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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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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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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종의 스승 곽상.두문동 72현 곽추 일문삼세(一門三世)국왕 총애 받아청주곽씨(淸州郭氏)는 오랜 역사를 지닌 씨족으로 757년 현재의 충북 청원군 북이면 내추리에서 발현하여,신라 경덕왕때 현재의 청주인 서원경(西原京)에 세거하여 왔으며 신라 헌강왕때 시중(侍中:집사성의 정승)을 역임한 곽상(郭祥)을 시조로 받든다.그러나 시조 이후의 세계(世系)가 전하지 않아 시조의 후손인 곽원(郭元,시호 문성)을 1세조로 받든다.1세조 곽원은 고려 성종때 형부상서(刑部尙書:정3품 법무장관)를 지냈으며 기록에는 그가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관리로서 유능하였다고 한다.또한 6세손 곽 상(郭尙,순현공)은 형부상서(刑部尙書),참지정사(參知政事:고려 중서문하성의 종2품재신)에 오른 예종의 스승으로 왕의 총애가 두터웠다고 하며,중신들 간에 명성이 좋았다고 한다.그는 2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 곽탄(郭坦) 또한 명성이 높았으며,둘째 아들 곽 여(郭輿)는 예종의 신임이 두터웠다.예종은 그를 선생이라 부르며 함께 하길 즐겼으며 도성 동쪽의 약두산일봉(若頭山一峰)을 하사하여 초당(草堂)을 짓고 그곳에 거처케 하였으며,호를 동산처사(東山處士)라 하였다. 8세손 곽동순(郭東珣)도 진정공(眞靜公)의 행적을 이어 국왕의 총애를 받아 일문삼세(一門三世)의 총애를 받아 당시 곽씨(郭氏)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었다.11세인 곽예(郭預)는 고종42년에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여 전주사록(全州司錄:정8품)이 되었다. 그는 원종14년에 첨사부녹사(詹事府錄事:기록과 문서를 맡은 서리)로서 홍저와 함께 일본에가 고려에 대한 침력적인 행동의 중단과 끌려간 고려인의 송환을 요구하고 돌아왔다. 그후 예빈주부(禮賓主簿:빈객의 연향을 맡아보던 관아인 예빈시의 벼슬로,공양왕 2년(1390)에 전객시를 고친 것,주부는 낭관 벼슬)겸 직한림원(直翰林院:고려때 사명을 작성하는 일을 맡아본 관청의 벼슬),우부승지(右副承旨:왕명을 출납하던 정3품),동지공거(同知貢擧:고려때 과거를 보이던 시관) 등을 역임하였다.충렬왕12년에 성절사(聖節使:중국 황제와 황후의 생일 축하사신)로 원에 다녀온 뒤 55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그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의정부도진사장(議政府都津寺長:사당패에서 각 종목의 으뜸가는사람,또는 거사)인 곽운룡(郭雲龍)이고,둘째아들은 교서랑(校書郞:고려때 비서성 정9품) 곽운진(郭雲鎭)이다. 이 형제에 이르러 곽씨는 양파(兩派)로 나뉘어졌다.13세 곽연준(郭延俊)은 시호가 충헌(忠憲)으로 전법판서(典法判書:고려때 형조의 예전이름,법무장관)를 역임하였는데,충정왕2년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지면서 곽씨는 본관을 청주(淸州)로 하였다.또한 충렬왕11년에 문과에 급제한 장원공(壯元公) 곽린(郭麟)은 당시 원세조가 일본에 선무공작(宣撫工作)을 하기 위해 첨추원(僉樞院:왕명을 출납하던 중추원의 정3품무관) 홍군상(洪君詳)을 고려에 보내 충렬왕이 김유성(金有成)으로 하여금 선유정사(宣諭正使:나라에 병란(兵亂)이 있을 때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훈유(訓諭)를 알리던 임시 으뜸벼슬)로 삼아 일본에 보내고자 했으나, 모두가 서장관(書狀官:사신을 따라가 기록을 맡던 임시 벼슬)하기를 피하였다. 그렇지만 장원공(壯元公)은 충직한 용기가 있어 이런 일에 피한다는 것은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라 하고 가기를 원하였다.그러나 그는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서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 그 가족을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15세 곽추(郭樞)는 포은 정몽주와 같이 동문수학하였으며,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예문관은 제찬과 사명을 담당하던 관청,직제학은 정4품),밀직사사(密直司事:정령을 출납하고 숙위와 군기를 맡았던 밀직사의 벼슬)등을 역임하였고,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개풍 광덕산)에 들어가 태조와 태종이 불렀으나 불사이군의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청주곽씨(淸州郭氏)는 조선시대에도 의(義)를 실천하여 대대로 인물이 전래하였다.곽해룡(郭海龍)은 고려 우왕10년 중랑장(中郞將:정5품)으로 임금에게 건의하여 무예도감(武藝都監:궁궐문 옆에서 숙직하며 호위하는 일을 맡아보던 무사)을 설치케 했으며,조선 개국후 태조2년에 주문사(奏聞使:주청사,중국에 주청할일이 있을 때 보내던 사신)의 통역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태종때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군기감의 종3품)에 이르렀다.곽존중은 태조5년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정종과 태종,세종 4대 임금을 모셨으며,세종때 도승지(都承旨:승정원의 정3품 왕의비서실장) 경창부윤(府尹:종2품지방장관)을 거쳐 병조,예조,이조(吏曹參判:종2품차관)을 역임하고,성절사(聖節使:중국황제.황후생일축하사신)로 명나라에 다녀왔다.곽충보(郭忠輔)는 우왕9년에 병마사(兵馬使:종2품으로 각 지방의 병마를 지휘하던 절도사.병사)로 왜구를 물리쳤으며, 1388년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우는데 공을 세웠다.조선개국후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왕명의 출납과 궁중의 숙위 등을 맡아보던 중추원의 종2품)를 거쳐 도총제(都摠制:오위도총부에서 군무를 총괄하던 최고군직)에 이르렀다.곽설(郭說)은 선조 34년에 문과에 급제하고,전적(典籍:성균관 정6품)을 지냈는데,외숙인 김자점이 권세를 남용하자 간언(諫言)을 하였으나 듣지 않자 병을 핑계삼아 원주로 내려갔다.이밖에 청주곽씨 인물로 임진왜란때 공을세운 곽수인(郭守仁).곽희검(郭希儉).곽수지(郭守智)등이 있다.곽시징(郭始徵)은 집의(執義:종3품)를 역임한 곽지흠(郭之欽)의 아들로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천거로 참봉(參奉:종9품)이 되었으나,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퇴직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한편 기사환국(己巳換局)은 숙종 15년(1689), 소의 장씨 소생의 아들을 원자로 정하는 문제로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뀐 일을 말한다. 이에 반대한 서인(西人)이 지지 세력인 남인(南人)에 의하여 패배하였으며,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된 후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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