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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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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구씨는 원래 구씨(仇氏)였는데,1798년 정조의 사성(賜姓:성을 내림)으로,구씨로 고쳐쓰게 되었다. 1762년(영조38)의 창원구씨 초간세보(初刊世譜)인 임오보(壬午譜)에는 "구씨(仇氏)는 멀리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어진 재상이 이어졌다" 라고 되어 있는데,신라 진흥왕때의 구진(仇珍)장군, 문무왕(文武王)때의 구진천(仇珍川),술간(述干) 구기(仇杞),구근(仇近) 등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큰공을 세웠다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이 전한다.창원구씨는 세종실록 지리지(地理誌)에 토성(土姓)으로 기록되어 있으며,1530년(중종25)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구씨(仇氏)의 세거지는 무려 21개소나 되며,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행적을 종합하여 볼 때 구씨(仇氏)는 삼한갑족(三韓甲族)의 한 성씨(姓氏)였다.구자(仇字)의 의미를 살펴보면,원수(元首)구자(仇字)로 국가주권의 최고대표자란 뜻도 있으며,원수(元帥) 구자(仇字)의 의미로 전시,또는 군대를 통솔하던 장수(將帥)를 나타내며,또 짝구,배필(配匹)의 의미로도 사용되어졌다.원시조(原始祖) 구성길(仇成吉)은 945년(고려 혜종2)에 서경(西京:지금의 평양)에서 공을 세워 문하시랑(門下侍郞:정4품차관) 평장사(平章事:정2품부총리)가 되고,의창군(義昌君)에 봉(封)해져 의창(義昌)을 식읍(食邑:공이많은 사람에게 고을의 조세를 개인이받아쓰게하는것)으로 받았다.후손들은 창원(昌原)이 주요 세거지(世居地)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창원을 단일 관향(貫鄕)으로 하고 있다. 원시조(原始祖) 이후 구희(喜)는 후일 역시 문하시랑(門下侍郞:정4품차관).평장사(平章事:정2품부총리)의 벼슬을 지냈고,후손 구경(景)은 수안현감(遂安縣監:종6품)을, 후손 구염(廉)은 참봉(參奉:종9품)을 지낸것으로 문헌에 나타난다.그러나 이 후 400년간 세계(世系)를 자세히 알 수 없어 계보(系譜)가 확실한 고려말 생원(生員) 구설(仇雪)을 1세조로 받들고 조선 세종조에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2세 구종길(仇宗吉)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그의 아들 구복한(復漢)을 부사공파(府使公派), 동설(東薛)공을 진사공파(進士公派), 동직(東直)을 승지공파(承旨公派)로 그리고 중시조의 동생 구원길(元吉)의 아들 구석훈(錫勳)을 처사공파(處士公派)로 4파(四派)로 계대(繼代)하고 있다.구씨(仇氏)를 具氏(구씨)로 바꾸어 쓰게된 것은 1791년 정조(正祖)가 장용영(壯勇營:조선후기 조직개편한 국왕 호위부대) 초관(哨官:종9품서반무반직)에 임명하면서,훈련도감집사(訓練都監執事:조선때 5군영의 하나로 수도 경비와 포수.사수.살수의 3수군(手軍)의 양성을 맡아보던 훈련도감의 중간벼슬)인 구시창(仇始昌)이 후보명단에 들어있는 것을 보고, "구성(仇姓)이 비록 오래 되었으나 구자성(具字性)이 더 좋으니 구씨(具氏)로 고쳐라" 하고, 연교문(筵敎文)보냈는데, 더 확실한 문적(門籍)이 필요하다고 구문(仇門)에서 상서(上書)를 하자,1798년 일성록(日省錄)및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사성(賜姓)사실을 기록하고 확증지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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