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하위메뉴 바로가기

세계 孝 중심지 향한 첫 발, 인성교육과 뿌리의식 - 孝 !World

성씨유래검색

  • 성씨

    김(金)

    문중

    김(金)

  • 유래

    성곽경영(城郭經營)의 전문가로 영남루(嶺南樓) 창건한 김주(金湊)낙안김씨(落安金氏)는 김수징(金粹澄)을 시조로 받든다.김수징(金粹澄)은 신라 경순왕의 셋째아들 김명종(金鳴鍾)의 12세손으로 알려져 있다.그는 고려 명종때 감무(監務:현감을 둘수 없는 작은 현에 중앙에서 파견한 감독관)로 있으면서 서기 1172년(명종 2)서북계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되어 낙안군(樂安君)에 봉해졌다.그래서 후손들은 김수징을 시조로 받들고 경주김씨(慶州金氏)에서 분적하여 낙안(樂安)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낙안(樂安)은 오늘날 전남 순천시 낙안면과 외서면,보성군, 벌교 일대를 지칭한다.한편 다른 문헌에는 낙안김씨(樂安金氏) 시조를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한국성씨대관(韓國姓氏大觀)에는 낙안김씨의 시조를 김광습(金光襲김수징의 아들)으로 기록하는데 낙안김씨 문중은 병인보(丙寅譜)에서 이를 해명하고 있다.문헌에 의하면 1172년(명종2)에는 서북계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1174년에는 서경유수 조위총의 난을 이의방이 축출하였고, 그 전해에는 동북면병마사(兵馬使)김보당의 난이 있었다.그리고 1176년에는 공주에서 망이.망소이의 난(현재의 대전시 서구 탄방동 지역),이듬해는 조위총의 잔당이 소란을 피웠고 1178년에는 서북지방의 반란군이 곡주(谷州) 등지를 공략하였으나,박제검이 이를 평정했으며 1179년에는 정중부가 경대승에 의해 살해당하였다.이처럼 명종 27년간 난이 많이 발생하여 시조의 활약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낙안김씨세보(樂安金氏世譜) 치사(致辭)에는 서기1172년(명종2) "정난공신봉낙안군수징(靖難功臣封樂安君粹澄)"이라는 구절이 있어,낙안김씨의 시조는 김수징으로 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낙안김씨는 고성김씨(固城金氏)와의 선계(先系) 확인문제라고 한다.<병인보> 서문에 의하면 김상택(金相宅)이라는 인물이 시조 김수징이하 12대를 고성으로 본관을 바꾸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양 문중의 송사사건이 되어 있는데 선계확인소송은 조선시대에서 비롯되어 지금까지 이어진다고 한다.낙안김씨 파(派)는 함평파(咸平派).부안파(扶安派).흥덕파(興德派).영동파(永同派).용담파(龍潭派).무주파(茂朱派).원당파(元塘派).보성파(寶城派).여주파(驪州派).양주파(楊州派).서울파가 있다.시조의 묘는 실전(失傳:대대로 내려온 고적이나,묘지등을 알수 없게 됨)되었으나,전북 고창군 성내면 당덕리에 "낙흥단'을 세우고 음력 2월13일 향사(제사) 한다.낙안김씨는 조선시대에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4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1명,역과(譯科:중국어.몽고어.여진어.일본어에 능통한사람을 역관으로 뽑기 위해 보던 과거)에 11명,의과에 9명,음양과(陰陽科:잡과의 하나로 천문.지리.명과학(命課學)에 밝은 사람을 뽑던과거)에 14명,율과(律科: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던 과거)에 8명,주학에 34명 등 81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인구조사에 의하면 낙안김씨는 2000년에는 총 1,070여가구에 3,470여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목록
만족도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

자료관리 담당부서 : 효문화마을관리원 > 뿌리공원과 > 뿌리공원담당 연락처 : 042-288-8312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