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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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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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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금씨는 금용식(琴容式)을 원시조(도시조)로 받든다. 도시조 금용식은 기자(箕子)와 함께 우리나라에 온 금응(琴應)의 후손으로, 고려초에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태사(太師:정1품)에 올랐다.그러나 금응(琴應)으로부터 금용식까지의 세계(世系)를 고증할 수가 없고, 금용식으로부터 8대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대대로 내려온 묘지나 사적을 알수없게 됨)되어,금의(琴儀,시호 영렬)를 1세조(사실상 시조)로 받들고 있다. 금의는 1153년(의종7)에 태어났으며,1184년(명종14)에 갑과에 급제하고,수찬관(修撰官춘추관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으로 정원은 8명이며,시정(時政)을 기록하는 일을 맡았음)을 거쳐,명종.신종.강종.고종 등 4대를 섬긴 명신(名臣)으로,특히 문장이 뛰어나 금학사(琴學士)라는 별칭을 가졌다.그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종2품 품계)로,고종2년에 정당문학(政堂文學종2품),고종5년 문하시랑(門下侍郞:정4품차관),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국왕을 시종하고 문서를 관리하며 경전을 강론하는 관청의 종2품),수국사(修國史:고려때 사관.감수국사는 시중이 겸임함)를 제수(除授:추천을 받지않고 임금이 벼슬을 내림)받았다.이어 수태위(守太尉).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정2품부총리)가 되었다가,수태보.동중서평장사.판이부사(守太保.同中書平章事.判吏部事)에 오르고, 내치와 외교에 큰 역할을 한 당대의 명신(名臣)이었다.참고-<수태보-고려때 왕자.부마 등의 종실과 공신.고위관원에게 내린 벼슬로 태사.태부와 함께 3사의 정1품,동중서문하시랑평장사-송나라의 직제이나 고려때는 중서성과 문하성의 두 평장사를 겸임하는 재상.판이부사-상서이부의 으뜸벼슬로 재신이 겸임함.문하시랑은 정4품 차관>68세때 늙음을 이유로 치사(致仕: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를 청하자,벽상공신(壁上功臣:신흥사 공신당에 초상을 그려진 사람)에 책록하고 물러가게 했는데, 거문고와 바둑을 즐기다 1230년(고종17) 1월27일 78세로 세상을 떠났다.왕은 부음을 듣고 슬픔이 심하여 유사에게 명하여 상례를 치르게 하고 영렬(英烈)로 시호를 내렸다.(고려사 22권)금씨는 우리나라 성씨(姓氏) 중 유일하게 수양(修養)과 도야(陶冶)를 뜻하는 악기 이름을 성으로 삼은 성씨다. 금의는 금씨 성을 쓰는 인물 중 우리나라 역사와 문헌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물이다.고려사(高麗史)열전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금의(琴儀)의 자는 절지(節之),초명은 극의(克儀)로 봉화현인(奉化縣人)이나 후에 왕이 김포에 적(籍)을 내렸다.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용식(琴容式)의 후예다. 생김새가 기이하고 재기와 도량이 컸다.과거 급제전에 청도(淸道)의 감무(監務:작은 현에 파견한 감독관)가 되었는데, 강직하여 굽히지 않으니, 백성들이 가리켜 철태수(鐵太守)라 했다" 금의는 1184년(명종14)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들었다.최충헌(崔忠獻)의 신임을 얻어 요직을 두루거쳤다고 하며,강종(康宗)이 즉위했을때 금(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책명할 때,금나라 사신이 궁궐 정문으로 들어오고자 하자,조정에서는 이를 용납할 수 없다고 서로 힐난했다.왕이 금의(琴儀)에게 명하여 금나라 사신을 설득케 했다.금의(琴儀)가 금나라 사신에게 "만약 그대 나라의 황제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어느 문으로 들어갈 것인가"하고 물었다.금나라 사신은 '황제의 출입은 정문(正門)이 아니고 어느 문이겠느냐'고 대답했다.이 말을 받아 금의(琴儀)가 "그렇다면 정문은 천자의 출입문인데,감히 신하가 되어 정문으로 들어옴이 옳겠는가"하자, 금나라 사신이 주장을 굽히고 서문으로 들어왔다.한림별곡(翰林別曲)의 금학사(琴學士)라 일컫는 이가 바로 금의(琴儀)琴學士의 玉 門生 琴學士의 玉 門生위 날조차 몃 부니잇고.금학사가 배출한 뛰어난 문하생들, 금학사가 배출한 뛰어난 문하생들아, 나까지 몇 분입니까.이는 13세기 초(고려 고종) 한림원의 여러 유생들이 지었다고 전하는, 총 8장으로 되어 있는 최초의 경기체가 한림별곡(翰林別曲) 제1장 후소절(後小節)부분이다. 여기의 금학사(琴學士)는 금의(琴儀)를 가리킨다. 그는 지공거(과거시험관)를 지내면서 많은 급제자를 배출하여,최자(崔滋)를 비롯한 뛰어난 문생(門生)들을 두었던 것이다. <금학사의 옥순문생>이라는 말은 "학사 금의가 배출한 죽순처럼 많은 훌륭한 문하생"이라는 뜻이다.금의(琴儀)의 비문은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가 지었다. 비문 중에 바둑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우리나라 국기사(國棋史)에 최초의 비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묘소는 후대에 실전(失傳:대대로 내려오던 묘를 알수없게 됨)되었는데,후손들은 문헌기록을 토대로 묘를 경기도 김포군 장릉(章陵) 경내로 추정하고, 근래 발굴작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중시조 금의(琴儀)의 큰 아들 금기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호부의 정6품),둘째 금규는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공부의 정6품),넷째 금휘는 좌.우위대장군(左右衛大將軍:고려때 종3품)에 올랐으며,다섯째 금희는 합문지후(閤門祗候:국가의 조례,의례등을 맡아보던 합문 소속의 벼슬로 문종때는 정7품,충렬왕때는 종6품)를 지내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넷째아들 금휘(琴暉)는 대장군(大將軍종3품)때 최우(崔瑀)가 폐위시킨 희종(熙宗)을 다시 왕으로 모시려고,노지정(盧之正).김희제 등 뜻을 같이하는 무인(武人)들과 모의하다 누설돼 최우(崔瑀)에 의해 죽었다 한다.이어 원종때 합문부사(閤門副使:제사.조하등에 관한 의식을 맡아보던 관아의 벼슬)를 지내고,삼별초의 난때 왕명으로 원에 들어가 원병을 요청한 금훈(琴熏)도 금씨(琴氏)이다.금훈(琴薰)은 삼별초(三別抄)의 난(亂)때 초유사(招諭使:난리가 나면 백성을 초유하는 일을 맡아보던 임시벼슬)로 임명되어,반군에게 항복을 권하는 초유문(招諭文)을 가지고 제주로 가다,풍랑을 만나 추자도(楸子島)에 표박했으나 돌아와 정세를 알렸으며,벼슬은 공부시랑(工部侍郞:정4품 차관).경상도안찰사(按察使각 도(道)를 다스리던 지방장관으로 보통 감사(監司)라 하고 방백(方伯).도백(道伯)이라 함)에 이르렀다.금씨(琴氏)는 조선시대에는 이성계와 통혼하여,가문(家門)의 도약을 위한 계기를 마련했으나,왕자의 난에 휘말려 곤경에 처한후 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학문에만 정진해 왔다고 한다.금의(琴儀)의 후손 금인배가 태조의 넷째아들 회안대군 방간을 사위로 삼아 국혼(國婚)을 하였으나, '제1차 왕자의 난'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박 포의 밀고를 받은 방간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방원에게 패하여 귀양가게 되자, 처족인 금씨도 이의 영향으로 빛을보지 못했다 한다.조선시대에 처음 벼슬길에 오른 금유(琴柔)는 태조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성균관 대사성(大司成:정3품)에 오른 청백리로 유명하다.그는 성품이 청렴결백해서,호남지역을 안찰(按察)할때 탐학한 수령들은 스스로 관직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한다.또 그의 아들 금이영(琴以詠)은 세종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사인(舍人:의정부의 정4품)을 지냈는데,김종직(金宗直)이 그에게 보내는 시(詩) 에 "선생의 재주는 옛 사람도 비견하지 못한다"고 할 만큼 시문(詩文)에 뛰어났다고 한다.또한 금곤과 금숭형제는 금숙(琴淑)의 아들로,문종때 형제가 동시에 과거에 급제하는 영광을 누렸다.경북 봉화군 명호면 고감리1168번지에는 군위공(軍威公)금계(琴啓,1439~1497)종택이 있다.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고려 초기에 봉화금씨 영렬공(英烈公) 금의(琴儀)가 이곳에 내려와 터전을 잡고 건축하여, 이후 수차례 증개축을 하였다고 전한다.군위공은 탁행(卓行:매우 뛰어난 행실)으로 천거되어,군위현감(종6품수령)으로 선정을 베풀었으며,부모의 병환이 있자 효정에서 약을 달여 완치하였고,친상을 당하자 묘옆에 여막을 짓고, 3년간 소금과 죽으로 살면서 슬퍼하자 세상에서 그를 효자라 칭하고, 효를 이야기하려면 금모를 본받으라 했다.종택은 산골마을의 깊숙한 곳에 야산을 배경으로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종택 입구 좌측에 영렬공이 심었다는 괘화나무의 자손목 3그루가 있고, 봉화에서 가장 오래된 효정(孝井)이라 불리는 우물이 원형그대로 있다. 이 우물은 처음 집터를 잡은 때 부터 사용하던 것이라 하며 원래는 가옥 내에 있어 뜰샘이라 불렀다 한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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