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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궁(南宮)

    문중

    남궁(南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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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文名)이 중국에 알려져,문인석(文人石) 받은 전통의 명문 남궁후는 삼전도 치욕때 30만평 토지 버리고 은거 문헌과 각종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 남궁씨(南宮氏) 연원은 중국의 주나라에서 기자(箕子)와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온 남궁수(南宮脩)의 후예로부터 시작된다. 남궁씨는 본래 황족인 희성(姬姓)이었다고 한다.남궁씨의 원조 남궁수는 중국 남궁씨의 한사람으로 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에 이어 주(周)나라를 건국하자, 은(殷)나라 주왕의 숙부 되는 기자(箕子)가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이유성.황보검.남궁수가 같이 동행하여, 단군조선을 이어 <기자 조선>을 건국하는데 동참하였다고 한다.그는 사도(司徒:고려때는 정1품 3공,조선때는 정2품 호조판서)에 올라,백성들에게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을 가르치고, 음식의 예법과 제사에 편두를 쓰게 하여 의관제도와 직제를 중국과 같게 하였다고 하나, 자세한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하였고, 또한 후손들에 대한 기록도 찾을 길이 없어 고려 광종 때의 남궁원청(南宮元淸)을 시조로 받들며 계대(系代)하고 있다. 남궁씨는 함열(咸悅).부윤(富潤).남평(南平).용안(龍安).의령(宜寧).자산(慈山)등 6본이지만 주요 본관은 함열남궁씨 이다.시조 남궁원청은 1남2녀를 두었으며, 시조의 묘는 충남 보령시 청라면 의평리에 오좌원(午坐原)으로 봉역되었으나, 오랜동안 실전되었던 것을 후손인 충남 부여의 남궁혁과 평산의 남궁정 등이 묘를 찾아 확인하고, 1916년에 복원 예장(禮葬:예도를 갖추어 치르는 장례)하였다.고려 성종때 대장군(大將軍:종3품)에 오른 남궁원청(南宮元淸)은 감물아현(甘勿阿縣,백제때 익산 함열 지역의 행정구역)출신으로,김행성(金行成)등과 함께 송나라에 유학하여,국자감(國子監고려 국립교육기관으로 국가에서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최고의 교육기관)에서 공부하고,대과(大科:문과)에 급제했다. 귀국후 991년(성종10) 대장군(大將軍:종3품)이 되어 여진족을 백두산 북방까지 몰아내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워,평장사(平章事:정2품부총리)에 이어,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정승)에 올라,감물아백(甘勿阿伯,백은 5등봉작제의 3번째 작위)에 봉해졌다. 그래서 함열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후손 남궁득희(南宮得禧)를 1세조로 받들며 계대(繼代)하고 있다.1985년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는 남한에 총 3,874 가구 16,227 명이었고, 2000년에는 18,743명이었다.함열(咸悅)은 전라북도 익산시에 속해있는 지명으로,757년(경덕왕 16)에 함열현(咸悅縣)으로 고쳐서 임피군(臨陂郡:군산시 옥구)에 속하게 하였다. 1018년(현종 9)에 전주의 관할로 들었다가 1176년(명종6) 감무(監務:작은현에 중앙에서 파견한 감독관)를 두면서 독립하였다.1409년(태종9)에 용안현과 병합하여 안열현으로 1416년에 분리하여 각각 현감을 두고,함라(咸羅)라고도 하였다.1914년 군.면 폐합으로 익산군에 폐합되면서 함열면이 되었으며,1979년 함열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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