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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에 "성리학을 말할 사람은 송익필과 송한필 형제뿐이다"과거시험에 357명 배출한 명가이조판서 송언신이 관찰사로 있을때 처음으로 족보(族譜) 만들어여산송씨(礪山宋氏)는 고려때 판도판서(版圖判書:호부상서로 고치기전 정3품 장관)를 지낸 송자영(宋自英:서산군(瑞山君)에 봉해짐)의 큰 아들 송유익(宋惟翊:여산군礪山君)을 시조로 받든다.시조 송유익(宋惟翊)은 고려때 진사(進士)를 지냈으며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고려때 정3품 문관품계)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정령을 출납하던 추밀원의 정3품)에 추증(追贈:공이 많은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나라에서 그의 관위를 높여 주던 일)되었다.시조 송유익묘는 익산시 여산면 문주동(구봉산下)에 있다.호남고속도로 여산 휴게소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산들이 수려하고 아름다운 자태로 길게 마을을 향해 뻗어내린 산을 볼 수 있다.그곳에 여산송씨(礪山宋氏)의 시조묘(始祖墓)가 있으며 이곳은 호남 8대명당 중 하나라고 부르는 곳이다.태조산인 대둔산에서 내려온 용이 주산인 천호산(天壺山)을 만들고 그 중심맥으로 내려온 용에 자리 하고 있어 대단한 국세(局勢)라고 한다.그러나 여산송씨는 시조 송유익 이후의 세계(世系)를 실전(失傳:고적등이 대대로 전해온 사실을 어떤 이유로 알 수없게 됨),그의 후손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중서문하성의 종2품)을 지낸 송숙문(宋淑文)을 1세조로 받들며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여산송씨는 역사에 이름을 올린 많은 명신(名臣:이름난 신하.훌륭한 신하) 현유(賢儒)를 배출하였는데 고려 충렬왕 때 중찬(中贊:고려시대의 정승으로 1275년(충렬왕 1)첨의부를 설치하면서 기존의 문하시중을 첨의중찬으로 바꾸어 좌.우에 각 1명을 둠,1308년 정승(政丞)으로 고쳤으며 이때부터 조선시대는 의정부의 삼공을 '정승'이라 함)을 지낸 송송례(宋松禮)가 명성을 떨쳤다.정승을 지낸 송송례(宋松禮)의 아들 송염(宋琰)과 송분(宋 , ~1318(충숙왕5)형제대(代)에서 송운(宋 :개성원윤을 지냄) 파조(派租)로 하는 원윤공파(元尹公派),송방영(宋邦英:밀직부사를 역임)을 파조로 하는 밀직공파(密直公派),송원미(宋元美:소윤을 지냄)를 파조로 하는 소윤공파(少尹公派),송린(宋璘:지신사(도승지)를 지냄)을 파조로 하는 지신공파(知申公派), 정가공파(正嘉公派:파조 송서 宋瑞)등 5파로 분파되었다.원윤공파(元尹公派)의 파조 송운,밀직공파(密直公派)의 파조 송방영(宋邦英).소윤공파(少尹公派)의 파조 송원미(宋元美)는 송염(宋琰)의 아들이고, <지신공파>파조 송린(宋璘)과 <정가공파>파조(派祖) 송서(宋瑞)는 송분[宋 , ~1318(충숙왕5)]의 아들이다.여산송씨는 조선시대에 상신(相臣:정1품 영의정.좌의정.우의정) 2명(영의정 1명,좌의정1명)과 왕비1명,그리고 6조 판서(判書:정2품 장관)의 인물을 배출했는데 5파 중에서도 특히 지신공파와 정가공파(正嘉公派)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지신공파에서는 송현수(宋玹壽:단종의장인)를 비롯하여 송세림(宋世琳).송세형(宋世珩) 형제와 송상현(宋象賢).송상인(宋象仁)형제,송성명(宋成明).송진명(宋眞明) 형제 그 밖에 송인명(宋寅明).송문재(宋文載) 등의 명신들이 나왔다.송현수는 단종의 국구(國舅:임금의장인)로서 단종복위운동사건 이후에도 세조의 아낌을 받았으나 금성대군(錦城大君)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다.송현수(宋玹壽: ∼1457.시호 정민.단종의 장인)의 증조는 송희(宋禧), 조부는 송계성(宋繼性),아버지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원의 종2품) 송복원(宋復元), 배위는 여흥부부인 민씨,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아버지다.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대간의 건의로 처벌이 불가피했으나 세조가 두둔하여 무사하였다.1454년(단종 2) 풍저창부사(豊儲倉副使:궁중에서 사용하는 곡물과 자리.종이 등의 출납을 관장하던관청의 5품에서 6품)로 있을때 딸이 단종의 비로 책봉되자, 여량군(礪良君)에 봉해졌고,곧 지돈령부사에 이어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종1품)가 되었다. 이듬해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고 세조가즉위한 뒤 윤대(輪對)때에 상왕의 보필을 당부받기도 하였다. 세조 2년(1456) 성삼문(成三問) 등사육신의 단종 복위사건이 일어나자 대간의 처벌요구가 있었지만, 세조의 두둔으로 처벌을 면하였다. 이듬해 금성대군 유(瑜)와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이 다시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발각되어처형을 당하게 되자, 의금부에서는 그 역시 단종 복위사건에 교통의 혐의가 있다 하여 모역죄로능지처사를 주장하였고 결국 추국을 받게 되었다. 추국의 결과 장(杖) 100에 영원히 원방의 관노에 속하게 하고, 처자 역시 관노비에 충당되었다가 정창손(鄭昌孫) 등의 주장으로 교사(絞死)되고말았다. 그 뒤 아들 송거(宋 )가 과거를 보려 하자, 대간(臺諫:관료를 감찰 탄핵하는 임무를 가진 대관(臺官)과 국왕을 간쟁(諫諍).봉박(封駁)하는 임무를 가진 간관(諫官)을 합쳐 부른 대간과 간관)의 많은 반대가있었으나, 성종이 특별히 허락하였고, 송거(宋 )는 무과에 급제하여 영등포 만호(萬戶:종4품)등을지냈으며,송거의 아들은 부사(府使:정3품수령)에 오른 송숙근이다.송거의 묘는 시흥시 신동면 우면리에 있다.아울러 조카인 송영(宋瑛)도 대간에 임명되는 등 그 일문에 대한 서용의 기회가 부여되었다. 숙종때 영돈령부사에 추증되고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정조때 정민(正愍)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편집자주>송세림은 문장.서화에 뛰어났고 송세형은 명종때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오르고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을 지내고 호조판서(戶曹判書:정2품장관).이조판서(吏曹判書:이조는 문관의 선임과 훈봉,관원의 성적 고사와 포폄(褒貶:칭찬함과 나무람.시비선악을 평정함)에 관한 일을 맡아봄.정2품 장관)를 역임하였다.송상현은 임진왜란때의 절신(節臣)으로 유명하고 송상인은 인조 때 암행어사(暗行御史:왕명으로 특별한 임무를 띠고 지방으로 나가던 임시직 관리.어사또)를 거쳐 부사(府使:정3품)를 역임하고 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등을 지냈다.송성명은 예조판서(禮曹判書:예조는 6조의 하나로 예악(禮樂).제사.연향.조빙(朝聘).학교.과거 등에 관한일을 맡았음,정2품 장관).이조판서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문명(文名:글을 잘한다는 명성)이 높았다.송진명은 호조.이조.예조판서(判書:정2품 장관)등을 지내고 청렴하기로 유명하였으며 송인명은 좌의정(左議政:의정부 정1품 정승)에 이르렀으며 당쟁의 타파에 공이 컸다.송문재는 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대사헌(大司憲:사헌부 종2품 검찰총장).호조참판(戶曹判書:종2품 차관)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정가공파(正嘉公派)에서는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오른 송질(宋帙)과 중종의 부마(駙馬사위.부마도위의 약자)인 송인(宋寅),송문림(宋文琳).송언신(宋言愼)등이 가문을 빛냈다.정가공 송서(宋瑞:1278~1353(충렬왕~공민왕)는 정가공파의 파조로 시호는 정가(正嘉)이고,시조 송유익(惟翊)의 6세손이다. 중찬(中贊:종1품 정승)으로 치사(致仕벼슬을 스스로 사양함)한 송송례(松禮)의 손자이고,아버지는 추성보리찬화안사공신(推誠輔理贊化安社功臣)에 책록되어,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고려 충렬왕 때의 최고 통치기관)의 중찬(中贊종1품정승)에 이르러,낙랑부원군(樂浪府院君)에 봉군된 송분(宋 , ~1318)이며,어머니는 중화김씨(中和金氏)로 호부상서(戶部尙書:정3품장관)를 지낸 김기석(金祇錫)의 딸이다.1349년(충정왕1) 감찰대부(監察大夫:감찰사(監察司)의 으뜸 정3품 대간(臺諫)벼슬)가 되고,1352년(공민왕1)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종1품 재상).판전리사(判典理事:1275년 원(元)나라의 간섭으로 행정기구를 축소 개편할때, 문관의 선임.공훈(功勳).봉작(封爵) 등을 맡았던 이부(吏部)와 의례.외교.교육 등을 맡았던 예부(禮部)를 통합 설치한 전리사의 으뜸 벼슬)가 되었으며,뒤에 순성보리익찬공신(純誠輔理翊贊功臣匡)에 책록되고 광정대부(匡靖大夫:종2품 품계),벽상삼한삼중대광(璧上三韓三重大匡:정1품 품계)으로 도첨의우정승(都僉議右政丞:종1품 정승)에 올라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식읍(食邑:고을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하는것) 1천호와 식실봉(食實封) 3백호가 내렸다.송서는 입조(立朝)에 근엄하며 탁연(卓然)한 공훈을 세웠으나 쟁명공탈(爭名功奪)의 무리와는 판이하여 왕실부익(王室扶翼)에만 갈충진성(碣忠盡誠)하여 국가존망과 생을 함께 하다가 1353년(공민왕 2) 76세로 경저(京邸)에서 사망하자 정가(正嘉)의 시호가 내렸다.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선영의 동강(東崗)에 있어 38선 이북에 위치하여,후손들이 송서의 아들 판사공(判事公) 송인번(宋仁蕃)과 손자 목사공(牧使公) 송전(宋琠)의 묘소가 있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 화악리에 설단하여 제사 지내고 있다.배위 군부인(郡夫人:태조 5년(1396) 5월, 문무 정1품.종1품의 처에게 준 작호) 안주강씨(安州康氏)는 봉훈대부(奉訓大夫)로 감문위상호군(監門衛上護軍:정3품)을 지낸 강적순(迪順)의 딸이며,장남은 봉익대부(奉翊大夫:종2품 문관 하(下)의 품계)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왕이 타는 말(마필),궁중의 가마 등을 관장한 관청의 벼슬)를 지낸 송인번(宋仁蕃),차남은 증이조판서(贈吏曺判書정2품 장관) 송윤번(宋允蕃), 3남은 전서(典書:정3품 장관)를 지낸 송의번(義蕃)등 3남 2녀를 두었다.송질은 중종반정(中宗反正)때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고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올라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손자 송인은 중종의 부마(駙馬:왕의 사위)로 도총관(都摠管:오위도총부 최고관직으로 군무를 총괄하였으며 대개 종실에서 겸하는 경우가 많은 정2품)을 지냈으며 시문(詩文)과 서예에 능하였다.송문림은 성종때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오르고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 장관)를 지냈으며 송언신은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 국방장관)와 이조판서 등을 지냈는데, 광해군1년 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로 있을 때 처음으로 족보(族譜)를 만들었다고 한다.정가공파의 근.현대 인물로는 내각수반을 지낸 송요찬장군이 유명하다.한때 미국의 정보기관은 송요찬장군이 미국병원에 입원 중일때 송장군에게 접근 한국의 주요정보를 캐려했으나 송요찬 장군은 "나를 죽이고 정보를 캐가라"며 단호히 거절하고 그들을 혼쭐낸것으로 유명하다.원윤공파에서는 개성원윤 송운의 6세손 송간(宋侃)이 형조참판(刑曹參判:종2품 법무차관)을 지냈으며, 후에 계유정난(癸酉靖難:1453년(단종 원년)수양대군이 김종서.황보인등 여러 고명 대신을 없애고 정권을 잡은 사건)으로 단종이 물러나자,고향인 여산에서 두문불출하였다.단종이 시해되자 그는 산 속으로 들어가 은거하였으며, 김시습.조상치.조여.정지산.이성희.이축. 엄흥도와 더불어 8절(八節)로 숭상받았으며 계룡산 동학사의 초혼각과 운곡서원, 숙모전, 세충사 등에 제향되었다. 그의 6세손 송건(宋建)은 임진왜란때 공을 세우고 성주 판관이 되었으며 뒤에 함창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절했다.원윤공파(元尹公派:고려때 종친(宗親)에게 주던 정2품 작호)에서는 송익필(宋翼弼)이라는 거유(巨儒)를 배출했다.송익필은 선조때의 대학자로서 당대 <8문장(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서출(庶出)이라는 이유로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였다.조선 중기 성리학자이며 8문장가 중 한사람이었던 구봉(龜峯)송익필,송익필에 대해 일찌기 율곡 이이는 "성리학을 말할 만한 사람은 송익필과 송한필 형제뿐이다"고 극찬하였다.송익필(호는 구봉)은 후진 양성에 진력하여,문하(門下)에 사계 김장생,김장생의 아들 신독재 김집.정엽(鄭曄).서성.정홍명.김반(金槃)등의 학자를 배출하였고,특히 사계 김장생의 예학에 학통을 잇게 하여,조선시대 예학의 종주(宗主)를 이뤘다.여산송씨의 5파중에서 원윤공파는 전라도 고흥(高興),밀직공파는 경상도영덕(盈德),소윤공파는 전북 부안(扶安).익산(益山),지신공파는 부안,정가공파는 경기도에 집성촌이 있으며,2000년 인구조사에서 여산송씨는 총7만 2763가구에 232,753명으로 송씨의 37%를 차지했다.한편 여산송씨족보(礪山宋氏族譜)는 1606년(선조 39)에 송언신(宋言愼)이 편찬하여, 1610년(광해군 2) 송일(宋馹)이 청주에서 1책으로 간행하였고, 서기 1653년(효종 4)에 송희업(宋熙業)이 보완하여 상.하 2책 226장으로 편찬 간행한 것으로, 1991년 4월 경기유형문화재 제139호로 지정되었다.여산송씨 족보는 본편 외에 추록(追錄) 2권이 있으며,시조 송유익(宋惟翊) 이하 19대까지 기록되어 있다. 적서(嫡庶)는 구분하였지만 남녀를 구별하지 않았고,출생순서에 따라 기록하였는데, 이는 17세기 중엽까지도 '장자상속제도'가 정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문서이다.또한 딸의 후손도 4대까지 기록하였으며 이는 18세기 이후의 족보와 비교할 때 당시 남녀차별이 덜하였음을 알게 해준다. 양자 입양 사실에 관해서 이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다가 14대 이후부터 기록되어있다. 이로써 17세기 이후에야 양자제도가 생겨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당시 여산송씨 문중의 가족제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이 족보는, 한 면을 세로로 6칸으로 나누어 기록하였으며,현재 남아 있는 족보 가운데 17세기 이전의 것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희귀본으로서 귀중한 자료이다.여산송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문관을 뽑아 쓰던 과거로 시험은 3년마다 실시되었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로 나뉘었음.대과)에 74명,무과(武科)에 51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229명,음양과(陰陽科:천문.지리.명과학(命課學)에 밝은 사람을 뽑던 과거)에 1명,율과(律科: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던 잡과의 한 가지)에 2명 등 모두 357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인구조사에 의하면 여산송씨는1985년에는 총 48,212가구에 200,334명이었으며2000년에는 총 72,763가구에 232,753명이었다.한편 2004년 대전 보문산기슭 중구 목달동에서는 조선초기 사대부 무덤이 발견되었다.여산송씨 분묘인 이곳에서 여산송씨 11세손인 어모장군(禦侮將軍:정3품 당하관)을 지낸 송효상( ~1490년경)의 무덤을 비롯 증손자 형제들의 미이라가 출토되었다.이들 무덤에서는 미이라와 함께 복식유물이 출토되었는데 15세기에서 17세기 초반의 복식으로 여말선초의 복식 특성과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한 복식 특성을 같이 고찰할수있어 학계에 큰 관심을 끌었다.출토 미이라 중 송희종은 송효상의 증손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 당하관)로 군자감 판사(軍資監判事:군자감은 조선때 군수품 출납을 맡아본 관청으로 군량미는 녹미를 포함 보통 30만석을 저장함,정은 정3품)를 지냈고,같이 발견된 순흥안씨는 송희종의 부인이다.또 충주박씨는 송희종의 형인 송희최의 부인이다.송희최는 선무랑(宣務郞:선무랑은 종6품 문관 하계(下階)의 품계)으로수군자감주부(守 軍資監 主簿:조선때 종6품 낭관 벼슬이며,수는 계비직고(階卑職高)라 하여 관직의 수급균형을 맞추기 위해 도입한 '행수법'으로 품계는 낮은데 관직은 높은 직을 맡았다는 뜻)를 지냈다.2009년 12월부터 대전광역시 선사박물관(유성구 노은동)에서 전시되었던 출토복식은 대전지역에서 생활했던 기호학파 선비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전문가들은 출토복식의 직물을 보면 견직물보다는 면직물이 많다며 이는 임진왜란이후 어려워진 경제사정과 그로 인해 면직물생산이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여산송씨 현대인물>송영길(宋永吉,사법고시합격.변호사.63년 전남 고흥출생.연대총학생회장.2010년 자랑스런 연세 상경인상.국회의원.민주당 최고위원.제5대 인천광역시장.아버지 사무관 송병수.어머니 광산김씨.선대묘역은 전남 고흥군 대서면 안남리),송주현(1949년 고흥출생.유미특허법인 대표변리사.중앙대행정대학원행정학석사.녹조근정훈장.대통령표창.특허청 발명정책국 국장.특허청특허심판원원장),송후근(한국표준연구원근무).송봉근(한국화학연구원공학박사.센터장.정가공파),송현숙(宋鉉淑,남을 위한 자선사업이나 사회사업에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왔으며,특히 다년간 독거노인과 불우학생을 돌봐온 숨은 독지가(篤志家).정가공파,경기안성시옥산동출생,아버지송기태.어머니이천서씨) 등등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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