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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평김씨(海平金氏)는 김훤술(金萱述,시호는 장열)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문헌에 따르면 시조 김훤술은 왕건을 도와 고려창업에 공을 세우고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정치를 총찰하고 서정을 총리하던 종1품 정승)에 올라 해평군(海平君)에 봉해졌기에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해평(海平)으로 하게 되었다.그러나 해평김씨(海平金氏)는 시조 김훤술에서부터 누대(累代)에 걸쳐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묘지나 고적을 대대로 이어온 사실을 알 수없게 됨)되어 고려 때 전직(殿直)을 지낸 김태(金兌)를 1세조로 받들며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해평의 문리(文里)에 터를 잡고 길씨(吉氏)가문과 쌍벽을 이루었던 해평김씨(海平金氏)는 김훤술의 후손 김영발(金英發)이 길구(吉久)와 함께 향교를 설립하고 많은 학자를 배출시켜 명성을 떨쳤다.김태(金兌)의 9세손 김수(金銖)는 고려말에 문과(文科대과)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고 대사간(大司諫:왕에게 간하던 일을 맡아하던 사간원의 정3품).직제학(直提學:정3품).개성부윤(府尹:종2품지방장관) 등의 요직을 지냈으며 공민왕때 침입한 홍건적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워 해평군(海平君)에 봉해지고, 조선이 개국되자 예조판서(禮曹判書:정2품 장관)에 이르렀다. 특히 그는 대제학(大提學:고려때는 보문각 등의 종2품문형)을 지낸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과 친교를 맺고 도의를 논하며 후진양성에 힘을 썼고 1624년(인조 2)에 진사(進士)로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한 김주(金輳)는 병조정랑(兵曹正郞:정5품 전랑)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또한 성종때 별시문과(別試文科:나라에 경사가 있을때나 병년(丙年)마다 보이던 과거)에 오른 김맹성(金孟性)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유일(遺逸)로 벼슬에 천거되어 정언(正言:사간원의 정6품)을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郞:정5품 전랑)이 되었으며 학행으로 명성을 날려 해평김씨의 가통을 이었다.해평김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6명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4명 등 10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인물탐구김종직(金宗直:1431~1492.호는 점필재,본관은 선산)조선전기의 문신.성리학자로 사림의 영수이자 영남학파의 종조이다. 김종직은 도승지(都承旨승정원 정3품 왕의 비서실장),공조참판(工曹參判:종2품 차관),형조판서(刑曹判書:정2품 법무장관),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2품)를 역임하였으며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이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戊午士禍.史禍:1498년(연산군 4)에 류자광등의 훈구파가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에 대해 일으킨 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며 김일손 등 수 많은 제자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경북 구미시 해평(海平)은 940년(태조 23)에 해평군으로 개편되었고, 후에 복주(안동)가 관할하였으며,1018년(현종9)에는 상주로 이속되었다가,1415년(태종5)에 해평현으로 된 후 선산군으로 폐합되었다.1978년 구미시로 승격하였고,1995년 구미시와 선산군이 통합되어 구미시 해평면이 되었다. 해평김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1,449가구에 4,643명이었다.해풍김씨(海豊金氏:덕수.정주김씨)1829년(순조29년)남양쌍부파 19세손 김 영(金煐)이 풍덕 왼쪽 울릉동에서 실전되었던시조 김숭선의 묘 지석(誌石) 찾아해풍김씨(海豊金氏)의 관향인 해풍(海豊)은 현재의 경기도 개풍으로 북한에 위치하고 있다.해풍은 고려때는 1018년(8대 현종 9)에 개성현 11대왕 문종(文宗)17년(1063)에 개성부에 속하였으며 16대왕 예종(睿宗)3년(1108)에 승천부(昇天府)로 개칭하고 26대왕 충선왕(忠宣王) 2년(1310년)에는 해풍군(海豊郡)으로 개칭되었다.해풍김씨(海豊金氏)의 시조는 김숭선(金崇善)으로 그는 고려 공민왕때 예부상서(禮部尙書:정3품 장관)로 있으면서 친원(親元)에서 친명(親明)으로 바뀌는 배몽시기(排蒙時期:1362~1368)때 국가 정책을 바꾸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그 공훈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종2품 문관 품계)로 예부상서(禮部尙書:정3품 장관)를 지내고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작(封爵)되면서 후손들이 본관을 해풍김씨(海 金氏)로 하게 되었다.시조 김숭선의 아들 김천일(金天一)은 고려조에서 지후(祗侯:국가의 의식을 맡아보던 7품)벼슬을 지냈으며,손자인 김대(金岱)는 고려조에서 문과(文科:대과)에 장원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시랑(侍郞:고려 6부의 정4품 차관)에 올랐으며, 조정의 최고의결기관인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서 왕의 조칙(詔勅)을 받들어 심사하는 평장사(平章事:정2품 부총리)에 이르렀다.일찍이 고려의 도성(都城)인 개경(開京)을 중심으로 하는 경기지방에서 무반(武班)의 지위를 굳혀 온 해풍김씨(海豊金氏)는 시조의 증손 김재인(金在人:감무 역임)도 고려조에서 명성을 떨쳤고,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2품검찰총장) 김장(金樟)의 맏아들 김수종(金壽宗)은 무과(武科)에 급제하고,길주목사(吉州牧使정3품수령)겸 길주진관 병마첨절제사(吉州鎭管兵馬僉節制使종3품무관)를 역임하여 가통(家統)을 이었다.한편 효행(孝行)이 뛰어나 <절효처사(節孝處士)>로 이름났던 김시창(金始昌)은 [삼강록(三綱錄)]에 올랐고, 황간(黃澗)의 모현서원(慕賢書院)과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에 배향되었으며, 김영(金煐)은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형조판서(刑曹判書정3품법무장관)를 거쳐,금위대장(禁衛大將:금위영의 종2품 무관직)에 올랐다. 숙종과 영조때의 문신(文臣)인 김미호(金渼湖),김원행(金元行)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김상진(金相進)은 학행(學行)으로 이름을 날렸으며,김건(金鍵)은 철종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1868년(고종5) 정헌대부(正憲大夫:정2품품계)로 형조판서(刑曹判書:정2품국방장관)에 올라 어영대장(御營大將 :어영청의 종2품)을 겸임하였다.한말에는 김연방(金然昉)이 왜적에 항거하여 3·1운동에 앞장섰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여 충절(忠節)의 무신(武臣) 집안인 해풍김씨를 더욱 빛냈다.시조의 묘는 고려 개성의 왕성밖 남쪽 15리에 위치한 개풍군 상도면 대능리 궁동(宮洞)에 있다고 세보(世譜)에 기록되어 있으나, 계대(系代)와 행적(行蹟)을 상고할 만한 문헌이 여러 번의 병화로 실전(失傳:대대로 전해온 묘지나 고적을 알 수 없게 됨)되고 묘(墓) 역시 실전(失傳)되어 알지 못하다가,1829년(순조 29)봄 남양쌍부파(南陽雙阜派) 19세손 형조판서(刑曹判書:정2품 법무장관) 김영(金煐)이 풍덕 왼쪽 울릉동(蔚陵洞)에서 시조 김숭선의 묘를 찾게 되었다.해풍김씨 대종회(海豊金氏大宗會)의 기록에 따르면 형조판서 김영(金煐)은 "지명이 능동이라 하거늘 이를 기이하게 여겨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서 물으니 마을사람들이 이 산위에 큰 무덤 셋을 가리키며 이것이 고려조의 해풍부원군 묘"라 이르기에 묘를 파보니 맨 윗 무덤에서 해(海)자 김(金)자 숭(崇)자 세 글자의 지석(誌石:지문을 적어 무덤 앞에 묻는 돌이나 도판.벼슬이나 행적등을 기록함)을 찾았으며 다른 글자는 깨지고 부서져서 자획(字劃)을 알수가 없었고 아래에 있던 두 무덤은 믿을 만한 근거가 없었다고 한다.형조판서 김영(金煐)은 경향 각지의 종친에게 통보하여 재물을 모아 봉분(封墳)을 다시 쌓고 김영(金煐)이 직접 비문을 지었으며 다음해인 1831년 봄 비석과 상석 등 석물을 갖추어 춘추제향(春秋祭享)을 받들어 왔으며 고종10년(1873)에는 황간금산파 21세손 김석(金奭)이 비문을 다시 짓고 남양쌍부파 22세손 김태욱(金泰郁)이 비문을 써서 묘비를 크게 개립(改立)하였다. 1950년 6.25동란 이전까지는 개성 시조의 묘소에서 시제를 봉행하였으나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로는 해풍김씨 대종회에서 본래의 시제일인 음10월5일 앞 일요일을 택하여 남한땅에서 시제를 봉행하고 있으며,1991년 시조의 영정(影幀)을 고증에 의하여 영상(影像)하고 대종회 사무실 상좌에 영정각(影幀閣)을 짓고 봉안하고 있고, 화성시 우정면 화산리에 소재하는 남양쌍부파 묘당(廟堂)에 영정사진을 봉안하고 이곳에서 시제를 지내고 있다.한편 해풍김씨 후손 중에 8세손 김수연(金壽延)계 후손은 덕수김씨(德水金氏)로,10세손 김수(金守)계 후손은 정주김씨(貞州金氏)로 분적하였는데, 이는 고려 공민왕23년(1374) 친원파인 이인임(李仁任) 일파가 10세의 우(禑)을 왕위에 올려 놓고 북원의 연호인 선광(宣光)을 쓰면서부터 친명파였던 해풍김씨(海豊金氏)는 정란(政亂)을 피하여 고향을 떠나 흩어져 살게 되었고 종친간에 연락이 두절된 상태로 몇백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후대에 와서 해풍군의 별호인 정주,덕수를 따서 관향(貫鄕) 위주(爲主)로 본관을 정하게 되었다고 한다.그러다 1791년(정조15년)에 17세손 김광악(金光岳)이 제1차보인 신해보(辛亥譜)를 편찬할 때 본관을 달리하고 있으나 시조는 해풍부원군 숭선공이므로 동원종문(同源宗門)임이 확인되어 서기 1865년 제3차보인 을축보(乙丑譜)수찬시에는 풍덕수운 김평(金枰)계, 남양쌍부 김장(金樟)계, 덕수(구야교) 김수연(金壽延)계, 정주(구돈암) 김수(金守)계, 황간금산 김효신(金孝信)계, 평양 김체경(金逮慶)계, 안변 김재(金載)계 등 전국 각파에서 수단에 참가하여 <해풍김씨세보>에 등재되었다.서기 1983년 해풍김씨대종회는 해풍김씨, 덕수김씨, 정주김씨 대표가 모여 본관을 달리 호칭하고 있으나 숭선공을 시조로 받드는 동조동근(同祖同根)임을 재확인하고 제3차 보명(譜名)을 해풍(덕수,정주)김씨세보(金氏世譜)로 하여 합보(合譜)를 간행하였으며, 시조 김숭선(金崇善) 후손들은 해풍김씨대종회(海 金氏大宗會)를 중심으로 대동단결하고 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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