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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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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하씨(河氏)는 강릉하씨(2,909명).강화하씨(913명).경주하씨(2,351명).남평하씨(4명).단계하씨(332명).대전하씨(463명).밀양하씨(1,516명).안음하씨(171명).전주하씨(3,875명).진양하씨(71,815명).진주하씨(121,054명).창녕하씨(1,661명).청주하씨(701명).하동하씨(1,782명).영도하씨(影島河氏)가 있다.70년대 전설적인 새마을지도자 하사용(河四容)씨 밭 2만평 살수있는 박정희대통령 포상금 1000만원 수령 거부1970년 11월11일 서울 시민회관. 朴正熙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과 농어민 대표 등 3000여 명이 1층부터 3층까지의 시민회관 객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날의 행사명은 전국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 경진대회. 대회는 텔레비전을 통해서 전국에 중계되고 있었다.대통령의 눈에 이슬이 맺히게 하다 모든 참석자들이 양복 차림 등 정장 차림인 가운데 남편은 점퍼 차림, 아내는 스웨터 차림인 부부가 눈길을 끌었다. 이 대회에서 전국 1등을 차지한 하사용(河四容:82세,2010년 현재 충북 청원군 강외면정중리)씨 부부였다. 하씨(河氏)는 이 자리에서 성공사례 발표와 함께 박대통령으로부터 <동탑산업훈장>을 받게 돼 있었다. 대회 참석전 하사용씨 고장의 공무원들은 대통령 앞에 서는 자리인 만큼 양복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하씨에게는 양복이 없었고,양복이 필요 없었다.밭에서 일하는 농부에게 양복은 필요 없는 차림새였다. 끝내 고집을 피우고 깨끗이 빨아 입은 점퍼 차림으로 대회에 참석했다. 옆에 앉아 있는 청원군수를 흘끗 바라보았다. 하씨보다 더 긴장한 모습이었다. 군수는 옆자리에 앉아 "나가서 말씀하실 때는 정신차려 가지고 요거(공무원들이 작성해 준 원고)를 잘보고 하셔야지 말을 한 마디라도 잘못하면 큰일납니다"며 자꾸 주의를 주었다. 무섭기도 하고 떨리기도 했다. 식순에 따라 성공사례를 발표할 차례가 되었다.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정중리에서 온 하사용입니다"는 말로 하씨의 성공사례 발표는 시작됐다. 고생스러웠던 지난날을 이야기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설움에 북받쳐 울먹이기도 했지만 그는 아무 꾸밈 없이 자신의 "가난 탈출기"와 그동안 체득한 "자신만의 농법"을 소개했다. 발표가 끝났을 때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박대통령이 2층 특별석에서 내려와 하씨 앞에 섰다. 하씨의 손을 잡아 주었다. 하씨는 박대통령의 눈을 바라보았다. 박대통령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박대통령이 말했다.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당신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산 증인이십니다"박대통령은 하씨의 목에 동탑산업훈장을 걸어 주었다. 곧바로 이어진 박정희대통령의 치사 첫 마디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 치사문은 인쇄된 것이니 가지고 가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조금 전 충청북도에서 오신 농민 하사용씨의 성공사례가 너무나 큰 감명을 주었기에 본인의 소감을 말하겠습니다"한 농민의 원고 없는 진솔한 성공사례 발표에 朴대통령도 즉흥연설로 화답한 것이다. 이후 하씨는 새마을 운동이 본격화한 1971년부터 체험으로 느낀 새마을 운동의 정신을 전파하는 최고의 "전도사"가 됐다. 수원에 있는 새마을 연수원은 물론 각 기업체, 관공서, 학교 심지어 교도소에서까지 초청을 받아 강연을 했다. 그의 강연은 감동을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가난한 시대를 사는 국민들에게 "나도 가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의지를 심어 주었다. 하씨는 최근까지 3000여회에 걸쳐 강연을 했다고 한다.하사용(河四容)은 1930년 4월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정중리에서 8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자신의 힘으로 가난을 극복하겠다는, 河씨의 自助정신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재가(裁可)한 포상금 1000만원을 거부하는 불경죄( )를 짓게 만든다. 1970년 11월11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 경진대회에서 河씨의 성공사례에 감동한 朴대통령은 이튿날 河씨 부부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河씨가 기억하고 있는 朴대통령과의 만남. 『나와 아내는 전날 복장인 점퍼와 스웨터 차림으로 청와대에 갔어. 朴대통령께서 반갑게 맞아 주셨지. 대통령께서 「어떤 소원을 가지고 살아 왔느냐」고 내게 물어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던 걸로 기억이 나. 「한이 맺힌 게 가난이니까, 소원이라면 배고픔과 싸워서 승자가 되는 것입니다」고 했지.朴대통령은 그 말에 감동하는 눈치였어. 그때 朴대통령께서 이런 말씀도 하셨어. 「나도 대통령을 그만두면 하사용씨 같은 새마을 지도자가 되겠다」고 말여. 대화중에는 또 이런 말씀도 하셨어. 「우리 민족을 위해서 내가 무얼 하다가 간 사람인지 죽은 뒤에는 알 것이다」고 말여. 크기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얘기를 나눠 보니까 나하고는 배짱이나 성격이 잘 맞는 분이셨어. 나도 당시에 내 목표를 위해 가족들을 강하게 끌고 가다가 보니까 가족들의 불만들이 있었거든. 그래도 나는 나중에 가족들이나 근동 사람들이 가난과 싸워 이긴 후에 죽으면 제대로 평가를 하게 될 것이다, 하는 확신이 있었거든』 청와대를 방문한 후 河씨에게 1000만원의 포상금이 내려졌다. 河씨의 당시 농토는 3000여 평이었다. 영양실조로 결핵에 걸릴 정도로 먹지도 쓰지도 않으며 돈이 생기는 대로 저축만 했던 河씨가 270평의 땅을 3000평으로 늘리는 데 무려 1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1,000만원으로 구입할 수 있는 땅은 2만 평 정도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河씨는 포상금 수령을 거부했다. 『처음에 보통사람들은 그런 이야기(1000만원 수령을 거부했다는)를 하면 후라이 까는(거짓으로 과장하는) 걸로 알았어. 왜 안 받았느냐. 나는 목표한 것이 있으니까.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해결한다 하는 결심 말야. 그때 당시 1000만원을 받아다가 내가 땅을 샀으면 좀더 쉽고 편하게 부자도 될 수 있었겠지. 일을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었겠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는 내가 내 힘으로 가난을 극복하고 말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살아나가는 과정에서 그 결심을 허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섰고, 또 하나는 내가 그런 것을 받고 이웃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느냐,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생각이 들었어. 사람들이 그럴 거 아냐. 「저 자식도 별 수 없이 정부에서 돈을 주니까 저만큼 큰 농장도 갖고 그러고 어쩌고 다니는 거지, 제까짓 놈이 무슨 재주로 그런 걸 하느냐」는 소리를 듣는 건 뻔한 이치였거든. 난 그게 싫었어. 난 가난과 싸워서 이길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거든.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그 사람들도 열심히 일을 할 거 아니겠어 <주간조선>한편 영도하씨(影島河氏)는 부산광역시에 본관을 두고 있는 최근에 창성된 한국의성씨 중 하나이다. 영도하씨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방송인 하일을 시조로 삼는다.국제변호사였던 로버트 할리가 1997년 8월 미국국적을 버리고 한국국적을 취득하고 성과 이름을 하일로 하여 새로만든 성씨이다.시조 하일(1961년 미국태생)은 고교시절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대구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한 후 다시 한국에 유학와서 연세대학교를 졸업한후 한국인과 결혼하고 3명의 자녀(하제선.하제욱.하제익)를 두고있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하씨는 총 17본관에 지난 2000년 인구조사때는 총 209,759명으로 나타났다.우리나라 하씨(河氏)는 삼한시대 이래 진주의 토성(土姓)이다.하씨의 유래는 별의 정기(精氣)인 은하수(銀河水)와 물의 조종(祖宗)인 황하수(黃河水)의 하(河) 자(字)를 따서 성(姓)을 하(河)씨로 했다고 한다.고려 현종때 증문하시랑평장사(平章事:정2품 부총리) 하공진(河拱辰)을 시조로 받드는 <문하시랑공파>와 문종때 사직 벼슬을 지낸 하진(河珍)을 시조로 받드는 <사직공파>로 나누어져있다.사직공파(司直公派)는 고려 정종.문종대에 사직을 지낸 하진(河珍)이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은 그의 후손이다.또 다른파(派)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충렬공 하위지의 집안이다.흔히 하위지의 호를 따서 <단계하씨>로 부르지만,고려때 주부(主簿:각 관청의 낭관 즉 당하관 6품)를 지낸 하성(河成)을 시조로 받든다.진양하씨대종회(晉陽河氏大宗會:회장 하순봉)의 기록에 따르면 하씨(河氏)는 고려시대부터 성족(盛族)이었다고 한다.조선 문종때 하연(河演)이 신미보(辛未譜)를 편찬하면서 작성한 서문에는 3계통이 있다고 했다.1451년 족보(族譜)를 편저할때 하연은 그 서문에 "지금의 하(河)씨는 진주의 토착성(姓)으로 백제때 사대부의 문벌이었으나 세계(世系)가 전하지 않고 고려사에 나타난 시랑(侍郞:시랑은 4품 차관.평장사에 추증됨) 하공진과 동원이라 하나 분파가 명확하지 않고 또 강인문이 정승공에게 증시하였는데 하복야(河僕射:복야는 상서도성의 정2품 벼슬)라 했을뿐 휘(諱)를 알지 못한다 하였으니 이를 한탄하고 고려 정종,문종조에 사직(司直:오위의 정5품)을 지낸 하진(河珍)을 시조로 하였다"고 기록 하였다.진주하씨(진양하씨)는 그 발상에 대한 기록이나 고증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으나 역사시대 이전부터 진주에 토착했다고 한다.진주하씨(진양)는 진주를 본관으로 하는 여러 본이 세계(世系)를 기록하고 있으나 모두가 세거지명이며 시조가 분명한 것은 진양(진주).안음.강화 3본이라고 밝혔다.<진양하씨대종회 기록> 문하시랑공파의 하공진(河拱辰: ~1011,경종 즉위 전후~현종2년)은 고려 현종때 좌사시랑(左司侍郞:시랑은 고려때 6부.6조의 정4품차관)을 역임했고 평장사(平章事:중서문하성의 정2품 재신반열)에 추증되었으며,서기 994년(성종 13)에 압록강구당사(鴨綠江勾當使)에 임명되었고,7대 목종조에는 중랑장(中郞將:정5품 무관)으로 왕의 호위를 담당하였다.그는 고려 태조 왕건의 손자인 대양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을 삼각산 신혈사에서 모셔와 제8대 현종(顯宗)으로 옹립하는데 공을 세웠다.사직공(司直公)파는 고려 정종과 문종 연간에 걸쳐 사직(司直:현직에 있지 않은 오위의 정5품 군직 軍職)을 역임한 하 진(河珍)을 시조로 받든다.또 다른 파는 고려때 주부(主簿:각 관청의 낭관 즉 당하관 벼슬)를 역임한 하 성(河成)을 시조로 받드는 단계공(丹溪公)파 이다.본관을 진주(진양)으로 하게 된것은 누대로 선조들이 당시의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도호부는 지방관청으로 고종 32년(1895년)까지 존속했음) 지역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세거지명을 따른것이다.하연(1376∼1453)은 조선 세종 때 문신으로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하연의 아들 하우명이 선생의 묘 옆 영당에 영정을 모셔 놓고 아침 저녁으로 인사를 드렸다고 전한다. 그후 1608년(선조 41)에 신천서원 안 사당으로 옮겼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지금의 장소에 사당을 옮겨지으면서 영정도 함께 옮겨왔다. 영정은 나름대로 영정의 기본을 갖추고 있고 특히 다른 곳에서는 보기드문 부인의 모습이 나란히 모셔져 있는 점이 특색이다. 그 기법이나 재료의 질감으로 보아 다시 그려진 것 같으며 그 조성시기는 130∼180여 년 정도로 추정된다. 지금은 선생의 아들 하우명의 영정도 함께 보관되어 있다.(2003년 발견.대구국립박물관 소장)<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사실(史實)충절신 하공진(河拱辰)은 서기 1010년에 좌사낭중으로 강화 교섭사로 적진에 들어가 고려에 침입한 거란의 40만 대군을 준열한 능변으로 막아내 고려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하고, 자신은 볼모가 되었다.요나라 성종의 직접 신문을 받게된 하공진은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아시고려인(我是 高麗人:나는 고려인이다) "고려의 신하로서 어찌 두 마음을 품을 수 있느냐"며 "너희들을 섬겨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일갈했다. 요(거란)의 성종은 하공진의 기개를 가상히 여겨 온갖 방법으로 마음을 돌리려 했으나 하공진은 성종을 모욕하는 말까지 서슴치 않았다.급기야 간을 꺼내어 씹히는 충렬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는데, 이때가 서기 1011년(고려 현종2) 12월 이었다.고려 조정에서는 하공진의 순국에 대하여 교지를 내려 그 공훈을 찬양하고 아들 하칙충(河則忠)에게 녹(祿)과 5품의 관작을 내렸다. 이어 서기 1052년(제 11대 문종 6)에는 왕이 친히 "거란군 침입때 하공진은 일신을 나라에 바치기로 작정하고 적진에 들어가 세치혀로 대군을 물리쳤다" 고 현창하고 공신각(功臣閣)에 하공진의 영정을 모시도록 했다.그의 장렬한 최후는 오래도록 살신보국의 표상이었고 1000년의 세월동안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하공진은 2007년10월 경기도 파주시 고려 통일대전에 배향되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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