)를 지낸 엄공근(嚴公瑾)과 해주목사(牧使:정3품수령) 엄익겸(嚴益謙),밀직사부지사를 지낸 엄수안(嚴守安),명천현감(縣監:종6품수령) 엄효량(嚴孝良)을 파조(派祖)로 하는 여러 파(派)가 있다.그 중 엄수안은 고려 원종때 문과에 급제하고 중랑장(中郞將:정5품 서반의 품계),충청도안찰사(按察使:고려 최고의 지방행정 구획인 5도의 장관으로 1276년에 안렴사로 개칭됨),서북면지휘사 등을 역임하였다.영월엄씨는 고종황제의 비 순헌엄황귀비(純獻嚴皇貴妃)를 배출했다. 그는 영친왕 이은(李垠)의 생모이며,만년에는 숙명여자대학교.숙명여자고등학교,진명여자중학교.진명여자고등학교,양정고등학교 등의 교육기관을 세워 많은 인재를 배출시켰으며 개화기의 육영사업에 공을 세웠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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