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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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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득어영남지의(得於嶺南之意) -'영남에서 왕의 뜻에 맞는 인재를 얻었다'고령김씨는 김남득(金南得:자는 중서重瑞.시호는 충익忠翊)을 시조로 받든다.시조 김남득은 신라 경순왕의 다섯째 아들인 의성군(義城君) 김석(金錫)의 11세손이며 고려때 전리좌랑(典理佐郞1275년(충렬왕1) 원나라의 간섭으로 행정기구를 축소 개편할 때 문관의 선임과 공훈(功勳).봉작(封爵)등을 맡았던 이부(吏部)와 의례.외교.교육 등을 맡았던 예부(禮部)를 통합 설치한 전리사의 정6품)을 역임한 김의(金宜)의 첫째 아들이다.김남득(金南得)은 본명이 김기지(金麒芝)였다. 그는 1340년(충혜왕 복위1)에 진사(進士,초시에 합격한 선비)를 지내고, 사헌부 집의(司憲府: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3품,다른 기록은 감찰사(監察司執義:사헌대의 고쳐진 이름인 감찰사의 종3품)를 거쳤으며,공민왕때는 양광도안렴사(按廉使:지방장관으로 절도사.안찰사.도지사)를 거쳐 판개성부사,문하평리(門下評理:종2품재신)가 되었다.1364년(공민왕13)에 원나라 황제가 최유의 농간에 속아 왕을 폐하려고 어사(御史) 유린을 보내 조사할 때, 김남득이 접반시랑(侍郞:사신을 접반하는 정4품 차관)이 되어 무고함을 강하게 역설하자 원나라 황제도 감화되어 계속 재위하게 되었다 한다.김남득은 사은사(謝恩使:우리나라에 호의 베풀때 중국에 가던 사신)로 원나라에 가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종2품 품계)로 예부상서(禮部尙書:정3품 장관)를 제수 받고 돌아오자, 나라에서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책록하였으며,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하고 "득어영남지의(得於嶺南之意)"즉'영남에서 왕의 뜻에 맞는 인재를 얻었다'는 뜻의 남득(南得)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김남득은 1392년 정몽주가 제거될때 그 일당으로 지목되어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개성부의 으뜸 외관직)에서 먼곳으로 유배되었고, 그가 일찌기 상주목사(牧使:정3품 수령)로 재임시 관아 동쪽에 정자를 세웠는데, 목은 이색이 이 정자를 풍영루라 이름짓고 기(記)를 지었으며, 이숭인도 이 정자에 시(時)를 지어 남겨, 이곳은 명승지가 되었다.김남득은 공양왕때는 서해도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가 되어 왜구를 격퇴하고 밀직제학(密直提學:정3품) 이지(李至)와 함께 정조사(正朝使:정월 초하룻날 새해 축하사신)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고령김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5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6명,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15명 등 26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시조의 묘는 고령 쌍림면에 있다.고령김씨는 고산파(高山派),노성장선파(魯城長善派),노성죽헌파(魯城竹軒派),순천공파,신영파,양천파,충주파,합천묘산파 등이있다.<충남 논산시 노성면 구암리.화곡리.호암리는 고령김씨 집성촌>충남 논산시 노성면 입향조 김사행(金士行,1407~1470)은 여산군수(郡守:종4품수령)로 재직하다 홍산군수로 전임되었으나,이상 벼슬에 뜻이 없어 관직을 버리고 노성면 화곡리(禾谷里)에 정착하였다. 김사행의 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김사행의 부인이 참판(參判:6조의 종2품차관)을 지낸 한양조씨 조정(趙靖)의 무남독녀였으며,조정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였다고 한다.현재까지도 고령김씨가 한양조씨를 외손봉사(外孫奉祀:조상의 제사를 받들어 모심)하고 있다.고령김씨의 노성면 입향은 한양조씨와의 혼인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김수문(金秀文,1506~1568)의 증손 김정황(金鼎黃)은 윤선거의 사촌 매제이고,여지도서(輿地圖書)니산현(노성현)인물조에 의하면,김수문의 6세손 김식(金 )이 정려를 받았다. 김사행의 후손들은 논산시 노성면 호암리와 구암리(龜巖里)장재울,상월면 월오리에 대대로 세거하고 있으며,논산시 노성면 호암리와 구암리에 집성촌을 형성하였으나,1980년대이후 구암리에는 고령김씨 몇 가구만 세거하고 있다.한편 노성면 구암리마을 입구에는 칠부정(七府亭)이라는 유허가 있는데,그 자리에는 수백년된 거목 몇 그루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며,문인석(文人石)도 보존되어 있다.구암리 유왕골에 거주하는 김재규의 전언에 의하면 칠부정은 고령김씨 문중이 연이어 조선시대에 7명의 부사(府使:정3품수령)및 좌찬성(左贊成:의정부 종1품재신)이 배출되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심은 나무라고 한다.충남 논산시 노성면 입향조 김사행 묘소는 공주시 탄천면 광명리에 있으며,그의 부인인 한양조씨의 묘소는 논산시 은진면 가야곡에 있다.김사행의 다섯째 아들 김자성(金子省,1435~1490)의 묘소에서는 유물이 대거 출토되었는데, 이 유물은 공주대학교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김임 신도비는 아들 김수문이 소세양(蘇世讓)에게 비문을 받아 1561년(명종16)에 건립하였다. 비에는 가계도와 함께 비를 세운 사정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김임신도비(神道碑)에 새겨진 석보(石譜)에 의하면,김임과 그의 아들 김수문 모두 양자였다. 당시 양자제(養子制)가 일반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내용을 신도비의 뒷면에 새긴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김임 신도비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63호로 지정되었다. 김수문의 묘소는 논산시 노성면 호암리 신양촌에 있다.고령은 경북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대가야국의 중심지였으며,1018년(현종9)영천현으로 개편되어 경산부에 속하였고,1175년(명종5)에 감무(監務:작은 현에 중앙에서 파견한 감독관)를 두었다. 1413년(태종13)에 고양군과 영천현을 고령현으로 병합하고, 1895년(고종 32) 성주군과 현풍군의 일부를 통합해 고령군이 되었다.통계청의 인구조사에서 고령김씨는 2000년에는 4,200여가구에 13,690명이었다.고산김씨(高山金氏,황간김씨)고산김씨(高山金氏)는 황간김씨와 같이 김환(金紈)을 시조로 받든다.[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시조 김환은 김윤옥(金潤屋:자는 중소)의 아들로, 서기1515년(중종 5)에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전적(典籍:성균관의 정6품)을 역임한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산김씨는 황간김씨와 동원으로 전한다.문중인물로 김설(金卨:1595년 을미생)이 1615년(광해군 7년)에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 기위한 시험)에 3등으로 급제했다고 한다.고산은 현재의 전라북도 완주군으로 백제때는 고산현(高山縣)이었다.인구조사에 의하면 고산김씨는 1985년에는 248가구에 1,173명이었으며, 2000년에는 317가구 1,040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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