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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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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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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여 호당(湖堂)의 효시 신석조신응시(辛應時)는 당대의 천재로 오히려 과거에 낙방시켜신씨(辛氏)의 본관은 본래 영산(靈山).영월(寧越)의 2관이며 영산.영월이 같은 연원의 분파로서 영산신씨가 큰 집이다.시조(始祖)는 고려 고종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부총리)를 지낸 신경(辛鏡)이며 그의 선대는 중국사람으로 당나라 현종(신라는 경덕왕)때 "파락사"로 신라에 들어와 귀화하였는데 그뒤 신경(辛鏡)이 고려때 중국 8학사의 한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신씨(辛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2세 신운민(辛雲敏),3세 신영계(辛永繼)는 독자였고,4세 태사공(太師公)신몽삼(辛夢森)의 네아들 중 장남 문종공(文宗公)신각계(辛覺繼)와 4남 상장군공(上將軍公)신주계(辛周繼)는 당대의 명문가로 각각 일가(一家)를 이루었다.문종공 신각계의 후손은 9세에 이르러 덕재공(德齋公) 신천(辛 ),초당공(草堂公) 신혁(辛革),부원군(府院君) 신온(辛蘊),판서공(判書公) 신한(辛韓)의 4형제가 모두 각 파(派)의 시조가 되었고, 상장군공 신주계는 5세에서 이미 분파(分派)되어 대를 이어 내려왔으니 9세때 계파로 나뉘어져 현재에 이른다.고려 중기 이후 중앙정부 고관들의 출신지와 연계하거나 관작에 따른 본관제도가 확산됨에 따라 신씨도 9세에 와서 본관(本貫)을 가지게 되었는데 덕재공파,초당공파,상장군공파는 영산(靈山)을 본관으로 삼고,부원군파,판서공파는 영월(寧越)을 본관으로 삼았다. 따라서 영산.영월 신씨는 모두 시조 신경의 후손들이다.신씨(辛氏)의 세계(世系)는 시조 신경의 후손에서 상장군파(上將軍派).덕재공파(德齋公派).초당공파(草堂公派).판서공파(判書公派).부원군파(府院君派)의 5파로 갈리는데 상장군파,덕재공파,초당공파 등 3파는 [영산신씨]이며,판서공파,부원군파는 [영월신씨]이다.한편 영산신씨와 영월신씨는 비문발견을 계기로 양관이 통합하여 [영주신씨]로 다시 환원할 계획이라고 한다.영산신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문관을 뽑아쓰기위한 과거로 대과)에 29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이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였음)에 27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67명,의과에 1명,음양과(陰陽科:천문.지리.명과학에 밝은 사람을 뽑던 과거)에 1명 등 125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영산.영월신씨는 1985년도 조사에서는 인구수 총 13만 7839명,전국 가구 구성비 0.3%로 당시 274성씨중 제47위였으며,2000년에는 영산신씨는 83,798명,영월신씨는 67,489명이었다.영산(靈山)은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일대의 옛 지명으로,757년(신라 경덕왕16)에 상약(尙藥)으로 바뀌어 밀성군(密城郡:밀양)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태조23)에 영산현으로 개칭하고,밀성군으로 병합하였다가,1274년(원종15)에 감무(監務:작은 현에 중앙에서 파견한 감독관)를 두면서 독립하였다.1394년(태조3)에는 계성현(桂城縣)을 병합하였으며 취산(鷲山).취성(鷲城)등의 별호가 있었다.1896년(고종33) 경상남도 영산군이 되었다가,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영산군이 폐지되고 일부 면은 함안군에 편입되었고, 읍내면이 영산면으로 개칭되어 나머지 6개면과 함께 창녕군에 통합되었다. 월성,경주,함평,홍주 등 4본관에 인구는 경주석씨가 2,433가구에 7,996명,홍주석씨는 1명,함평석씨는 4명으로 2000년 조사에서 총 9,544명이었다.석씨(昔氏)의 시조는 신라 제4대왕 탈해이사금(재위:57~80년)이다.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는 탈해왕(脫解王)의 탄생에 대한 신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왜국(倭國)의 동북쪽 천리에 있는(중국 흑룡강성 하구로 고증됨) 다파나국(多婆那國:일명 용성국 龍城國)의 왕이 여왕국(女王國)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는데 오래도록 아들이 없어 기도하여 아들을 구했더니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왕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버림이 좋겠다"고 하여,비단으로 알을 싸고 보물과 함께 궤속에 넣어서 바다에 띄워 두었다. 궤짝을 실은 배는 처음에 금관국(金官國)해변에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보고 괴이하게 여겨서 거두지 않자 배는 계림(鷄林)의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아진포 포구)에 닿았는데 이때가 기원전19년(신라 박혁거세 39년)이었다.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가 이를 보고 새끼줄로 배를 매어 해안으로 끌어 올린 후 궤를 열어보니 용모가 단정한 사내아이가 있어, 데려다 길렀는데 키가 9자나 되고 풍모가 준수하여 지혜가 뛰어났다.그러나 아이의 성씨(姓氏)를 알지 못하여, 처음 배가 올때 까치가 울면서 따라 왔으므로, 까치작(鵲)자에서 새조(鳥)를 떼어 버리고,석(昔)을 성(姓)으로 삼고,포장된 궤속에서 나왔다고 하여 탈해(脫解)라는 이름을 지었다.제3대 유리왕이 33년간의 재위 끝에 죽자, 남해왕의 유언과 유리왕의 뜻에 따라 서기 57년 신라 제4대 왕으로 석탈해가 왕좌에 등극하니 이는 바로 경주석씨의 시조이다.그로부터 석씨(昔氏)는 신라 56대왕 중 4대 탈해왕을 비롯하여 8.9대 벌휴왕(伐休王),10대 내해왕(奈解王),11대 조분왕(助賁王),12대 첨해왕(沾解王),14대 유례왕(儒禮王),15대 기림왕 (基臨王), 16대 흘해왕(訖解王)까지 8왕에 걸쳐 173년간 왕통(王統)을 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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