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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정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저자 배출한 삼한갑족두문동 72현 김자수,기묘명현 김 정, 양관대제학 김창희, 추사 김정희1395년 경주김씨세계서(慶州金氏世系序)기술(영분공후 수은공파)경주김씨(慶州金氏)는 신라 왕족의 3성씨(박.석(昔).김)가운데 하나로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불린다.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의하면,시조 알지(閼智)는 영평3년(서기60,탈해왕4) 8월4일에 호공이 월성의 서리(西里)를 걷고 있을때, 큰 빛이 시림속에서 나오는데 자주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뻗쳐있었고,그 구름속에는 황금궤가 나뭇가지에 걸려있었다. 금궤에서 빛이 나오고 나무 밑에서는 흰 닭이 울고 있었다.보고를 받은 탈해왕은 친히 숲으로 행차하여 궤를 열어 보았더니,사내아이가 누워있다가 곧 일어났다.왕은 사내아이를 안고 대궐로 들어오니, 새와 짐승들이 따라와 춤추고 뛰놀았다고 한다.시림의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金)으로 하였고, 우리말 '아기'라는 뜻의 "알지"라고 이름 하였다. 왕은 "하늘이 내리신 아들"이라 하여 훌륭히 키웠다.알지는 태자에 책봉되어 왕위에 추대되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파사대왕에게 양보하였으며, 알지의 6세손인 미추왕을 시작으로,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알지의 28세손)이 서기 935년 천년사직인 신라를 고려에 손국할때까지, 38대왕을 상계하여 선원세계(璿源世系)를 계승했다.경주김씨는 경순왕의 아들 9 형제 중 셋째 아들인 영분공 김명종(金鳴鍾:영분공파)과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대안군파)을 1세조로 받드는 계통이 대표적이며,고려때 대장군 김순웅은 경순왕의 넷째아들 대안군 김은열의 후예로 전해오다가,경순왕의 첫째아들인 마의태자 김일의 후손으로 확인이 되었다고 하며,태자의 아들인 김선웅과 김순웅은 마의태자가 강원도 설악산 등지에서 신라를 되찾기 위한 항려(抗麗)운동을 할때, 큰할아버지인 김억렴의 슬하에서 자랐다고 한다.차남 김순웅(金順雄) 대장군(大將軍:종3품)을 1세조로 받드는 대장군파(大將軍派),김순웅의 13세손으로 좌찬성(종1품 재신)에 오른 김균(金 ,1341~1398,조선개국 3등공신,계림군)을 1세조로 받드는 계림군파(鷄林君派),병판공파(兵判公派,김은열의 14세손),백촌공파(김은열의 17세손 김문기),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김은열 후손 김장유),태사공파(太師公派:김은열의 후손 김인관:고려 예종때 위위시경(尉衛寺卿:종3품) 검교 태자태사.정1품),상촌공파,장사랑공파(은열의 16세손 김존일) 등 크게 6파로 갈라졌으며, 후대로 내려오면서 10여개의 지파(支派)로 나누어졌다.한편 마의태자(麻衣太子)는 신라 제56대 왕인 경순왕과 죽방왕후 박씨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김일(金鎰)이다. 마의태자의 이칭은 개골산에서 마(麻)로 옷을 입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강원도 인제에서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신라소국을 세우고 김부(金富)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김부(金富)는 개명(改名)이 아닌 뜻이 통하는 한자을 취하여 만든 이름으로, 당시 향찰 표기법에 의하면 같은 이름이다. 금부대왕(김부대왕)이란 명칭은 김일(金鎰)의 또다른 이름인 김부(金富)에서 유래되었다. 야성김씨,경주김씨 대장군공파,청풍김씨,경주김씨 계림군파는 마의태자의 후손을 시조로 한다. 청풍김씨는 마의태자 김일의 차남인 대장군공 김순웅의 12세손인 고려말의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 정승) 김대유(金大猷)를 시조로 받들고 있으며,경주김씨 대장군공파는 경순왕의 첫째아들인 마의태자(麻衣太子) 차남으로, 고려때 대장군(大將軍:종3품)에 이어 상장군(上將軍:정3품)에 오른 김순웅(金順雄)을 1세조로 받든다.<편집자주>경주김씨 계림군파 대종회의 계림군파 제7차 대동보편찬위원회(공동위원장:金學萬.金亨式)는 조상의 계보에 대해,고려초 장군을 지낸 순웅장군(順雄將軍) 예하(裔下:후손)로 13세 적장손(嫡長孫) 계림군 김균(金 ,1341~1398)까지는 고려사(高麗史)기록에 밝혀졌으나,순웅장군의 조상은 어느 사료에도 밝혀진바 없어 원조 순웅을 1세조로 또한 계림군 김균을 1세로 하여 일관되게 대동보를 편찬하였고, 대동보 편찬의 적기(適期)는 1세조가 보편적인데, 일부 극소수 종원들이 계림군의 13세조인 김순웅(金順雄)을 사료상 근거가 없는 마의태자의 둘째 아들로 계대함은 잘못이라고 반박하고 있다.제7차 대동보편찬위는 더구나 조선시대에 공신들의 적장종통을 관리해온 국가기관인 충훈부 등록과 1724년부터 1755년까지 30여년간 영의정 주관하에 360여 석학들이 연구조사하고 조정에서 발행한 국조훈보에 개국공신 김균 적장종통이 다음맏파의 장손인 김원중(金元重,1583~1657)으로 세습된후, 직계장손이 420여년간 계림군의 부조지전과 묘소를 수호관리하며 향화(香火)를 받들어온 현재의 종통을 부정하고, 근거없는 족보를 발행함은 잘못이라고 밝히고있다.경주김씨 계림군파(鷄林君派)는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김순웅)에서 나온 파로 김순웅의 13대손인 계림군 김균(鷄林君,金 ,1341~1398년)은 시호는 제숙(齊肅)으로 문하부지사 김지윤(金智允)의 아들이다. 1360년(공민왕9)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한 뒤 공양왕때 친구인 조준(趙浚)의 천거로 전법판서(典法判書:정3품장관)에까지 승진하였다.그는 조선개국 후 개국3등공신에 책록되어,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지고,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왕명을 출납하고 궁중을 숙위하던 중추부의 3품)를 거쳐, 숭록대로(崇祿大夫:종1품품계)로 좌찬성(左贊成의정부 종1품재신)에 이르렀다.경주김씨는 후손들이 번성함에 따라, 살고있는 지역이나 현달(顯達벼슬이나 덕망이 높아서 이름을 세상에 드날림.입신출세)한 인물 중심으로 분관 되었다.영분공파의 파조인 김명종은 고려에서 경주군(慶州君)에 봉해졌으며, 6세손 김예겸(金禮謙)이 고려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940년 신흥사를 중수할때 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의 초상을 공신당 동.서 벽에 그려 넣어진 공신)으로 내중령(內中令:종1품 재상)을 지냈고,김예겸의 손자 김의진(金義珍)은 고려시대 사학(私學)12공도(公徒)의 하나인 양신공도(良愼公徒)를 육성하였으며,문종 때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 재상반열)로 지공거(知貢擧:과거시험관)를 겸하여 인재 등용에 공헌하였으며, 평장사(平章事:중서문하성의 정2품부총리)를 역임했다.김의진의 증손자 김영고(金永固)는 무신의 난을 일으킨 정중부와 이의방을 제거하려던 인물이며,김영고의 아들 김인경(金仁鏡)은 문무를 겸비한 고려의 명신으로,고종때 조충과 함께 강동성에서 거란군 평정에 공을 세우고, 벼슬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정2품 부총리)에 이르렀으며, 시문(詩文)과 예서(?書)로 명성을 떨쳤다.대안군(大安君)파 파조인 김은열은 공부시랑(工部侍郞:정4품차관)을 거쳐, 대안군(大安君)에 봉군되었으며,그의 후손들이 여러 본관으로 분관되었다.김은열의 8세손 김봉모는 외국어에 능하여, 사신이 오면 관반사(館伴使:외국사신을 맞이하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한 정3품)로 천거되었고,나라의 일에 항상 전례(典禮)의 일을 맡아 보았다.김봉모의 아들 김태서(金台瑞:경주김씨에서 전주김씨로 분파 1세조)는 고종 때 한림학사(翰林學士:고려때 문신 가운데 뽑힌 뛰어난 학자로 한림원 등의 종3품.정4품)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에 이르렀고,특히 그의 아들 김약선은 공부시랑(侍郞:정4품 차관)을 김기손은 평장사(平章事:중서문하성의 정2품),김경손(金慶孫)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왕명을 출납하고 궁중의 숙위를 담당하던 추밀원의 정3품)를 지내 3형제가 유명했다.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판도판서는 호부상서로 고치기 전의 정3품 장관) 파조인 김장유는 고려말에 나라가 혼란해지자, 충청북도 보은에 은둔하여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김장유의 후손에서는 정랑(正郞:정5품)김효정의 아들 김정(金淨:호 충암)이 중종때의 명신으로 유명하다.그는 조광조와 함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실현하기 위해 혁신정치를 시도하다가,기묘사화(己卯士禍:1519년(중종 14)에 남곤.심정 등의 수구파가 조광조.김정 등의 신진 도학자들을 죽이거나 귀양보낸 사화)가 일어나, 서른여섯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그는 기묘명현으로 일컬어졌다.그에 대한 일화가 "당적보(黨籍譜)"에 다음과 같이 전 한다. 충암 김정이 증광문과(增廣文科:나라에 경사가 있을때 기념으로 보이던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정언(正言:사간원의 정6품)을 거쳐 순창군수(郡守:종4품수령)로 나가있을 때 옛 글벗인 승정원 승지(承旨:승정원의 정3품) 이항이 청탁편지를 부쳐왔다.그 편지는 직함을 갖추어 쓰고 도장을찍었으며 우정있는 말은 하나도 없고 마치 높은 자리에서 하명하는 듯 한 말투였다.이에 김정은 거절의 뜻을 밝히고 아래와 같은 시를 써넣었다고 한다."서당에서 같이 배우고 옥당에서 같이 있다가 남녘 시골로 흘러내린 병든 이 한몸이라 천상에서 화려한 직함인 승지 이씨여,편지쓸 즈음에 옛벗을 생각이나 해 봤는가".이 시(詩)에 앙심을 품은 이 항은 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김정의 죄를 추론하는데 앞장섰다 한다.충암 김정은 제주로 귀양 가다가 해남의 바닷가 노송 아래서 회포를 달래며 소나무껍질을 벗기고 적은 시가 전하며 36세로 사약을 받을 때 남긴 절명사(絶命詞)가 유명하다.충암 김정(1486~1520,자는 원충.호는 충암.고봉)은 중종2년(1507)에 문과(文科:대과)에 장원급제하고, 부제학(副提學:홍문관의 정3품),도승지(都承旨:승정원의 정3품 왕의 비서실장)를 거쳐, 성균관대사성(大司成:정3품)과 예문관제학(藝文館 提學:예문관은 칙령과 교명을 기록하던 관청,제학은 종2품)을 지냈다.정암 조광조등과 함께, 미신타파와 향약의 전국 시행을 위해서도 힘썼으나,지치주의를 위한 혁신정치를 시도하다가, 기묘사화로 사사되었다.그를 기리는 사우가 대청댐 주변에 불천위(不遷位: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으신 분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를 말함.부조위)로 모셔져 있다.태사공파의 파조 김인관은 고려 예종때 조산대부(朝散大夫:문산계 종5품관으로 1356년 공민왕때 종4품으로 격상시켜 조선까지4품관)로 위위시경(衛尉寺卿:고려 시대에 의장(儀仗)에 쓰이던 예기(禮器).병기(兵器) 등을 맡아보던 관아의 종3품)을 지내고,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정1품)에 올랐다.김인관의 9세손 김자수(金自粹)는 공민왕때 문과(文科)에 장원급제 하고,벼슬이 형조판서(刑曹判書:정2품법무장관)에 이르렀으나,고려가 망하자 망국의 한을 안고 안동(安東)에 은둔하였다.김자수(金子粹)는 공민왕 말경에과거에 급제, 우왕 초년에 정언(正言:간쟁과 봉박을 담당한 정6품)으로 있다가, 귀양갔으며 공양왕때 다시 형조판서를 지냈고, 이성계의 일파에 맞선 두문동 72현의 한사람으로 유명하다.그는 태조 이성계가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고, 태종때 다시 형조판서로 부르자, 광주(廣州) 추령(秋嶺)에 이르러, 평생 충효의 뜻을 오늘에 누가 알리오(平生忠孝意 今日有 誰知) 라는 절명구를 남기고 자결하였다.황해도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를 지낸 김홍욱의 손자 김흥경은 영조때 상신(相臣:우의정.좌의정.영의정등 정1품 정승)이었고,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은 영조의 부마(駙馬:부마도위의 약자,왕의 사위,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혼인)이면서도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했다.그는 방 두칸 집에 살면서, 비단은 걸쳐본 일도 없고, 가마를 타는 일 없이 청빈하게 살았다고 하며, 후사가 없어 형의 아들인 김이주를 양자로 삼았다.참찬(參贊:의정부의 정2품)을 지낸 김이주의 손자인 추사 김정희는 학문에 있어서 실사구시를 주장하였고, 또한 금석학의 대가로 진흥왕순수비를 발견 해독하였으며, 문.사.철을 섭렵해, "추사체"를 대성시켜 예서와 행서에 새로운 경지를 이룩했다. 추사는 1786년6월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부친 김노경과 모친 기계유씨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일찍이 북학파의 태두 박제가는 추사의 입춘첩(立春帖)을 보고 학예로 대성할것을 예언했다고 한다.추사는 1809년 24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해 부친을 따라 청나라 연경을 수행하고 이듬해 돌아올때 가져온 씨를 고조부묘 앞에 심은 <백송>은 천연기념물 제106호로 지정.관리되고 있으며, 34세에 문과에 급제한후 충청우도 암행어사,성균관 대사성(大司成정3품),병조참판(종2품국방차관)을 지내다가, 1840년 55세에 당쟁에 몰려 9년간 제주도에서 유배 중 1844년 59세에 당시 제자이던 우선(藕船) 이상적에게 그려준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호)는 세계적인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고려 문종과 의종대에 걸쳐 문.무를 겸비한 명신 김부식(金富軾1075~1151)이 유명하다.김부식은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중서문하성의 낭사벼슬,1356년(공민왕5)종3품으로 간쟁을 담당)김근의 셋째 아들로, 그의 4형제 모두가 과거에 급제하여 명성을 떨쳤다.김부식의 호는 뇌천(雷川)이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1130년에는 정당문학(政堂文學:중서문하성의 종2품)을 지내고,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의 재신반열)가 되었으며,1132년에 수사공(守司空:3공의 하나).중서시랑(中書侍郞:정4품차관).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중서시랑평장사로 정2품 부총리)에 이르렀다.그는 서경천도를 주장하며 난을 일으킨 '묘청의 난'때 원수(元帥)로서 군을 지휘하였으며, 그 공으로 "수충정난정국공신"에 책록되고, 문하시중(門下侍中: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한 종1품 정승)에 올랐으며,이어 태자태보(太子太保:3공의 하나로 정1품)에 승진했다. 1138년에는 검교태사(檢校太師:정1품,검교는명예직).집현전대학사.태자태사(太子太師:3공의 하나로 정1품)를 겸직하였다.<고려도경>의 저자 서긍은 그를 고금에 밝고 글을 잘 짓는 박학강식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김부식은 의종이 즉위한 뒤 낙랑군 개국후에 봉해졌으며,1153년에 중서령(中西令:중서문하성의 종1품 재신으로 서무를 총괄하고 간쟁을 담당한 으뜸벼슬,문하시중,상서령도 종1품이지만 중서령은 문하시중을 지낸 사람이 맡는 최고관직임)이 추증되고, 사후 인종묘정에 배향되었다.그는 인종이 즉위하자, 왕실의 외척임을 빙자 권세를 쥐고 군신의 예를 벗어나던 행동을 일삼던, 이자겸의 방자함을 충고하여 이를 시정하였고 42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1145년(인종 23)에는 왕명을 받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정사인"삼국사기 50권"을 완성 송나라에까지 이름을 날렸다.대장군파 파조 김순웅은 고려초에 대장군(大將軍:종3품 무관)을 거쳐, 상장군(上將軍:정3품)을 역임했으며,병판공파 파조 김덕재(金德載)는 김은열의 12세손으로, 조선 창업에 공을세워 보좌공신에 책록되었고,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국방장관)를 지냈다.이밖에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김견명)도 경주김문이 배출한 인물이다.김견명(1206~1289년,호는 무극,승일연)경상북도 경산에서 출생하였으며,호는 목암.무극이고 고려시대의 학자이자 승려다.서기 1227년 승과에 급제하고, 1237년 삼중대사 1259년 대선사.1261년에 선월사의 주지를 지냈다.1268년에는 대장경 낙성회를 조직하여 맹주가 되었으며1277년에는 운문사 주지가 되었고 1283년 국존으로 추대되었다.1284년에는 인각사를 중건하였으며, 궁궐에서 구산문도회를 개최하였다.그가 편찬한 <삼국유사>가 전한다.이외에도 김민찬(金敏讚)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왕명을 출납하고 궁중의 숙위를 맡아보던 중추부의 정3품 당상관)에 올라 유명했는데, 그는 계림군(鷄林君) 김균 후손으로 첨추공파(僉樞公派)의 파조(派祖)이다. 파조 김민찬의 묘는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뜸밭에 있다.파조(派祖) 김민찬의 아들로 조선 영조때 봉산군수(郡守종4품)를 지내고, 동북면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각 도의 병마를 지휘하던 무관의 종2품)에 오른 김경호(묘는 공주시 계룡면 기산리)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정6품 검사)을 지낸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 당하관 품계)김최호(金最豪:묘는 논산시 노성면 구암리 유왕골 비룡산)형제가 가문을 빛냈는데,후손들은 공주시,논산시,청주시,익산시,대전시 등지에 산거하고 있으며,노성면 구암리에서 구장(區長:리장)일을 보며 서당(書堂)을 열고 동리의 훈장선생님으로 유명했던 김학성(金學聖)과 익산출생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김현기(신민당재정위원장),첨추공파보를 편수한 김철식,노성중학교교장,한밭상고교장,대전시교육장과 충남고교장을 역임한 김학종,청주 중앙치과의원원장,공주의 효자로 유명한 탄천면 장선리 장마루 출신의 김상규,향교 궐리사의 전사관를 지낸 김최호 9대종손 한학자 김재규(金宰圭,김창길),대전MBC주부가요열창의 음악담당으로 활동했으며 가수 이동원과 함께 재미동포를 위한 위안공연을 해온 가수 김진권,(주)대우 기조실에서의 근무를 거쳐 산업디자인분야에서 활약중인 김진흥(충식),비룡산 유왕골에서 농업경영인으로 친환경영농(營農)에 열중인 김진민,공주고와 공주사대를 졸업하고 고교교사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김세원 등이 감찰공 김최호의 후손들이다.경주김씨는 한말에도 가통을 이어 고종때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정2품지방장관)를 지낸 김영작의 아들 김홍집은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초대 총리대신을 역임했으며 그는 한 말 외세와 개화의 틈에서 희생당한 인물이다.예조판서(禮曹判書:정2품 장관) 김정집의 아들 김창희는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홍문관과 예문관의 정2품 문형)에 올라 명성을 떨쳤으며,한성부판윤(判尹:정2품서울시장)을 지냈다.중국 원세개(袁世凱:중화민국 초대대통령)의 옥새를 새겼던 김태석,아악부원양성소를 개설한 김영제와 청성곡(淸聲曲)의 명수 김계선 등이 명문의 전통을 이었다.조선시대에 경주김씨는 문과(文科:대과)에 203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277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542명,역과(譯科:중국어.몽고어.여진어.일본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기위해 보던 과거)에 82명,의과에 36명,음양과(陰陽科:천문.지리.명과학에 밝은 사람을 뽑던 과거) 34명,율과(律科: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던 과거)에 6명,주학에 38명 등모두 1,218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인구조사에서 경주김씨는1985년에는 361,189가구 1,523,469명이었고,2000년에는 542,018가구에 1,736,798명이었다.1395년 최초족보 (영분공 후 수은공파)수은공(樹隱公,자는 통경)은 봉익대부(奉翊大夫:고려때 종2품 하(下)의 문산계로 1310년(충선왕 2) 제정되었으며 1356년(공민왕5) 영록대부(榮祿大夫)로 1362년 다시,봉익대부(奉翊大夫)로 고쳤고 1369년 종2품 상(上)으로 함)로 예의판서(禮儀判書:정3품장관)를 지냈으며, 배위는 서흥부부인 김씨이며 아버지는 성균관 사성(종3품)을 지낸 김봉환이다.수은공은 정숙공의 현손(玄孫:고손자)으로 시호는 문민공(文敏公)이다.어려서부터 남다른 재질이 있었으며, 체격이 장대하고 성격이 위엄하고 기상이 의연하였다. 학문에 뜻을 두고 책을 읽을 때 한번 읽으면 바로 그 뜻을 체득하였고,저술에도 능하였다.정포은,이목은,길야은,민농은,이도은과 더불어 도의로 교류하여,세칭 6은(六隱)이라 전하여지고,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임선미(林先味)등 70여인과 송경 만수산에 입산하자 후인이 <두문동 72현>이라 하였다.이태조(李太祖)가 누차 불렀으나,지리산 서쪽으로 피적(被謫)하고 나무로 집을 삼고사니 남원구 송동면 두곡의 이름이 이에 근원하였고,태종원년에 이조판서(정2품장관)와 문민공 칭호를 내렸으나 유훈을 받들어 자손들이 받지 않았다.수은공은 1395년 '경주김씨세계서(慶州金氏世系序)'를 기술하여 <경주김씨의 기원>과 <신라왕조의 약사>, 특히 영분공부터 수은공대에 이르는 계대를 소상히 밝혀, 계대의 혼미함을 막고 아울러 명현조의 행적도 현양하도록 기술하였다. 이 세계서(世系序)는 우리나라 보학발전의 귀중한 사료이다.기타 수은공의 상세한 행적은 수은실기(樹隱實記),이현실기(二賢實記),고려충의열전에 있다.경주김씨(慶州金氏)의 복잡한 분파를 대별(大別)하면 아래와 같다.(1)영분공(대보공 김알지의 29세 김명종 시호 영분)의 분파개황(아래 각파는 영분공 12세손 명암공 김인경의 후손에서 분파된 파명)두계공파(영분공의 16세손 김충유),수은공파(영분공의 16세손 김충한),시어사공파(영분공의 16세손 김충보)참찬공파(영분공의 16세손 김충익),밀직공파(영분공의 16세손 김충원),병판공파(영분공의 16세손 김남보)판삼사공파(영분공의 16세손 김남분),평장사공파(영분공의 16세손 김남길.충주김씨로 분파),두암공파(영분공의 16세손 김남귀),월성부원군파(영분공의 18세손 김천서),강릉공파(영분공의 17세손 김서),참의공파(영분공의 16세손 김생수),부사공파(영분공의 16세손 김상한),현감공파(영분공의 16세손 김정심)(2) 대안군(大安君:대보공 김알지의 29세 김은열 시호 대안군)을 기세(起世)로 한 분파 개황대안군파(김은열을 기세로 한 파),병판공파(대안군 17세손 김덕재),백촌공파(대안군 17세손 김문기) 익화군파(대안군 17세 김인찬)(3) 판도판서공(版圖判書:정3품장관 김장유-대보공 김알지 후)의 분파 개황판군기감사공파(판도판서공 3세손 김을식),감사공파(판도판서공 3세손 김을돈)직장공파(판도판서공 3세손 김을당),공조판서공파(판도판서공 3세손 김을귀)이조판서공파(판도판서공 3세손 김원기)(4) 태사공(太師公:정1품 김인관-대보공 김알지 후)의 분파개황전서공파(태사공 9세손 김자정),상촌공파(태사공 9세손 김자수),우재공파(태사공 10세손 김한)송재공파(태사공 11세손 김수량)(5)장군공(將軍公)-대장군(大將軍:종3품)에 이어 상장군(上將軍:정3품)을 지낸 김순웅-대보공 김알지 후)계림군파(장군공 13세손 김균),정숙공파(장군공 13세손 김 서),현령공파(장군공 13세손 김 능)연동파(장군공 12세손 김 의),봉산파(장군공 13세손 김세보),춘고공파(장군공 14세손 김순) 등이렇게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가문의 성세(盛勢)를 지켜온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훌륭한 인재들을 대거 배출시켜 신라와 근대를 잇는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김씨(金氏) 들의 입김이 닿지 않은 일들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주요세거지와 변천은 <계림군파 갑자보>에 의하면 계림군파의 경우 파조인 좌찬성(左贊成의정부 종1품,시호는 계림군) 김균의 아들 김계성 대(代)부터 경기 고양시 벽제읍에 대대로 세거해왔다.일부가 5세 김홍령 대(代)이후로 수원시 일원으로 옮겨 갔고 일부는 김귀령의 대 이후 평택시에 터를 잡았으며, 김학령의 대를 전후 하여 용인시에 세거했다. 김승련은 연산군조 무오사화때 평남 가산에 세거를 시작하였고 김영수 대 이후는 홍주에 터를 잡았다. 6세 김억수 대(代) 이후 안성시에,김연수의 대 이후로는 서산시 대산면 일원에, 김수정의 대 이후는 청양군에 터를 잡았다.김봉수는 임진왜란당시 충남 해미로 이거하였으며, 7세 김방.김역 형제는 임진왜란시 경북 상주 낙동면과 중동면에 이거하여 세거하였다. 7세 김경원의 대 이후 연기군 전의면 일원, 김후원의 대부터는 충북 진천군 월촌면 일원,김충원 대(代)부터는 과천, 김감의 대부터는 강원 양양군 토성면 일원으로 옮겨갔다. 7세 김구 대(代)부터 공주(公州)에,김철원 대부터 청주에,김인원 대부터 결성에 터를 잡았고,김육원은 병자호란이후 상주로 이거하였는데, 지금의 문경시 삼남면 일원에서 세거하였다. 8세 김의진의 대 이후는 양주군 화도면 일원에 터를 잡았고, 김수성 이후 청원군에, 김수겸 이후 홍천군에 옮겨갔다. 김수준의 대 이후 보령시 웅천면에 이거했으며,임진왜란때 김수안.김수향 형제는 서산시 고북면으로 김기성은 평양으로 옮겨갔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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