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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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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문무반대가(名門武班大家)로 사대봉군(四代封君)중국에서 들어와 완산에 정착,선대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이남쪽의 삼례로 내려올 때 함께 들어와가평이씨(加平李氏)의 유래는 <가평이씨세보>와 문헌에 의하면 신라 중엽 완산의 호장(戶長:고을 아전의 으뜸 벼슬)을 지낸 이인보(李仁輔)로 부터 시작된다.<가평이씨 대종회>의 기록과 문헌을 종합해보면 시조의 선대(先代)에서 이신(李莘)이 은나라 기자가 중국인 5천명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이주할때 호종(扈從:왕가를 뒤따름)하였으며, 그의 후손 이경의(李景義)가 고조선 준왕(準王)이 위만의 난을 피하여,지금의 전북 금마(金馬)에 이르러 마한(馬韓)의 한왕(韓王)이 되도록 도운 공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어 대사도 (大司徒:대사도는 주나라때의 장관 벼슬이며 조선에서는 호조판서를 이르던 말)가 되고,완산군(完山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여러 대를 완산(完山)에서 살았다고 한다.그후 신라중엽에 후손인 이인보(李仁輔)가 완산지방의 토호로서 완산호장(戶長:고을아전의 맨 윗자리)을 지내 본관을 완산(完山)으로 하였고, 이인보를 시조로 받들게 되었다.본관을 완산으로 삼은것은 신라시대라고 하며 8세손 이기문(李起文)이 가평 조종현(朝宗縣:조종은 가평의 옛지명)에 이주하여 살면서 본관을 조종으로 삼았다가, 조선시대에 이다림(李多林)이 가평군(加平君)에 봉해져서 본관을 가평으로 하였다고 한다.결국 가평이씨의 관적은 처음 완산(完山)으로부터 시작되어 조종(朝宗)으로 바뀌었고, 다시 조종에서 가평(加平)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가평이씨족보(계해보.癸亥譜)에는 "신라시대에 시조 이인보(李仁輔)가 완산에 정착한 이래로 6대가 실전(失傳:대대로 내려온 사적이나 묘를 알수없게 됨)하여 알 수 없으나, 8세손 기문(起文)께서 가평 조종현(朝宗縣)에 살으시어 본관이 되고 그후 31세손 다림(多林)께서 이조 태종 12년에 무갑과(武甲科)에 급제 하시여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겸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官)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가평군으로 봉(封)해져 이로부터 가평으로 개관되었으며 가평군을 중시조(中始祖)로 모시고 있다"고 기록되어있다.그리고 정유보(丁酉譜) 서문(序文)에는 "우리 이씨가 신라와 고려 때부터 30여대 높은 벼슬을 하여 온 벌족이지만 직계로 단통(單統)이라는 점이 아쉬웠음을 밝혔으며,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호서(湖西)에서 영남(嶺南)으로 영남에서 서호(西湖)로 드문드문 떨어져 살게 되었다"고 되어 있다.중시조 이다림은 서기1412년(태종 12)에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급제하여 압록강.두만강변의 만주.여진족의 방어와 해안에 출몰하던 왜구들의 격퇴에 큰 공을 세우고 요직을 두루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왕명의 출납과 궁중의 숙위.군기 등을 맡아본 관청인 중추원의 종2품벼슬.가선대부 품계)와 군의 최고통수기관이었던 오위도총부의 부총관(副摠管:오위도총부의 종2품)에 올랐다.그는 증병조판서(判書:국방부장관)와 친공신의 부친에게 내리는 순충적덕 보조공신에 책훈되고 가평군(加平君)에 봉군되었기에,본관을 <조종>에서 <가평>으로 바꿔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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