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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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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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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승화,김굉필(金宏弼)과 더불어 당대의 양재(兩才),홍의장군 곽재우곽안방(郭安邦) 고손자대에서 현곽8주(玄郭八走)로 명성우리나라 곽(郭)씨의 본관은 현풍곽씨,청주곽씨,선산곽씨,해미곽씨,봉산곽씨,여미곽씨 등 6본이 전해지고 있으나,청주곽씨(淸州郭氏)를 제외한 나머지는 현풍곽씨(玄風郭氏)에서 분관된 것이다.현풍곽씨 시조는 포산군(苞山君) 곽경(郭鏡처음 이름은 야로(若魯),자(字)는 노이(魯以),호(號)는 암곡(巖谷)또는 초수(樵 )이며,시호(諡號)는 정의 正懿)이다.중국 관서지방 홍농(弘農)출신 곽경(郭鏡)은 송나라 사람으로 문연각(文淵閣) 한학사(翰學士)가 되었고, 서기1133년(인종11:17대왕,재위:1122~1146)때 7명의 학사(學士)들과 우리나라에 귀화하였다.그는 인종16년 등과(登科)하여,고려조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고려때 문산계 29계 중 제3계로 종2품,고려 말에는 정2품)에 올라,평장사(平章事:정2품부총리)와 문하시중(門下侍中:서정을 총리하던 종1품정승)에 이르러 포산군(苞山君)에 봉해졌다.시조 곽경이 포산군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처음에는 관향(貫鄕)을 포산(苞山)으로 하였으나,조선때 포산현(苞山縣)이 현풍(玄風)으로 개칭됨에 따라,현풍(玄風)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으나, 현재도 포산과 현풍을 병용하고 있다.시조 곽경은 서기1117년에 출생해서, 1179년 10월15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생존기간의 절대년도가 명확한 것으로 유명한데,1930년 시조의 묘(墓)에서 지석(誌石,생전의 행장 등을 돌에 새겨 봉분앞에 뭍음)이 발견되었고,거기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가 중국 관서(關西)의 홍농(弘農)사람이라는 것과 고려 명종9년에 세상을 떠난 사실도 밝혀졌다.현풍곽씨(玄風郭氏)는 한때 본관을 선산(善山).해미(海美).강릉(江陵)등 별관(別貫)을 써온 때가 있었으나,그 족보 첫머리에 현풍곽씨(시조 곽경)의 후예라 써왔기에,1976년 병진대동보(丙辰大同譜)를 발간할 때, 대종회(大宗會) 의결(議決)로 본관을 현풍(玄風)으로 통일하였다.현풍곽씨(玄風郭氏) 후손들은 시조 포산군(苞山君)의 봉호(封號)를 소중히 여겨 족보의 표제(表題)나 비명(碑銘)의 제면(題面) 등에는 포산곽씨(苞山郭氏)로 많이 쓴다.일찍이 영남 내륙지방에 뿌리를 내린 현풍곽씨(玄風郭氏)는 고려중기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충(忠).효(孝).열(烈)의 가통을 이어,우리나라 대표적인 도덕 가문이다.조선때 정려가 12개나 되어,12정려는 <현곽>의 대명사로 통한다. 정려란 충신.효자.열녀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그들이 살던 고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이다. 옛날에는 정려가 하나만 나도 가문과 고을의 자랑거리였다. 더구나 12정려라면,그 가문의 영광은 당시 조선 천지에 뻗칠만한일이었다. 뿐만 아니라,곽문의 정려는 전국 각지에 있어 가문의 자랑으로 삼고 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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