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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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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행덕업의 1000년 많은 인재들이 문·무과에 급제 애국지사 많아나주라씨(羅州羅氏)의 선계(先系)는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중국 예장(豫章) 광정공(匡正公)이 주나라 공신이 된후, 나국후(羅國侯)에 봉록되면서,성씨를 라씨(羅氏)로 개성(改姓)한데서 연원이 되었다고 한다.나주라씨 중앙종친회에 의하면,나주라씨(羅州羅氏)는 고려 중엽에 중국의 예장(豫章)에서우리나라에 건너온 라부(羅富:1063년생)를 시조로 받든다.중국 역사에 중국인들은 황제(黃帝:3황5제의 한사람,신농씨.복희씨 등)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나주라씨 종친회기록에도 라씨(羅氏)는 황제(黃帝)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황제(黃帝)의 후손 광정공(匡正公)이 주나라에서 공을 세우고, 라국(羅國:현 방주)에 봉해지자,국명을 따라 라씨(羅氏)라는 성(姓)을 최초로 갖게 되었으며,그의 후손 주공(珠公)이 한나라초에 큰 공(功)을 세우고,예장군(豫章君:에장은 남창부)에 봉(封)해져 예장라씨(豫章羅氏)의 시조가 되었다.우리나라 나주라씨(羅州羅氏)의 시조 라부(羅富)는 중국 북송의 예장(豫章)사람으로,금나라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급해지자,봉명사신(奉命使臣:임금의 명령을 받아온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가,1127년 북송(北宋)이 멸망하자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고려에 귀화하였으며, 전라도의 여황이란 곳에 정착하였는데,어질고(累仁) 덕(德)을 많이 베풀어 호남의 망족(望族)이 되었다고 문헌에 전해오고 있다.라부(羅富)는 송나라의 개국공신 라언담의 후손으로,남송 고종때 이부상서(吏部尙書:고려때는 정3품 장관)를 지낸 라귀(羅貴)의 친형인 것으로 알려졌다.시조 라부(羅富)는 고려조에서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감문위는 고려 6위의 하나 상장군은 정3품)에 올랐는데,감문위(監門衛)는 중앙군의 일부로서 궁성의 수비를 담당하는 부서로 6위의 하나이며,상장군(上將軍)은 그 부서의 최고책임자로서 품계는 정3품(正三品)인 정의대부(正議大夫)이다.시조 라부(羅富)와 가장 근접한 실존인물은 남창(南昌:옛 예장 豫章)일대에 세거하는 라씨들의 파보인 백림파보(栢林派譜)와 예장라씨대성보(豫章羅氏大成譜)에 나오는 라부(羅富)이다.라부(羅富)의 족보명은 라인로(羅仁老)라 하며,자(字)가 부(富)이다.라부(羅富)는 1063년에 출생하였으며,강서성 소재의 현령(종5품수령)을 지내다가,1108년 무기위(武騎尉)가 되었고,봉의랑(奉義郞:종5품으로 토관직 동반의 품계)을 거쳐 운기위(雲騎尉)가 되었다.따라서 라부(羅富)는 나주라씨의 시조인 라부(羅富)와 활동연대와 이름이 같을 뿐만 아니라,1127년 북송이 멸망할때는 65세의 문무를 겸한 인물이었다.그리고 부인의 장지는 족보상에 기록되었으나,본인의 장지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다는 점 등이 우리나라로 건너온 것을 뒷받침한다고 한다.나주라씨의 관향(貫鄕)이 나주로 정해진 것은 조선초이다.이는 조선초에 여황현이 폐현(廢縣)되고 나주에 합병되었기 때문이며, 과방록(科榜錄)에도 세종조에 급제한 라득강(羅得康)이 최초로 나주인(羅州人)으로 기록되어, 조선초기에 관향이 나주로 결정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문헌에 따르면,공민왕 원년에 급제한 라세(羅世)는 선조가 중국에서 왔으며,당시 중국은 원나라였으므로,고려사에 원나라 사람(元人)이라 기록하였고,공민왕 11년에 급제한 라중우(羅仲佑)는 과방록에 관향을 명시하지 않았다.나주라씨는 라부를 시조로 받들고, 라득규를 1세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1세조 라득규,2세손 라중윤(羅仲潤),3세손 라송기(羅松奇),4세손 라수영(羅守永)까지는 독자(獨子)로 내려오다가,라수영(羅守永)이 라위.라계.라석.라세.라원(位.桂.碩.世.源)등 5형제를 두었는데,이들은 모두 고려말에 관직에 나갔으며,각각 5대 파조(五大派祖)가 되었다.나주라씨(羅州羅氏)는 대부분 이들 5형제의 후예들로 후손이 번창하고 학행덕업(學行德業)이 1000여년 동안 끊이지 않아 많은 인재들이 문·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충·효·열(忠·孝·烈)과 애국지사들이 배출되었다.오늘날에도 대법관,부총리(副總理),장관(長官),외교관(外交官),대학총장,국회의원등 많은 활동가들이 속출하여,국가 및 사회발전에 공헌(貢獻)하고 있고,자손들이 10만여명에 이르고 있다.라수영(羅守永)의 큰아들 라위(羅位)는 고려때 일찍 출사(出仕)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호조전서(戶曹典書:정3품 장관)에 제수(除授:추천을 받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림)되었으나 당시 혼란한 정국을 개탄하며 벼슬을 버리고 나주에 은거자정(隱居自靖)하여 금양처사(錦陽處士)로 불리워졌으며 그의 아들 라동길(羅東吉)이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3품)를 지내고,증주목사(甑州牧使정3품)로 나가자, 자손들이 그곳에서 세거하면서 용강과 성주(成州) 등지로 이주하여, 주로 관서북지방에 집중세거하면서 전서공파(典書公派)의 일족을 이루었다.라수영의 둘째 아들인 라계(羅桂)는 고려에서 벼슬이 중서시랑(中書侍郞:정4품 차관,중서시랑평장사는 정2품 부총리)에 이르렀고, 자손들이 주로 경기도에 집중세거하며 시랑공파(侍郞公派)를 이루었다.기록에는 그의 묘가 한양성내(漢陽城內)에 있는 것으로 기록에 전하나, 실전(失傳:묘지나 고적 등이 대대로 전해 온 사실을 알 수 없게 됨)하여, 1978년부터 후손들이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長井里) 봉천산(奉天山) 남쪽에 6대를 설단(設壇)하고, 매년 음력 10월 13일에 향사(享祀:제사)하고 있다.금양군(錦陽君) 파조(派祖)인 라석(羅碩)은 고려때 사온서직장(司 署直長:사온서는 궁중에서 쓸 술에 관한 일을 맡아본 관아의 7품)으로 나라에 공(功)을 세워, 금양군(錦陽君)에 봉해졌으며 학문(學問)이 뛰어났고, 나주로부터 김제(金堤)로 이주하여 자손들이 김제파(金堤派)라고도 하였다.그의 묘는 김제의 북조산(北造山)에 있었으나, 실전하여 후손들이 1954년 김제군 금산면(金山面) 청도리(淸道里) 종산(宗山)에 설단하고, 매년 음력 3월 15일 향사(享祀)하고 있다.라수영(羅守永)의 네째아들로 연안군파(延安君派)를 이룬 라세(羅世)는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고,전라도상원수(上元帥:지역 충사령관)겸 도안무사(都按撫使지방의 수령을 감찰하는 임시 관직으로 재신반열이 겸직함)를 거쳐,나라에 공을 세워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으며,벼슬이 판도판서(版圖判書:판도사의 정3품장관,조선때는 정2품호조판서)에 이르렀다.묘소가 실전되어,후손들이 1957년 충남 서천시 마서면 옥산리 순제동(荀堤洞)에 설단하고 매년 음력 3월 17일에 향사하고 있다.라수영의 막내아들로 사온서직장(司 署直長:궁중에서 쓸 술에 관한 일을 맡아본 관아의 7품)을 지내고 나주(羅州)에 세거했던 라원(羅源)은 직장공파(直長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고,묘소는 공조 전서(工曹典書:정3품 장관)를 지냈던,아들 라진(羅璡)과 함께 나주 송현(松峴)에 있으며, 3월 3일에 향사(享祀:제사)하고 있다.나주는 1895년(고종32)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로서 나주군을 관할하였고, 1981년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통합하여 금성시로 승격하여 나주군에서 분리되었다. 금성시는 1985년 나주시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나주시와 나주군이 통합되어 나주시로 개편되었다.나주라씨는 2000년의 인구조사에서 33,600가구에 108,139명이었다.나주라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28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29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는 과거,소과)에 102명 등 159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여 명문으로서의 가통을 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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