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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조에 정승17명 과거급제자 723명 배출정난종(鄭蘭宗)에 이르러 명문의 반석을 더욱 굳혀조선의 얼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운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동래정씨(東萊鄭氏)는 신라가 건국되기전인 사로(斯盧:서라벌)의 6촌(六村) 가운데 하나인 취산진지촌장(嘴山珍支村長:본피부로 개편됨)지백호(智伯虎)의 원손으로 전하는 안일호장(安逸戶長:고을 아전의 맨 윗자리)을 지낸 정회문(鄭繪文公)을 시조로 받든다.그는 동국정씨(東國鄭氏) 34세로 신라 경애왕(景哀王) 때 병부상서(兵部尙書:정3품국방장관)를 지낸 정완(鄭玩)의 아들로 동래(東萊)를 관(貫)으로 하였다.고사촬요(古史撮要)에 의하면 서기 927년(경애왕) 견훤의 난을 피해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 나갔던 정회문은 931년에 신라로 돌아온 후 동래호장(東萊戶長)에 올라 오랜 기간 선정(善政)을 베풀어 안일호장(安逸戶長)의 칭(稱)함을 받았다"라고 기록되어있다.고려사(高麗史) 향직고(鄕職考)에 의하면 983년(고려 성종)에 여러 대에 걸쳐 훌륭한 가풍(家風)을 지닌 가문의 자손에게는 처음에 병사(兵史)나 창사 (倉史)로 임명하고 호장에 이르게 하여 그 고을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였다. 호장은 향직(鄕職)의 가장 윗자리로서 지방의 영주(領主)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998년에 여러 고을을 다스리는 호장의 나이가 70이 넘으면 그 간의 공을 기리어 특별히 <안일호장>이라 칭하게 하였는데 당시의 향직에 대한 기록에 호장은 저적(著籍)이 오래되고 가풍(家風)이 뿌리 깊은 집안의 인물로 삼았다고 한다.정씨성(姓)의 유래에 대해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동경지(東京誌)에는 우리나라 정씨의 시조로 추앙받는 지백호(智伯虎)가 기원전 117년(한무제 漢武帝 갑자 甲子)에 경주 화산(花山)에 강림(降臨)하여 부족국가이던 사로(斯盧)의 여섯 고을 중 취산진지촌(珍支村)을 다스리면서 신라건국의 모체(母體)를 이루는데 공헌하여 좌명공신(佐命公臣),낙랑후(樂浪侯)에 책봉(冊封)되었고, 516년(법흥왕3)에는 문화(文和)라는 시호(諡號)에 추증되었으며,656년(태종무열왕 3)에는 감문왕(甘文王)에 추봉(追封)되었다.그러나 세계(世系)를 밝힐 문헌을 잃게되어 오랜동안에 걸쳐 정착 세거해온 거칠소부(居漆少部:부산 동래)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일화 중에 정문도(鄭文道)가 고려에서 안일호장(安逸戶長:고을 아전의 맨 윗자리)을 지내고 죽자부산 화지산(華池山)에 설단(設壇)하고 추원사(追遠祠)에 모시어 봉사(奉祀)하고 있다. 이곳은 전국 8대 명당 중 한곳으로 2세조 안일호장 정문도(鄭文道) 묘소가 있으며 묘소 앞 천연기념물(제168호)인 배롱나무 두 그루는 천년의 세월을 상징하고 있다.부산 화지산(華池山)에 있는 그의 묘에 얽힌 전설이 지금도 전해진다. 그가 죽어 아들이 지금의 묘터에 아버지의 시신을 묻고 돌아오자 그날 밤 도깨비들이 나타나 "대인(大人)이 들어올 자리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며 묘를 파헤쳐 버려 이튿날 이를 본 아들이 영문도 모른 체 아버지의 시신을 다시 모셨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이렇게 묻고 파헤치는 실랑이가 몇 차례 계속되던 끝에 이를 이상히 여긴 아들이 해박한 마을 노인을 찾아가 기묘한 사실을 얘기하자 노인은 그 자리는 임금이나 정승이 묻힐 자리이기 때문이라며 금으로 관을 만들어 묻으면 되나 그럴 수는 없으니,관을 보릿짚으로 싸서 묻으면 도깨비들이 속아 넘어갈 것이라고 일러주었다.노인이 시키는 대로 하고 몰래 숨어서 봤더니 도깨비들이 그날 밤 다시 나타나서 "과연 주인이 들어왔구나."라고 하며 되돌아갔다는 이야기다.그래서인지 그 후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정문도(鄭文道)이후 10대(代)에 걸쳐 4백여년의 세월동안 가문의 번영을 누려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일컬어졌다.정 목(鄭穆)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상서도성에 속하였던 정2품)를 지냈고 정목(鄭穆)의 아들 4형제중 셋째 정 택(鄭澤)이 찬성사(贊成事:첨의부,도첨의사사,도첨의부,문하부의 정2품)를 역임하였으며,고려 예종때 학자이자 문인(文人)이었던 정항(鄭沆)은 정목(鄭穆)의 막내아들로 고려 숙종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우정언(右正言:고려와 조선초에 간쟁과 봉박을 담당한 관청 6품)을 거쳐,지주사(知奏事:중추원의 정3품 도승지)를 역임한 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정령을 출납하고 궁중을 숙위하던 추밀원 종2품)와 예부상서(禮部尙書:정3품 장관)에 올랐다.정항(鄭沆)의 아들이며 "정과정곡(鄭瓜亭曲)"의 저자로 유명한 정서(鄭敍)는 인종의 동서(同壻:인종비 공예태후가 처형이 됨)로서 벼슬이 내시낭중(內侍?中:정5품)이었고 문장(文章)과 묵죽화(墨竹畵)에 능하여 인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의종(毅宗)때 폐신들의 참소로 고향인 동래(東萊)로 장류(杖流:죄인에게 장형을 가한뒤 유배보내던 형벌)되었다.동래정씨(東萊鄭氏)는 1세조 정지원(鄭之遠)의 6세손대에서 교서랑 보파(校書郞輔派)와 첨사공 필파(詹事公弼派)로 대별(大別)되며,이들의 후세로 내려오면서 여러 파(派)로 분파(分派)되는데 첨사공파(詹事公派) 중에서도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와 대호군파(大護軍派)가 주축(主軸)을 이루고 있다.동래정씨(東萊鄭氏)는 조선시대에 상신(相臣:정1품 우의정.좌의정.영의정 등 정승) 17명을 배출하여 전주이씨,청송심씨,청풍김씨와함께 최다 정승 배출 성씨로 명성을 떨쳤다.이는 왕족인 전주이씨,청송심씨 청풍김씨 문중과 더불어 "정승배출 4대 가문"에 해당한다.아울러 최고의 영예로 평가되는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을 2명 배출하였고,가문의 영광이라는 호당(湖堂:재덕을 갖춘 유망한 젊은 문신을 뽑아 사가독서하여 오로지 공부만 하게 하던곳,독서당)에 뽑혀 사가독서한 인물이 6명이었으며,공신 4명,판서(判書:정2품 장관)20여명과 문과(文科대과)급제자 1백98명을 배출한 명문거족이다.동래정씨(東萊鄭氏)는 14세손 정난종(鄭蘭宗)에 이르러 명문의 반석을 더욱 굳히게 된다.성리학자인 그는 판서(判書:정2품 장관)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의정부의 정2품)에 이르고 <세조실록>과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성종14년에는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외교가로도 수완을 발휘하였으며 서예에도 뛰어나<원각사비> 글씨가 그의 솜씨이다.정난종의 네 아들 중 정광필(鄭光弼)은 중종때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오르고 당시에 어진 정승(政丞)으로 추앙된 인물이다.그의 손자 정유길은 대제학(大提學:정2품의 홍문관 예문관 문형으로 대제학은 학문과 도덕이 뛰어난 석학과 현유만이 오를 수있고 명예는 정승보다 높이 평가했음)을 지내 명성을 떨쳤으며,좌의정(左議政:정1품 정승)에 이르렀다.동래정씨는 특히 정유길의 자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일제침략의 난세 속에서 5천년간 이어온 조선의 얼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운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그는 정씨 가문에 또 하나의 산맥을 이룬다.유학자이자 사학자(史學者)인정인보는 해방이전에는 연희전문(연세대),이화여전(이화여대) 등에서 국문학을 강의했고,시대일보,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국학 발굴에 힘썼다. 그는 1892년에 출생한 서울토박이로 한때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을 왕래하며 상해에서 항일독립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조직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해방후 초대 감찰 위원장을 지냈으며 저술활동에도 힘을 써 <조선사연구>,<양명학연표> 등의 저술을 남겼다.동래정씨는 후손이 번성하면서 교서랑공(校書郞公) 보파(輔派)에서는 전서공(典書公) 규파(規派).설학재공(雪壑齋公) 구파(矩派).문경공(文景公) 흠지파(欽之派).참의공(參議公) 절파(節派).평리공(評理公)리파.참판공(參判公)개보파(介保派)가 있으며,천사공(詹事公)필파(弼派)에서는호궁공(護軍公) 회종파(會宗派).윤창파(允昌派).수찬공(修撰公) 옹파(雍派).직제학공(直提學公)사파(賜派).참봉공 급파(伋派).대호군공(大護軍公) 인파(絪派) 등이 있다.동래정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196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로 3년마다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에 30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483명,역과(譯科:중국어.몽고어.일본어.여진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아쓰기 위하여 보이던 과거)에 4명,의과에 1명,음양과(陰陽科:천문.지리.명과학(命課學)에 밝은 사람을 뽑기위해 보던 과거)에 3명,율과(律科: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던 잡과의 한가지)에 6명 등 723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인구조사에서 2000년에는 137,524가구에 442,363명이었다.동래(東萊)는 부산과 양산의 일부 지역을 차지했던 옛 행정구역으로, 757년(경덕왕16)에 동래군(東萊郡)으로 고쳐 동평(東平)과 기장(機張)은 동래의 영현으로 삼았고 동래는 양주(良州:양산)의 관할로 개편하였다. 1895년(고종32) 경상남도 동래부가 되었으며,1950년부터 3년간 임시 수도이기도 하였다가, 1963년 직할시로 승격하였다. 1973년에는 동래군이 양산군으로 폐합되었으며 1994년 부산광역시로 개편되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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