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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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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육신 박팽년과 5형제 그리고 박 비 중종반정의 주역 박원종 과거에 134명순천박씨(順天朴氏)는 신라 경명왕의 일곱째 아들인 강남대군(江南大君) 박언지의 아들로 알려진 박영규(朴英規)를 1세조로 받들어 왔다.그러나 박영규 이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대대로 이어온 묘나 사적을 알수없게 됨)되어 문중에서는 충숙왕때의 박숙정을 1세조로 받들고있다.고려사(高麗史)에는 "박영규가 승주(昇州:순천의 옛 지명)사람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박영규(朴英規)는 후백제 견훤의 사위로 처음에는 견훤의 막하에 있었다.그러나 견훤의 아들인 신검이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킨후 견훤이 고려로 투항하자 박영규(朴英規)는 아내에게 말하기를 "대왕이 40여년 동안 고초를 겪으며 공업(功業)을 이루었으나 일조에 집안의 화(禍)로 인하여 서실 곳을 잃고 고려로 투항을 하였습니다. 곧은 여인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군왕을 놔두고 적(賊)을 섬기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義士)를 볼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고려왕은 인후(仁厚)하고 근검(勤儉)하여 민심을 얻고 있으니 이것은 하늘이 계도한 것이므로 삼한의 임금이 될 것이니 어찌 우리 왕에게 위안서신과 고려왕에게 은근한 뜻을 전하여 장래의 복(福)을 시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자, 그의 아내는"당신의 말은 나의 뜻이옵니다"라고 하였다.드디어 고려 태조 19년 2월에 박영규는 사람을 보내 서신(書信)을 전하고 또"만일 의병(義兵)이 일어나면 내부에서 호응하여 왕의 병사를 맞이하겠습니다"고 하자, 태조 왕건은 크게 기뻐하며 그 사자(使者)에게 하사품(下賜品)을 후하게 주어 박영규(朴英規)에게 돌아가 말하기를"만일 당의 은혜를 입어 우리 병사가 가는 길에 아무 탈이 없으면 먼저 장군을 뵈옵고 또 마루로 올라가 부인에게 절을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형(兄)으로 받들고 부인을 누나로 존경하여 반듯이 후한 보답을 하겠습니다. 천지귀신들도 모두 이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그 후 9월에 태조는 신검(神劍)을 정벌하여 후백제를 정복한 후 박영규(朴英規)에게 말하기를"견훤이 나라를 잃고 멀리 온 후 그 신하 중에서 한 사람도 위로를 한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경(卿)의 부부만 천리 길에 소식을 전하여 성의를 보이고 또 과인에게도 서신을 전하였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좌승(左丞:종1품 정승)을 제수한 후 밭 일천경(一千頃:300만평)과 역마 35필을 하사하고 그 가족을 맞이하였으며 두 아들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참고문헌- <고려사-고려사는 김종서.정인지(鄭麟趾).이선제(李先薺).정창손(鄭昌孫) 등이 1449년부터 개찬에 착수하여, 1451년에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표(表) 2권, 열전(列傳) 50권,목록(目錄) 2권의 기전체(紀傳體)의 정사(正史)>.<순천박씨종친회>박영규는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격할 때 부인 견씨와 함께 왕건을 도와 고려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이어 삼중대광(三重大匡:고려 때 정1품 문관의 품계)으로 좌승(左丞:좌정승.종1품)에 올라 승주군(昇州君:승주는 순천의 옛이름)에 봉해졌다.박영규는 왕건과 사돈을 맺어 자신의 큰 딸은 왕건의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이 되었다.박영규의 후손인 박난봉(朴蘭鳳)이 고려시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정승을 역임하고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평양은 순천의 옛 지명)에 봉해져 그를 득관조로 하였고 고려 충숙왕 때 보문각 대제학(寶文閣 大提學:보문각은 고려때 경연과 장서를 맡아보던 관아 대제학은 그곳의 2품문형)을 지낸 박숙정을 1세조로 받들며 본관을 순천(順天)으로 하였다.순천박씨(順川朴氏)의 인물을 보면 사육신의 한사람인 박팽년(朴彭年).박중림.박계창.박원종.박기정 등이 있으며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가 낳은 비(婢)소년의 일화는 유명하며 박팽년의 후사가 간신히 이어진 그 일족을 "묫골박씨'라고도 한다.충절(忠節)의 가문 순천박씨는 1세조 박숙정의 아들 5형제에서 가문이 크게 융성하기 시작하였는데 큰 아들 박원룡(朴元龍)은 시랑(侍郞:정4품 벼슬.차관)을 역임했고 막내 박원상(朴元象)은 공조전서(工曹典書:정3품장관)를 지냈으며,문하시중(門下侍中: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한 종1품 정승)에 오른 박천상(朴天祥)의 아들 박가흥(朴可興).박가실(朴可實:판계림윤).개성판윤 박가권(朴可權) 3 형제가 크게 현달(顯達:세상에 이름을 들날림.입신출세)했다.조선조에서는 박가흥의 아들 박석명(朴錫命)이 태종때 명신(名臣)이었다.그는 정종.태종과 더불어 이불을 같이 덮고 잤을 만큼 절친한 사이였으며 고려 공양왕의 아우인 왕우(王瑀)의 사위이기 때문에 조선이 개국되자 화(禍)를 피하기 위해 7 년간이나 은거하다가 태종 때 좌명3등공신(佐命三等功臣)으로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다.박석명의 손자가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토평했던 박중선(朴仲善)이며 목사(牧使:정3품 수령) 박안생(朴安生)의 아들 박중림(朴仲林, ~1456)은 서기 1423년(세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식년마다보던 정기과거시험.동당)에 급제하고 세종9년에는 중시(重試:이미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거듭보이던 과거로 합격하면 성적에 따라 관직의 품계를 특진시켜 당상관까지 올려줌)에 급제하고,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로 선임되었으며 단종원년에 공조참판(工曺參判:종2품 차관)에 올라 사은사(謝恩使:우리나라에 호의를 베풀 때 중국에 보내던 사신)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2품검찰총장)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 장관)에 올랐다.그는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아들 박팽년(朴彭年).박인년(朴引年).박기년(朴耆年).박대년(朴大年).박영년(朴永年) 5형제와 손자 박헌(朴憲).박순(朴珣) 등과 함께 참화를 당했다.1456년(세조 2)아버지와 함께 사육신과 더불어 단종복위를 도모했던 박팽년(朴彭年) 형제들은 형(刑)에 임하여 아버지 박중림에게 "임금께 충성을 바치다가 어버이께 불효를 끼치었으니 애통하고 안스럽다" 하자 박중림은 태연한 말투로 웃으면서"임금을 섬김에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이것이 곧 불효가 되느니라"하고 죽임을 당하였다. 뒤에 좌찬성(左贊成:종1품재신)에 추증되었다.현재의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 더퍼리에서 살았던 박중림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자라서는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저명한 유학자로서 세종때 집현전 학사로 뽑혔으며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등이 그의 문하로 배출되었다.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에는 박팽년 유허비가 있다.이 유허비는 1989년 3월 18일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을 추모하기 위해 박팽년이 살던 집터에 세운 유허비이다. 서기 1668년(현종 9) 유림들이 그의 유허가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박팽년의 유허에 주춧돌을 모아 비석을 세웠다.비문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글씨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이 썼다. 서기 1672년(현종 13)비각을 지어 장절정(壯節亭)이라 하였는데 6·25때 파괴되어 16대손 박상동(朴尙東)이 중건하였고 박경이 소유.관리하고 있다.박팽년은 서기 1417년 박중림(朴仲林)의 아들로 태어났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謁聖文科:임금이 성균관에 거둥한 후 보던 과거)에 을과로 급제하고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성삼문.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류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김 질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하여 1456년(세조 2) 가족이 모두 처형되었다. 경기도 과천의 민절서원(愍節書院).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등에 배향되었다.1434년(세종 16) 알성문과(謁聖文科:왕이 성균관에 거둥하여 알성한 후 보던 과거)에 급제한 박팽년은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세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으며 경학(經學).문장(文章).필법(筆法) 등에 빼어난 석학(碩學)으로 세조 때 형조참판(刑曹參判:종2품 법무차관)에 올라 사육신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거사(巨事) 직전에 탄로나 아버지와 함께 화(禍)를 입었다.국문(鞠問)을 하던 세조는 박 팽년의 재주를 아껴 "만일 네가 나를 섬기면 살려 주겠다"라고 회유했으나 그는 "나는 상왕의 신하이지 당신의 신하가 아니오"라며 이를 거절하였다.세조가 사육신들을 옥에 가두었을 때 김 질로 하여금 술을 가지고 가서 옛날 태종이 정몽주에게 불렀던 하여가(何如歌)로 마음을 떠 보려 하니 성삼문은 정몽주의 노래로 대답하였고 박팽년은 아래와 같은 시(詩)로 답했다.금생여수(金生麗水)/ 깨끗한 물에서 나지만 물마다 금이 나며옥출곤강(玉出崑崗)/ 옥은 곤윤산에서 나지만 뫼마다 옥이 나랴여필종부(女必從夫)/ 아무리 여자는 남자를 따라야 한다지만 임마다 이를 좇아야하는가 "박팽년 일가가 멸족될 때 둘째아들 박순(朴珣)의 아내 성주이씨(星州李氏)가 임신중이었는데 나라에서는 이 뱃속에 든 아이까지도 아들일 경우 죽이라는 선고를 내렸다.교동현감(喬洞縣監:종6품수령)이질근의 딸인 이(李)부인은 친정인 경북 달성군 하빈면 사동(河濱面沙洞:일명 묫골)에 내려가 살다가 아이를 낳았는데 아들이었다.유일한 이 혈손을 보존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 마침 충비(忠婢)가 딸을 낳자 서로 바꿔 박비(朴婢)라는 이름으로 자라났다. 이 아이가 장성한 후인 성종때 박 순(朴珣)과 동서지간이던 이극균(李克均)이 경상도감사(慶尙道監司:종2품 관찰사)로 내려와 울면서 자수를 권고시키자 16세의 소년은 한양으로 달려가서 왕에게 박팽년의 자손임을 고했다.성종은 기뻐하면서 특사령을 내리고 이름도 일산(壹珊)으로 고쳐주었다.<박팽년의 시(詩)>까마귀 눈비 맞아 희난듯 검노메라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이 시(詩)는 박팽년이 지은 시조로 널리 알려져 있다.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돼 세상을 마감한 박팽년이이 시(詩)에서 까마귀는 세조에 아부하는 간신 세력을 가르킨다.까마귀가 눈비를 맞아 잠시 희어지는 듯하지만 그래도 까마귀는 검을뿐이다.어두운 밤에 더욱 밝은 빛을 내는 명월(明月)은 세조의 살벌한 탄압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충신들을 암시한다.시조속에는 세조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주군에 대한 의리와 충성심은 변치않는다. 현대에도 검은것들은 자리마다 변색하고 있지만 시조(詩調)는 이렇게 그시대를 알수있게 역사성을 반영하고있다.박팽년(朴彭年,1417~1456)의 묘는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1동 사육신공원에 있다.중종반정(中宗反正)의 주역인 박원종(朴元宗)은 영의정(領議政:정1품정승)에 이르렀는데 이는 조선조에 몇 안되는 무과(武科)출신 영의정이다.그는 신장이 9척이며 풍채가 의젓하였고 월산대군(月山大君)과 윤여필(尹汝弼)의 처남으로 구속됨이 없었고 영웅 기질이 짙은 무인(武人)이었다고 한다.박원종의 누이가 연산군(燕山君)에게 몸을 더럽혔을 때 박원종을 불러 원수를 갚아 달라면서 이를 악물고 죽자 그는 이것이 항상 원한에 사무쳐 성희안(成希顔).류순정(柳順汀) 등과 함께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반정을 단행한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박원종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1리에 있다.기재잡기(寄齋雜記:조선 인조때 문신 박동량이 지은 역사책으로 조선초부터 명종때까지의 역대 야사(野史)를 기술한 책)에 의하면 그는 호방하였고 위선(僞善)을 하려고도 않았으며 항상 공부하면서 겸손하였고 중종은 대사(大事)때마다 그의 의견을 꼭 물었다고 한다.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신원사 입구) 박씨는 박원종 집안 16세기에 이주충남 공주시계룡면양화리(신원사입구)의 순천박씨들은 중종반정의주체인 박원종(1467~1510)의 집안이다.이들은 박원종의 사촌인 순성군 박이검의 후손들이다. 바로 박이검의 아들인 박인손(1498~1553)이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에 이거(移居)하면서 번성한 성씨다.박인손의 손자인 박정제는 음서(蔭敍:아버지나 조부가 국가에 공훈을 세웠을때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채용하는 제도)로 참군(參軍:훈련원.한성부의 정7품)을 지내다, 인조때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어가를 호종(扈從왕가를 뒤따름)하여 공주에 이르렀을 때,배가 없자 벗은 몸으로 얼음을 깨고 금강을 건널 수 있게하여 원종공신에 오른 인물이다. 이처럼 양화리 순천박씨 집안은 박이검과 박정제가 공신록권을 받고, 그 자제들이 벼슬을 받는 등 국가로부터 충신 가문으로 인정을 받아, 공산지(公山誌)에도 박이검과 박정제가 수록되었다. 이같은 가문의 충신 사적을 전해주는 자료가 십공신회맹록(명랑록)1책과 정사원종공신녹권(대려록)1책이다.<십공신회맹록>은 표제를 <중종조녹권>명랑록이라 한 것으로, 서기 1507년(중종2) 9월 왕이 개국. 정사.정난 등 10공신 및 그 자손들과 함께 회맹한 내용을 적은 것으로, 이 문서에는 박원종을 비롯한 순천박씨 가문의 박이검.박이온, 그리고 박기손.박인손이 정국공신 자(子)로 수록되어 있다.<정사원종공신녹권>은 표제를 <인조조녹권>대려록이라 한 것으로,1625년(인조3)에 왕이 박정제에게 발급했던 공신녹권으로, 보존상태는 매우 양호하여 당시의 사회사적 가치를 전해주는 자료로서 높이 평가되고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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