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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천공씨는 공보언(公普彦)을 시조로 받든다.시조 공보언은 공윤보(公允普)의 후손으로, 공보언이 세종때 함경도 문천으로 유배되어 그곳에 정착해 살았기에, 후손들이 본관을 문천(文川)으로 하였다.인구조사에서 문천공씨(文川公氏)는 2000년에는 총 215가구에 686명이었다.창원공씨(昌原公氏,창원파)시조 공의는 고려조에 정승(종1품재상)을 지냈다.1985년에는 인구가 100명이 있었다.안록산(安綠山)의 난"안사의 난"이라고도 한다. 서기 755년 당나라의 절도사(節度使)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그의 부장 사사명(史思明)이 뒤를 이어 반란을 주도 했기에, 둘을 합쳐 '안사의 난' 이라고 한다.안록산은 당나라 10개의 절도사 중 범양(范陽).평로(平盧).하동(河東) 세곳의 절도사를 겸했고 20여만의 최정예 병력을 휘하에 두고 있었다.755년 안록산은 난을 일으켜 당의 동쪽 서울인 낙양을 함락하고, 수도 장안을 점령하여 기세를 올리게 된다. 안록산의 반군이 장안으로 들어오기전 조정에서는 고구려 유민 출신의 유명한 고선지(高仙芝)대장군(大將軍)에게 수비를 명했으나 간신들의 참소로 고선지가 처형되고 후임자인 절도사 가서한(可舒翰)의 참패로 장안이 함락되자 황제인 당 현종은 사천지방으로 피난했고 황태자가 숙종으로 즉위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시작하게 된다.한편 이 시기에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조국을 멸망시킨 당의 심장부에 독립정권을 세우고 수도 장안을 한 때 공황상태로까지 몰아 넣은 영걸 이정기(본명은 회옥)장군에 대한 신당서(新唐書)의 기록이 나온다.담대한 용력으로 '안록산의 난'을 토벌하여 입신하게 되며 그는 장손,차손으로 이어진 4 대 55년간 당(唐)의 중앙정부와 대립적인 독립 왕국을 건설했으며 당나라 조정도 원래 이름인 회옥 대신 정기(正己)라는 이름을 내리고 "평로치청절도관찰사"겸"해운압발해 신라양번사"라는 관직을 주고 이어 이정기에게 "요양군왕(饒陽郡王)에 봉하는 무마책을 썼다.안진경,이광필,곽자의 등의 의병투쟁 등으로 고립되기 시작한 안록산은 내분이 일어나, 아들 안경서(安慶緖)에게 살해되고, 안경서는 다시 사사명에게 살해당했으며, 장수들의 배신이 속출하게 되자 당나라는 위그르 용병까지 고용해, 전국에 절도사(節度使)를 설치해서 군사력을 증강 배치했다.763년 아버지 "사사명"을 살해하고, 뒤를 이어 반란을 지휘했던 사사명의 아들 사조의(史照義)를 제거하고 당은 가까스로 난을 진압했다.이 "안사의 난"으로 당나라는 체제가 크게 변화하고, 각 지의 절도사(節度使:조선때 직제로 보면 절도사는 지방장관.종2품 병마사)들이 난립하면서 멸망의 단초를 열게된다.현풍곽씨(玄風郭氏,포산苞山곽씨)곽승화,김굉필(金宏弼)과 더불어 당대의 양재(兩才),홍의장군 곽재우곽안방(郭安邦) 고손자대에서 현곽8주(玄郭八走)로 명성우리나라 곽(郭)씨의 본관은 현풍곽씨,청주곽씨,선산곽씨,해미곽씨,봉산곽씨,여미곽씨 등 6본이 전해지고 있으나,청주곽씨(淸州郭氏)를 제외한 나머지는 현풍곽씨(玄風郭氏)에서 분관된 것이다.현풍곽씨 시조는 포산군(苞山君) 곽경(郭鏡처음 이름은 야로(若魯),자(字)는 노이(魯以),호(號)는 암곡(巖谷)또는 초수(樵 )이며,시호(諡號)는 정의 正懿)이다.중국 관서지방 홍농(弘農)출신 곽경(郭鏡)은 송나라 사람으로 문연각(文淵閣) 한학사(翰學士)가 되었고, 서기1133년(인종11:17대왕,재위:1122~1146)때 7명의 학사(學士)들과 우리나라에 귀화하였다.그는 인종16년 등과(登科)하여,고려조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고려때 문산계 29계 중 제3계로 종2품,고려 말에는 정2품)에 올라,평장사(平章事:정2품부총리)와 문하시중(門下侍中:서정을 총리하던 종1품정승)에 이르러 포산군(苞山君)에 봉해졌다.시조 곽경이 포산군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처음에는 관향(貫鄕)을 포산(苞山)으로 하였으나,조선때 포산현(苞山縣)이 현풍(玄風)으로 개칭됨에 따라,현풍(玄風)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으나, 현재도 포산과 현풍을 병용하고 있다.시조 곽경은 서기1117년에 출생해서, 1179년 10월15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생존기간의 절대년도가 명확한 것으로 유명한데,1930년 시조의 묘(墓)에서 지석(誌石,생전의 행장 등을 돌에 새겨 봉분앞에 뭍음)이 발견되었고,거기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가 중국 관서(關西)의 홍농(弘農)사람이라는 것과 고려 명종9년에 세상을 떠난 사실도 밝혀졌다.현풍곽씨(玄風郭氏)는 한때 본관을 선산(善山).해미(海美).강릉(江陵)등 별관(別貫)을 써온 때가 있었으나,그 족보 첫머리에 현풍곽씨(시조 곽경)의 후예라 써왔기에,1976년 병진대동보(丙辰大同譜)를 발간할 때, 대종회(大宗會) 의결(議決)로 본관을 현풍(玄風)으로 통일하였다.현풍곽씨(玄風郭氏) 후손들은 시조 포산군(苞山君)의 봉호(封號)를 소중히 여겨 족보의 표제(表題)나 비명(碑銘)의 제면(題面) 등에는 포산곽씨(苞山郭氏)로 많이 쓴다.일찍이 영남 내륙지방에 뿌리를 내린 현풍곽씨(玄風郭氏)는 고려중기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충(忠).효(孝).열(烈)의 가통을 이어,우리나라 대표적인 도덕 가문이다.조선때 정려가 12개나 되어,12정려는 <현곽>의 대명사로 통한다. 정려란 충신.효자.열녀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그들이 살던 고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이다. 옛날에는 정려가 하나만 나도 가문과 고을의 자랑거리였다. 더구나 12정려라면,그 가문의 영광은 당시 조선 천지에 뻗칠만한일이었다. 뿐만 아니라,곽문의 정려는 전국 각지에 있어 가문의 자랑으로 삼고 있다.현풍(玄風)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일대의 옛 행정구역이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현풍현(玄豊縣)으로 개칭 밀성군(密城郡:밀양)의 관할로 두었으며 1390년(공양왕 2) 밀성군의 구지산부곡(仇知山部曲)을 분할받아 감무(監務:작은현에 중앙에서 파견한 감독관)가 파견되면서 독립하였다.조선시대에도 현풍현으로 명맥을 이어오다 1896년 경상북도 현풍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현풍면으로 분할 축소되어 대구부로 통합되면서 현풍군은 폐지되었다.1941년 대구부가 대구시로 개편된 이래 1995년 대구광역시에 통합되었고 2005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이 되었다.묘는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무건리에 있으며, 매년 11월 둘째 일요일에 향사(제사)한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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