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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제학(大提學:문형) 3명,문과(文科)급제자 86명정승 이세백과 양관대제학 영의정 지낸 이의현 부자(父子) 정승용인이씨(容仁李氏)가 시조로 받드는 이길권(李吉卷)은 고려시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940년 신흥사를 중수할때 그곳의 공신당 동.서벽에 초상이 그려진 공신을 벽상공신이라 함)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 품계)에 올라 태사(太師,태사는 3공(태사 태부.태보)의 정1품으로 3공중 가장 윗서열)를 지냈다.시조 이길권은 신라말 경기도 용인지방의 토호였다고 하며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공을 세웠다. 훗날 현재의 용인지명인 산성군(君)에 봉해졌기에 후손들이 용인(龍仁)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용인이씨(龍仁李氏)는 고려시대에 큰 인맥을 형성하였는데, 덕종때 이효공(李孝恭).인종때 문하시랑(門下侍郞:정4품 차관)을 지낸 이현후(李鉉候).이광시(李光時)는 충숙왕때 평장사(平章事정2품 부총리)에 이르렀으며,판도판서(版圖判書:호부상서로 바뀐 정3품장관) 이광봉(李光逢)은 충숙왕때 문하평리(評理:참지정사가 바뀐것으로 종2품)를 지냈으며, 이중인(李中仁)은 충정왕때 문하우시랑(門下右侍郞:정4품차관)을 지내는 등 이들은 고려때의 대표적 인물들이다.이광시(李光時)는 곧은 성품으로 충렬왕(忠烈王)이 몽고복장을 채택 장려하는 것을 극간(極諫)하다 유배되는 등 3차례에 걸쳐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바른 말을 서슴치 않았다.이중인(李中仁)은 이성계일파의 정변으로 정국이 혼란해지자 벼슬을 버렸고,조선개국 후에는 머리를 풀고 산에 들어가 은둔했던 절신(節臣)이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한 때 정과(鄭過)등 고려조의 8판서(八判書)와 함께 성거산(聖居山)에 들어가 분신자결을 하려다, 자손들의 만류로 그만두고 은거하여 세상을 마쳤다.그는 자손들에게 "이씨(李氏) 왕조(王朝) 밑에서는 벼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유언까지 남겼다.절신(節臣,절의지킨 사람) 이중인은 1315년(충숙왕2)송경 일청재에서 태어났다.그가 태어날때 기이하게도 이조은.안우기 라는 사람이 다같이 일청재에 둥근해가 걸려있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중인이 장성함에 따라 용모가 단정하고 심지가 확고하여 이백겸이라는 사람이 말하길 "그대의 흉중에는 진나라와 초나라와 같은 강함이 있다"라고 칭송하였다.그때부터 호를 '진초'라 하였다.그는 충선왕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여러벼슬을 거쳐 상서성 상서(尙書省尙書정3품장관),중서문하평장사(平章事:정2품 부총리)에 이르렀다.충정왕때는 '동덕찬화 보리공신'과 '구성부원군'의 봉호를 받았으며,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정1품)으로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종1품 정승)에 올랐다. 시호는 충숙이다. 조선조에 이르러 태조 이성계가 다시 '구성백'을 봉하였으나,이중인은 이를 받지 않고,불사이군(不事二君:한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함)으로 두문불출하다 세상을 떠났다.그때 세상사람들이 그를 칭송하는 시(詩)에 "쓸쓸하고 고요한 두문동에는 외로운 충성만이 해와 별과 같이 빛나고 벼슬을 마다 하고 절개를 지키니 천추에 그 방명을 드리었네" 라고 하였다.부인은 군부인(郡夫人:1품 벼슬의 아내에게 내리던 봉작) 천안전씨로 대제학(大提學:정2품문형)을 지낸 문효공 전 신의 딸이다.이중인(李中仁)은 용인이씨(龍仁李氏)의 중시조(中始祖)로 그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龍仁市) 기흥구(器興區) 영덕리(靈德里) 속칭 잔다리에 있으며,용인(龍仁)의 3대 명당중 하나로 꼽히며,후손들은 매년 시제(時祭)를 받든다.용인이씨 문중에서 그를 중시조로 받드는 것은, 시조로부터의 선대 산소들이 모두 실전(失傳:대대로 이어온 묘소나 사적을 알수없게 됨)된데다, 그의 후손이 가장 번성한 때문이다.고려말 형조전서(刑曹典書정3품 법무장관)를 지낸 그의 장남 이사영(李士穎)은 이성계(李成桂)일파에 몰려 목은(牧隱) 이색(李穡) 등이 유배될 때 남원(南原)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숨졌다. 그의 아들까지 이중인(李中仁)의 직계로 3대(代)가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그러나 이중인(李中仁)의 둘째아들 이사위(李士渭)는 아버지의 유언과는 달리 고려조에 관찰사(종2품도지사) 등 벼슬을 하고 조선조에도 벼슬에 나가 개성유수(開城留守2품 지방장관)를 지냈다. 왕조가 바뀌는 역사의 전환기에 형제가 걷는 길은 서로 달랐다.이사위(李士渭)가 아버지 이중인(李中仁)의 뜻인 불사이군(不事二君:한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지아니함)을 어길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용인이씨(龍仁李氏) 족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조선개국 후 이성계는 민심수습과 정국안정을 위해 인재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신들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등을 돌렸다. 때문에 유신들에 대한 회유와 탄압은 날로 심했다. 탄압에 견디지 못한 유신들은 자신들의 보신(保身)을 걱정하다가 이사위(李士渭)를 대표로 내세워 벼슬길에 나가도록 종용했다. 그는 선친의 뜻을 따르지 못한 것을 못내 한스럽게 여기면서도 이같은 동료들의 처지와 개성백성(開城百姓)들의 신망을 저버릴 수 없어 벼슬길에 나가 오래도록 그 자리를 맡았다…"용인이씨(龍仁李氏)는 조선조에 상신(相臣:정승) 3명,대제학(大提學:예문관.홍문관의 정2품문형) 3명,청백리(淸白吏:2품 이상의 당상관과 사헌부.사간원의 수직(首職)들이 추천하여 뽑던 청렴한 벼슬로 조선때 총 217명) 1명,판서(判書:정2품 장관) 15명 그리고 문과급제자 85명을 배출했다.용인이씨는 3품 이상의 인물이 2백 50여명에 달한다.또한 한 집안에서 부자(父子) 정승(이세백(李世白).이의현(李宜顯))과 3상4판(三相四判)(삼상三相-이세백(李世白).이의현(李宜顯).이재협(李在協) 4판四判-이보혁(李普赫).이경호(李景祜).이중호(李重祜).이재간(李在簡)등을 배출했고, 6판서(六判書)집(이숭호.이재학(李在學).이규현(李奎鉉).이삼현(李參鉉).이원명(李源命).이돈상(李敦相)과 8대에 걸쳐,14명이 정경부인(貞敬夫人:1품 벼슬 부인의 봉작)이 된집도 있다.이들 모두가 대사간(大司諫:왕에게 간하던 사간원의 정3품)을 지낸 이사경(李士慶)의 후손들이라고 한다.용인이씨(龍仁李氏) 여러 파(派)중에서 가장 수가 많고, 융성을 누리기는 16세 이백지(李伯持)의 아들 5형제중, 큰 아들인 이수강(李守綱)의 후손인 부사공파(府使公派)로 자손의 수와 벼슬한 수가 용인이씨(龍仁李氏) 절반이상이다.이백지(李伯持)는 태종때 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를 지냈고, 청백리(淸白吏) 이행검(李行儉)과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병마를 지휘하던 종2품무관) 이담(李湛),선조때의 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 이덕회(李德恢),남원판관(南原判官:종5품)을 지낸 이일(李鎰),광해군때 무용대장(武勇大將) 이사경(李士慶)등은 조선 초기 용인이씨(龍仁李氏)의 인물들이다.그중 이행검(李行儉)은 1453년(단종 원년)에 일어난 이징옥(李澄玉)의 난(亂) 당시 함경도 진무(鎭撫:바다의 방위맡은 군영,또는 조선전기 의흥친위군.오위등의 무관벼슬)로 있으면서,그를 계략으로 종성(鐘城)에 머물게 한 뒤 진압한 공으로 1등 공신에 책록되기도 했다.이담(李湛)은 의학.천문.산수에 능했던 성리학자로, 1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나 소학(小學)을 배울 때 "과부의 아들에게 특이한 행실이 없거든 사귀지 말라"는 구절에 크게 충격을 받아, 그때부터 밤낮없이 면학에 힘썼다고 전한다.그는 1547년(명종3년) 정미사화(丁未士禍1546년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 형제의 권력 싸움 끝에 윤원로가 유배되어 사사(賜死)된 데 이어, 1547년에는 괴벽서사건(怪壁書事件)으로 다시 많은 사림(士林)이 화를 입었다. 이 해 9월 부제학(副提學:홍문관 정3품) 정언각(鄭彦慤)과 선전관(선전관청의 3품에서 9품) 이로가 경기도 과천 양재역(良才驛) 벽 위에서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李 ) 등이 권세를 농락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는가’라는 내용의 벽서를 발견했다. 이 벽서는 임금에게 보고되었고 섭정을 하던문정왕후는 명종에게 지시하여 윤임의 일파를 숙청하게 함)에 화를 입어, 양산(梁山)으로 귀양갔다 풀려나기도 했는데, 귀양가면서도 어찌나 태연한지 금부도사(禁府都事:죄인을 추국하던 의금부의 종5품)조차 감탄했으며, 유배(流配)에서 풀려나 많은 하객들이 찾아와 축하하는데도 조금도 기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아, 도리어 하객이 문안했을 만큼 성품이 신중 침착했다 한다.이일(李鎰)은 임진왜란당시 순변사(巡邊使조선때 변방의 군사와 정무를 돌아보고 조사하기 위해 임금의 명을 받아 파견된 특사)로 개전초(開戰初) 상주(尙州)에서 왜군(倭軍)에 중과부적으로 패했으나, 뒷날 평안병사(平安兵使:병마를 지휘하던 종2품무관)로 평양수복전에 선봉으로 공을 세운 명장(名將)이었다.일찍이 이충무공(李忠武公)이 함경도 조산만호(造山萬戶:종4품)로 있을때 자칫 누명을 쓰고 중벌을 받게 된 것을,나서서 벌을 면하게 한 인연도 있다. 뒷날 이충무공이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가 되어 나라를 구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역할이 있었던 셈이다.광해군때 대사간(大司諫왕에게 간하던 일을 맡아하던 사간원의 정3품)이었던 이사경(李士慶)은 당시 세력을 장악했던 대북파(大北派)에 아부하지 않고, 직간(直諫)을 계속하다 대북(大北)의 탄핵으로 사임하기도 했던 강직한 인물이다.그는 당시 대북파(大北派)의 영수 이이첨(李爾瞻)과 척분간이었으나, 조금도 아부하거나 굴하는 일이 없이 정도(正道)와 청렴으로 일관하여 <난세의 완인(完人)>이란 칭송과 존경을 받았다.좌의정(左議政:정1품 정승) 이세백(李世白)은 조선조에서 용인이씨(龍仁李氏)가 배출한 최초의 정승이었으며, 영조때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을 지낸 이의현(李宜顯)은 그의 아들이다.숙종말년에 예조판서(判書:정2품장관)가 되었다가,1721년(경종1) 신임사화(申壬士禍:조선 경종 원년(1721)부터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일어난 사화)로 노론4대신(老論四大臣)인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이명(李 命).조태채(趙泰采)가 숙청될때 운산(雲山)에 3년간 유배되었으며,후일 영조(英祖)즉위 후 양관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정1품 정승)에 올랐으나,1727년(영조3) 정미환국(丁未換局영조 3년(1727) 정미년에 당쟁을 조정하려고 정부의 인사를 개편한 일로 노론,소론을 막론하고 논의가 강경한 자를 제거하고 골고루 등용하였으나,노론이 중요한 직책을 차지하게 되어 당쟁을 조정하는데 미흡)으로 다시 추방되는 시련을 겪었다.영조8년 사은사(謝恩使:나라에 호의를 베풀었을때 중국에 보내던 사신)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고 3년뒤에 영의정에 오르니 바로 <부자정승(父子政丞)>이다.이세백(李世白)의 증손 이보혁(李普赫)은 영조때 성주목사(星州牧使정3품수령)로 있으면서 1728년(영조 4)이인좌난(李麟佐亂)을 토평에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3등과 인평군(仁平君)에 봉군되었다가, 영조 24년에 부총관(副摠官:오위도총부의 종2품),영조 29년 한성판윤(漢城判尹정2품 서울특별시장)에 이어 공조판서(工曹判書정2품 장관)를 지냈다.이경호(李景祜)는 영조때 호조.예조.병조의 판서와 정조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중호(李重祜)등 형제는 그의 아들들이고, 정조 때 영의정(정1품정승)을 지낸 이재협(李在協)은 이보혁(李普赫)의 손자이며, 이중호(李重祜)의 아들이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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