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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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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신.여윤철 부자(父子) 청백리임진왜란 후 일본과의 국교 회복시킨 여우길독립운동가 여운형우리나라 여씨(呂氏)는 문헌에 30여본이 전하나, 대부분 함양여씨와 성산여씨의 세거지명이다.함양여씨(咸陽呂氏)는 서기 877년(헌강왕 3)에 '황소(黃巢)의 난'을 피해 신라에 귀화한 여어매(呂御梅)를 시조로 받든다.시조 여어매는 우리나라에 들어와 함양을 세거지(世居地)로 삼고 창성(創姓)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시조 전서공(典書公:공조전서 여어매이고 공조전서는 정3품 장관) 여어매의 제단은 경남 함양군 휴천면 호산리에 봉안되어 있다.전서공 여어매의 9대손인 여칭(呂稱)이후 많은 명신(名臣)을 배출하였다.여칭(呂稱)은 고려 말에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조선 태조때 도총제(都摠制:오위도총부의 벼슬)와 형조판서(刑曹判書:정2품법무장관)를 역임하였으며 청빈하기로 유명했다.여칭(呂稱:1351~1423.자는 중부(仲父).호는 화곡(樗谷).시호는 정평 靖平)은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규정(糾正:비위를 밝히고 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6품).전라도안렴사(按廉使:지방장관).전법총랑(典法摠郞.6사의 하나인 전법사의 정4품 차관).나주 목사(牧使:정3품수령)등을 역임하였다.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경상.전라도 조전부사(漕轉副使:조전은 조운이라고도하며 국가에 수납하는 대동미와 전세를 중앙으로 운송하던 것을 말하며 운송 단계별로 책임자가 다름)가 되고 이어 판합문사(判閤門事:조회나 의례 맡아본 관청의 벼슬).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의정부참지사(議政府參知事:참지사는 도평의사사가 바뀐 최고행정기관인 의정부의 벼슬로 삼공과 함께 백관을 통솔하고 도의를 논했으나 태종때 혁파됨)가 되었다.1402년(태종 2) 태상왕(太上王)이 북행(北行)할 때 동북면도순문사(都巡問使:원수를 고친이름)로 배종(陪從:지체높은 사람을 모심)하였고, 1404년 사은사(謝恩使:중국이 호의를 베풀었을때 가던 사신)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서북면도순문사 겸 병마도절제사(節制使:병마절도사의 예전이름으로 정3품).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중군은 군영의 대장으로 사(使) 다음의 벼슬이며 군사를 통할하던 관청).개성유수(2품 지방장관)를 역임하였다.1412년 형조판서(判書:정2품 법무장관) 에 오르고 이듬해 흠문기거부사(欽問起居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치사(致仕벼슬을 사양함)하고 은거하였다. 흠문기거(欽問起居)부사는 황제의 기거(起居)를 흠문하기 위해 보내던 사신을 말하며 주로 황제가 궁전을 떠나 외지에 있을때 차견하기위해 가던 사신의 두번째 서열이다.<전좌군 도총제 여칭 졸기>-세종(기유년)전좌군도총제(前左軍都摠制) 여칭(呂稱)이 돌아갔다.여칭의 자(字)는 중부(中父)이니,그의 본관은 경상도 함양(咸陽)이다.고려왕조에 벼슬하여 사헌 규정(司憲糾正)에 임명되고 전라도안렴사(按廉使).전법.전리총랑(典法典理摠郞)을 역임하고 외관직으로 공주(公州).나주(羅州) 두주(州)의 목사(牧使)가 되었다.우리 왕조 때 와서 양광도(楊廣道).경상도.전라도의 조전부사(漕轉副使)가 되고,여러번 천직(遷職)되어 판각문사(判閣門事)와 여러조(曹)의 전서(典書:정3품 장관)가 되고,승추부 우군동지총제(承樞府右軍同知摠制)와 강원도 도관찰사를 지냈으며,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에 이르렀다.임오년에 태조가 북방으로 행차할때 동북면 도순문 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가 되었는데 태종은 그가 위태한 시기에 임하여 정도(正道)를 지켰다 하여 전지(田地)와 노비(奴婢)를 주었다.서북면 도순문 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로 옮겨져서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개성유후(開城留後).형조판서.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겸하였다. 계사년에 사신이 되어 연경(燕京)에 가서 황제의 안부를 묻고 돌아왔다.한가로이 있은지 10년만에 이때와서 돌아가니 연세가 73세이다.부고(訃告)가 위에 들리니 조회를 3일 동안 폐하였고,정평(靖平)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너그럽고 즐거이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하고,다스림에 과오(過誤)가 없는 것을 평(平)이라 한다.칭은 나라를 위함에 부지런하고 근신하여 세미(細微)한 일까지도 정세(精細) 치밀(緻密)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아들은 둘이니 여계(呂稽)와 여뇌(呂賚)이었다.<도총제 여칭 사제문>-세종(갑술년)작고한 도총제(都摠制) 여칭(呂稱)에게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제문에 이르기를 "국가의 조종(祖宗)으로부터 내려오면서 무릇 신하들이 작고하면, 상제(喪祭)를 반드시 그의 작위와 훈벌의 등급에 따라 품절(品節)하는 것이 모두 옛법에 근본한 것이다.경은 단정하고 바르며,강직한 자품으로 이치(吏治)에 장점이 있으면서 학문까지 겸비하였다. 네 고을의 수령으로 백성들이 사모하고,다섯 도(道)의 감사(監司:관찰사)가 되어 간사한 무리가 없어졌다.임오년에 북방을 순문(巡問)하였을 때 마침 어렵고 위태로운 일이 있었는데,경이 마음껏 의(義)에 따라 미리 방비하여 안녕(安寧)을 도모하였다. 태종께서 더욱 가상히 여기셨다. 그 뒤에 송도유수(松都留守:2품 벼슬)가 되어 여러 군대를 모두 거느렸으며, 혹은 판형조(判刑曹)로 혹은 지의정(知議政)이 되었으니, 모두 높은 품질(品秩)이다.이리하여 경은 위엄스러우면서도 은덕이 있는 상(相)이 나타났고 번잡한 일은 덜어서 없게 하였으며, 요령을 따지는 재주를 갖추어서 평탄할 때나 험난할 때를 가릴 것이 없이 큰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경은 이같은 지위를 얻은 것이나, 이러한 이름을 받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지난번에는 늙었다 하여 집에서 휴양한 적도 몇 해나 되었으나, 아직 기력이 그다지 쇠하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나의 미치지 못하는 일을 도와주기를 바랐더니, 하늘이 어찌 돌보지 아니하여 나의 구인(舊人)을 빼앗아 갔는고 이 향기롭지 못한 박전(薄奠)이나마 그대로 가시지 아니한 정혼(貞魂)을 위로할 수가 있을는지"하였다.함양여씨묘역(咸陽呂氏墓域: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0호1991년 12월24일-서울시 구로구 고척2동 산 6-3번지.조선 15세기)함양여씨 묘역에는 함양여씨 선조인 승의랑(承議郞:승의랑은 조선.고려 정6품 문관 품계이며 뒤에 승봉랑으로 고쳐짐)공 여계(呂稽)의 묘가 있고 그 아래쪽에 부인의 묘가있다.여계는 려말선초에 병조판서(判書:정2품국방장관)를 지낸 여칭(呂稱,1351~1423)의 아들이며 태종때 호조좌랑(佐郞:정6품).호조참판(參判:종2품차관) 등을 역임하고 1421년(세종3) 세상을 떠났으며,1428년(세종10)에 이곳에 묘소를 마련하였다.부인은 청송심씨로 정승을 지낸 심백덕의 손녀이며 심의구의 딸이다.여계는 장남 여종숙(呂宗肅),차남 여종경(呂宗敬),3남 여종주(呂宗周),4남 여종모(呂宗貌),5남 여종상(呂宗商)등 5형제를 두었는데 그 후손이 이땅에 살고 있는 함양여씨 거의 대부분이다.묘역에는 무덤 2기,묘비 1개,상석(床石) 2기,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 2기가 있다. 여기서 상석은 무덤 앞에 제물을 놓기 위한 돌상이고 문인석과 무인석은 무덤을 지키기 위해 세우는 석상으로 문관과 무관을 상징한다.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함양여씨 묘역이 중요한 이유는 숭의랑공이 중요한 인물이기이도 하지만 묘역이 조선 전기 묘제를 알 수 있는 분묘 양식으로 큰 가치가 있다고 한다.여칭의 증손 여자신(呂自信)은 성종과 중종대에 걸쳐 이름난 무신(武臣)으로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 방장관)를 지내고,청백리에 녹선되었다.여자신(呂自新)의 시호는 정장(貞莊)이며 본관은 함양이다.무과(武科: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급제하여, 1479년(성종10)에 병조참판(參判:종2품국방차관)이 되었으며, 이어 경기도.강원도의 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를 역임하였다 1499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정2품)가 되어, 성절사(聖節使:황제의 생일 축하사신)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이듬해 평안도병마절도사(節度使:각도의 병마를 지휘하던 벼슬)를 거쳐, 연산군때 도총관(都摠官:오위의 정2품)이 되었다.전라도와 함경도의 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와 이조참판(參判:종2품 차관)을 지냈으며, 중종때 병조판서(判書:정2품 국방장관)에 이르렀고, 아들인 여윤철과 함께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여자신의 아들인 여윤철(呂允哲)은 조선 중기의 무관으로 청백리 여자신의 아들이다.여러 내외직을 거쳐, 평안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병마를 지휘하던 2품 벼슬)로 있으면서 북쪽 변방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수호하였으며, 모든 정사를 청렴결백하게 처리하여 고을 백성들이 청백비를 세웠다.전라좌수사때 해상방어를 지휘하다 왜구의 탄에 맞게되자, 왕이 소식을 듣고 의원과 약을 하사하였으나 세상을 뜨고말았다. 그러나 워낙 청빈하여,장례를 치를 식량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는 것을 조정에서 알고,후하게 부조하여 장례를 치루었다후일 공의 청백함과 충절을 가상히 여겨 보상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왕은 곡식과 의복을 하사하여 후손들을 불편없이 지내도록 하였다. 함양여씨는 여칭의 8대 손인 여우길(呂祐吉).여유길(呂裕吉)의 대(代)를 고비로 선조.숙종대에 걸쳐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여우길은 선조 때 문과(文科:대과.문관을 뽑아쓰기위한 과거)에 급제하고,여러 벼슬을 거쳐 광해군때 관찰사(觀察使:종2품감사)에 이르렀으며 특히 대명(對明)외교에 큰 공헌을 하였다.그는 임진왜란 뒤에는 일본에 건너가 중단된 국교를 회복시켰다고 한다.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여운형(呂運亨)은 여우길의 11대손이다.여유길은 선조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조선시대에 왕이 성균관에서 알성한 뒤에 보이던 과거)에 급제하고 광해군 때 병조참판(兵曹參判:종2품 국방차관)에 이르렀다.여유길의 아들 여이징(呂爾徵)은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도승지(都承旨:승정원의 정3품 왕의 비서실장).부제학(副提學:홍문관에 둔 정3품 당상관)을 거쳐 대사헌(大司헌: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에 올랐다.그는 성리학에 밝고 천문.역법(曆法).시문(詩文).서화에도 뛰어났다고 한다.그의 종제(從弟) 여이재(呂爾載)는 인조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였으며,심기원(沈器遠)이 모반했을때, 공을 세워 영국공신(寧國功臣)에 책록되고,형조판서(刑曹判書:정2품법무장관)에 이르렀다.함양여씨의 상신(相臣:정1품 정승으로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일컬음) 여성제(呂聖齊)는 소론(少論)의 한 사람으로, 의정부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이르렀으며 남인(南人)과의 대립으로,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왕명을 출납하고 궁중을 숙위하던 중추부의 1품관)로 전임하였다.여씨의 한축인 성산여씨의 시조는 고려시대에 진사(進士:소과와 진사과에 급제한 사람)를 지낸 여양유(呂良裕)이며,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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