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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의 1인자 영의정 박원형은 춘추시대에 났더라도'숙향과 자언(子彦)의 밑에는 있지 않을 것'극찬우리 집 가보(家寶)는 청백철성백파에서 음성박씨,고성박씨 분파죽산박씨(竹山朴氏)는 신라 경명왕의 넷째 아들인 죽성대군 박언립의 아들 박기오(朴奇悟)를 중시조로 받든다.중시조 박기오는 고려초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록되어 태보(太保:태사,태부,태보를 삼사(三師)라 하는데 모두 정1품)에 이르렀다.이어 삼중대광(三重大匡:고려때 정1품 문관 품계)에 올라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그후 죽산백(竹山伯)에 봉해져 죽주(죽산의 옛 지명)를 식읍(食邑:고을의 조세를 받아쓰게 하는것)으로 하사받았다.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은 서기 936년(태조19)에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서기 940년에 통일에 공이 큰 사람에게 상을 내리면서 제정되었다.940년 신흥사를 중수할 때 이곳에 공신당을 세우고 동.서벽에 삼한공신의 모습을 그렸는데,이 벽에 그려진 공신을 삼한벽상공신이라 한다.죽산박씨족보(竹山朴氏族譜)에 따르면 죽성대군(竹城大君) 박언립(朴彦立)의 아들 박기오(朴奇悟)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개국에 공을 세우고,태조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 품계)으로 태보(太保:정1품)에 올라 죽주백(竹州伯,죽주는 죽산의 옛 지명)에 봉해져,식읍(食邑:고을의 조세를 받아쓰게 함)으로 죽산(竹山)을 하사(下賜)받아,후손들이 죽산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그 후 죽주백(竹州伯) 박기오(朴奇悟)의 손자 박충숙(朴忠淑)이 고려 현종때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절도사 종2품)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와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부총리)에 이르렀다.7세손 박정유는 고려 예종과 인종대에 걸쳐, 20여년간 대간(臺諫:사헌부,사간원의 간관 벼슬)으로 있으면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우부승선(右副承宣:승지의 고려때 명칭으로 왕명을 출납하던 정3품)을 거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왕명을 출납하고 궁중의 숙위를 맡은 추밀원의 정3품)겸 태자좌빈객(太子左賓客:태자를 교육하던 시강원(侍講院)의 정2품)에 이르렀다.형부(刑部) 원외랑(員外郞:정6품) 박육화(朴育和)의 아들로,기사(騎射:말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것)에 능했던 박인석(朴仁碩)은 명종초에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북원(北原)에 은거했다가 선종이 즉위하자,감찰어사(監察御史:관원에 대한 규찰과 전곡의 출납을 감찰한 어사대의 종6품)와 형부 원외랑(員外郞:정6품)을 지내고,초토판관(招討判官종5품)으로 경주의 초적(草賊)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우고,후에 호부상서(戶部尙書정3품 장관)에 이르러 치사(致仕: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했다.전법판서(典法判書:고려때 전법사의 정3품장관)를 지낸 박휘(朴暉)의 아들 박전지(朴全之)는 외교와 정치이론에 밝아 원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쳤으며,충선왕(忠宣王)이 복위하자 연흥군(延興君)에 봉해졌고,서기1321년(충숙왕8)때 공신(功臣)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중서문하성의 종2품재신)에 올라 왕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정당문학으로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진 박문보(朴文珤)의 증손 박원형(朴元亨)은 세종과 세조때의 명신(名臣)으로,벼슬이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이르렀으며,사체(事體:사리와 체면)에 명달하고,전고(典故:전례와 고사)에 밝아 "외교(外交)의 일인자"로 손꼽혔다.중국의 사신(使臣) 장영(張寧)이 그의 인품을 평하기를 "그대와 같은 재주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났더라도 숙향(叔向)과 자언(子彦)의 밑에는 있지 않은 것이다"라고 극찬했다.특히 그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에 올랐으면서도, 평생을 청렴하고 검소하게 생활함으로써,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왕에게 바른말을 잘해 세종은 그를 가리켜 급암(汲菴:직언을 잘한 한나라의 충신)이라 불렀다고 한다.그의 아들 박안성(朴安性)이 벼슬이 높이 오르기 전에 그의 생일에 술상을 차려 올리자 그는 받아 마시며 아들을 앉혀놓고, 아래와 같은 계명시(戒命詩)를 내렸다."오늘밤 등불 앞에 두어 순배 술을 드니/ 너의 나이 헤어보매 서른 둘 청춘이라/ 우리집 가보로는 청백 그 뿐이니/ 이걸 잘 지녀서 무한히 전해 내려라."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정령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으뜸 벼슬) 박안성(朴安性)의 후대에서는 광해군 때 좌의정(左議政:정1품 정승)을 지낸 박홍구(朴弘耉)가 유명했다.그는 도정(都正:종친부,돈령부,훈련원의 정3품)을 지낸 박난영(朴蘭榮)의 아들로, 선조때 식년문과(式年文科: 3년 마다보던 정기과거)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역사를 기록하던 관원으로 예문관의 검열.승정원의 주서 등을 일컬음)과 정언(正言:사간원의 정6품)을 지내고, 임진왜란때는 전라도어사(全羅道御史)가 되어 군량미 조달에 수완을 보였으며,1601년(선조34) 호조참판(戶曹參判:종2품 차관)으로 진하부사(進賀副使:나라에 즐거운 일이있을 때 중국에 가던 사신,두번째 서열)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광해군의 혼탁한 정국에서 우의정(右議政:정1품 정승)과 좌의정(左議政정1품 정승)을 지냈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삭직(削職: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이름을 사판에서 없앰)되었으며,'이 괄(李适)의 난' 때 광해군의 복위를 도모했다는 조카 박윤장(朴允章)의 사건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던중 자결했으나,숙종때 신원(伸寃:억울하게 뒤집어 쓴 죄를 씻음)되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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