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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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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광조가 왕이 될 것(走肖爲王),왕부터 교육 받아야사림파 도통(道統)의 정맥(正脈) 이어준 인물로 정파 초월 추앙목숨 걸고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한 경의한양조씨(漢陽趙氏) 시조 조지수(趙之壽)는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왔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며,고려 중엽에 조순대부(朝順大夫)로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첨의부는 백관의 서무를 총괄하였던 최고 행정관청인데, 1275년(충렬왕 1)에 원나라의 간섭으로 관제를 격하시켜,종전의 중앙관서였던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병합하여 첨의부라 함)를 지냈으며, 덕원부 용진현(德源府龍津縣)에서 살았다.그의 후손들이 조선개국 때 한성(서울)으로 옮겨 가세가 크게 번영, 명신현유(名臣賢儒)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므로 본관을 한양으로 하고 있다. 시조 조지수(趙之壽)는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첫째는 판도판서(版圖判書:정3품장관,조선때는 정2품호조판서) 조인재(趙麟才),둘째는 조휘(趙暉)로,1258년(고종45) 원(몽고)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원나라가 영흥에 둔 통치기구로 100년간 존속함)쌍성총관부는 동녕부와 함께 고려인의 배반으로 원나라에 귀속된 영토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통치 기간이 100여 년간 유지되었다.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자주권 회복 및 영토 회복을 위한 북벌 정책의 핵심으로,이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격파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음)의 초대 쌍성총관(雙城摠管고려말에 몽고(蒙古:원)가 외지 통치지역에 설치하였던 우두머리 관직)이 되었는데,이후 쌍성총관을 4대 99년간 대물림을 했다고 한다.조휘의 아들 조양기(趙良琪)는 13세의 나이때인 서기1281년(충렬왕7) 제2대 총관이 되었으며,려원연합군의 부원수(副元帥)로 일본정벌에 출정하여 공을 세우고, 21세때 합단의 침입을 대파한 공으로,원나라 세조로부터 받은 금포옥대(錦袍玉帶)가 지금까지 전하는데,금포는 낡아 없어졌고 옥대만 전해오다가,1864년(고종2) 흥성대원군 이하응이 빌려서 애완하고 보수하였다고 한다.한양조씨는 조지수(趙之壽)의 후손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호부상서로 고치기전의 판도사 정3품장관,조선때는 호조판서)를 지낸 조인재(趙麟才) 계통과,총관(摠管:오위도총부의 정2품 도총관과 종2품 부총관의 총칭,또는 충렬왕때 원나라가 임명한 동녕부의 총관)을 지낸 조휘(趙暉)계통으로 대별되어, 서로 계대를 다르게 하며,보첩도 따로 만들고 있다.한양조씨는 조양기의 아들 조돈(趙暾,1308~1389)에 이르러 고려에 완전히 귀화하였다고 한다.조돈은 1356년(공민왕5)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수복작전때, 여진지역으로 도망간 160여호의 백성들을 데려와 쌍성수복에 큰 공을 세워, 예빈시경(禮賓寺卿:예빈시는 빈객의 연향과 재신의 음식 공궤를 관장한 관청,경은 벼슬)이 되고,이듬해 평양에 침입한 홍건적을 대파한 후,1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벼슬이 판사농시사(判司農寺事:사농시의 정3품).밀직부사(密直副使:밀직사는 정령의 출납과 숙위와 군기에 관한 일을 맡아봄 정3품)를 지냈으며,공부상서(尙書:정3품 장관)와 예의판서(禮儀判書:예의사의 정3품)를 역임하고,판도판서(版圖判書:판도사의 정3품장관으로 조선때는 정2품호조판서)에 이르러,1375년(우왕1)에 삼중대광(三重大匡:고려때 정1품 문관 품계)으로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에 봉해졌다.조돈(趙暾)은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모두 벼슬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그 중 맏아들 조인벽(趙仁壁)은 동북면원수(東北面元帥)로 왜구를 토벌하였고,정화공주와 결혼하여 이성계의 매부가 되었으며,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에 봉해졌다.또한 판도판서(版圖判書:호부상서로 고치기전의 판도사 정3품 장관) 조인재(趙麟才)의 증손이자 판서(判書:정2품 장관) 조세진(趙世珍)의 아들인 조영무(趙英茂)는 조선조에 개국3등공신(開國三等功臣)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정2품 품계)에 올라 한산군에 봉해졌으며,1405년(태종 5) 우의정(右議政:의정부 정1품 정승)에 오르고 이듬해 판이병조사(判吏兵曹事)를 겸임한 후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진봉(進封)되어 태종의 극진한 총애를받았다.계유년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협력한 충무공 조영무의 손자 조완규(趙完珪) 및 한 집안에서 여섯 명과 충정공의 손자 조순생(趙順生)과 그 아들, 손자들은 세조에게 화를 당하고 충절을 세웠다.조선시대에 한양조씨(漢陽趙氏) 가문을 더욱 빛낸 사림파의 영수 조광조(趙光祖)는 개국공신 조 온(趙溫)의 현손(玄孫:손자의 손자)으로 14세 때 어천도 찰방(察訪:역의 말에 관계되는 일을 맡아본 종6품)으로 부임하는 아버지 조원강(趙元綱)을 따라가 희천에 유배중이던 김굉필에게 글을 배웠다. 그는 성리학 연구에 힘썼으며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역설했다.중종때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에 있으면서 신진사류인 30대의 소장학자들을 요직에 안배하는 한편 훈구파를 외직으로 몰아내는 등 과격한 개혁을 단행하여 마침내 훈구파의 반발을 야기시켰으며,남 곤.심 정 등이 주동한 <기묘사화>에 피화되어,전라도 화순의 능주(綾州)에 유배되어 죽음을 당했다. 율곡 이 이는 김굉필.조광조.정여창.이언적을 가리켜 <동방사현 東方四賢>이라 칭송하며 평생토록 숭배하였다 한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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