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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왕이 직접 써준 가훈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조선시대에 8명 장원급제자 문과(文科대과)에 188명 무과 44명전의이씨(全義李氏)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응양대장군(鷹揚大長軍:응양군은 고려때 2군의 하나이며 대장군은 종3품) 이도(李棹)를 시조로 받든다.<전의이씨 석탄공파>가 밝힌 전의이씨 연원과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따르면,시조 이도(李棹:시호는 성절 聖節)는 초명(初名)이 이치(李齒)라고 한다.이도(李棹)는 원래 공주지방에 살던 인물로, 고려 태조가 견훤(甄萱,후백제왕)을 정벌하러 남하하여 공주의 금강에 도착했을때 장마로 인하여 금강물이 범람하자,태조를 도와 모든 군사와 함께 무사히 도강(渡江)하도록 했다고 한다.그래서 태조 왕건으로부터 도(棹)라는 이름을 하사 받고,태조 23년 통합삼한삼중대광(統合三韓三重大匡:정1품 품계)로 태사(太師:3공인 태사.태부.태보 중 하나로 정1품)에 올랐으며,익찬2등공신(翊贊二等功臣)으로 전의후(全義侯,처음에는 전산후 全山侯)에 봉해졌다고 한다.그 이후로 시조 이도(李棹)는 전의(全義)의 이성산(李城山) 아래로 이주하여 정착하였으며,후손들은 본관을 전의(全義)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문헌에 의하면, 태조 왕건은 시조인 이도(李棹:태사공)에게 군사적 요충지인 청주목(牧)인 전의.전동 지역 토지와 1천호(전의이씨 기록에는 수천호라함)의 식읍(食邑:공이있는 사람에게 내리어 그 고을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한 고을)을 하사하고 전산후(全山侯,전산은 전의옛지명)로 봉하였다.그 당시 전산후(全山侯)로 봉작 되었음은 고려 태조의 봉건 정치 체제하에서는 최고의 대재(大宰) 후에 봉작된 것이라고 한다.<오등봉작제>의 공(公)과 후(侯)는 그 시절에는 제후라고도 칭하였다.5등의 공.후.백.자.남 중,국공은 3천호에,정2품,군공은 식읍 2천호에 종2품,후는 식읍 1천호에 정5품의 관작을 내렸으며 고려말에는 5등 모두에게 정1품을 내렸다.태사공 이도가 식읍으로 받은 지역은 소백산맥과 차령산맥이 이어져 있고,금강 공주,전의,전동 지역은 군사적 요충지이기에 후삼국시대의 적전지이다.특히 후백제지역의 반항을 제압하여 고려 왕조를 안전하게 수호할 요새지이기 때문에, 가장 유능하고 신뢰 할 수 있는 응양대장군(鷹揚大將軍:응양군은 고려때 2군의 하나,대장군은 종3품) 이도(李棹)에게 토지를 분급한 것이다.전의와 전동은 운주산성,고산성,증산산성이 이어져 있는 요새지역으로,태사공 이도(李棹)가 전의의 이성산(李城山)도 축성한 성주였다. 기록에 의하면,시조 태사공은 나라의 중신으로 개성(도성)에 주로 거주했지만, 식읍으로 하사 받은 전의지역에서 중남부 방어의 소임도 다하였다고 한다.전의이씨는 조선시대에 상신(相臣:정1품 우의정,좌의정,영의정) 5명을 배출했으며,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1명,청백리 6명,공신 6명을 배출하였으며,8명의 장원급제자와 문과(文科대과)188명,무과(武科:무관을 뽑기위해 보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44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과거)에 433명 등 665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인구조사에 의하면 전의이씨는1985년에는 26,970가구에 112,088명,2000년에는 41,071가구에 133,237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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