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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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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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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시조는 양주백 낭원보,고려때 평장사,중서령까지 지낸 전통 명가우리나라 낭씨(浪氏)는 중국 양주(揚州:강소성 강도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라고 한다.낭씨(浪氏)는 양주낭씨 단본으로 알려졌으나, 진주낭씨 등 시조를 다르게 하는 2계파가 있으며, 중간세계(世系)를 실전(失傳:대대로 이어온 사적을 알수없게 됨)하여, 이들 2계파는 같은 종씨로 알고 합본(合本)하였다고 한다.<양주낭씨 족보>에 의하면, 양주낭씨 원시조는 낭원보라고 하며, 그는 본래 당나라의 호족인데 낭원보(浪元寶)가 660년(태종 무열왕 7) 소정방(蘇定方)이 신라의 동맹군으로 백제(百濟)를 침공해왔을 때, 낭장(郞將)으로 따라왔다가 신라에 공(功)을 세워 양주백(揚州伯)에 봉해진 후, 신라에 귀화한 것으로 전해지며, 그의 후손인 낭충언은 고려의 개국공신이라고 한다.낭씨(浪氏)의 시조는 낭초(浪礎)라고 한다. 문헌에 따르면 시조 낭초(浪礎)는 명나라의 병부시랑(兵部侍郞:고려때는 정4품 국방차관)을 지냈는데, 간신의 참소를 입어 조선 인조때 배를 타고 조선으로 넘어왔다고 한다.그는 황해도 옹진 근처에 도착하여 머물다가, 그곳에서 여(呂)씨 성을 가진 사람의 도움을 받아 충남 서천으로 옮겨 세거(世居)하게 되었다고 한다.낭씨의 본관은 양주(揚州) 단본으로 전해졌으나,2000년 인구조사에서 <진주낭씨> 등이 새롭게 확인되었다.한편 문헌에는 낭씨의 시조는 낭충정공(浪忠正公)이라고만 알고 있을 뿐,휘자(諱字:이름)와 시대도 모르며, 한 질밖에 없는 족보가 없어져 세계(世系)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조선씨족통보>에는 중국 장쑤성 양주에서 왔다고 하며,명나라 숭정(崇禎:명나라 연호) 연간인 서기 1628∼1644년(인조 6∼22년)에 명나라 병부시랑(兵部侍郞:고려때는 정4품국방차관)인 낭초(浪礎)가 한국에 귀화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또 앙엽기( 葉記)에도 야인투화자(野人投化者)의 후예라고 나와 있다.1985년 인구조사에서 당시 274성씨 중 190위였으며, 2000년 조사에서는 "진주낭씨"가 새롭게 조사되어 1가구 3명이었으며,낭씨는 총 2개 본관에 총 344명이었다.양주낭씨대종회(楊州浪氏 大宗會) 자료에 의하면 <장절공 낭충언 계통> 시조 장절공 낭충언(浪忠彦)은 고려 개국때 태조를 도와 삼한벽상공신으로 좌정승이 되고 양주부원군(楊州府院君)에 봉해져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 묘소는 황해도 해주에 있고 향사(제사)일은 10월 15일이다. <충정공 낭원부 계통>시조 충정공 낭원부(浪元夫)은 고려 때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부총리)를 지내고 양주부원군(楊州府院君)에 봉해져, 후손들은 충정공을 시조로 받들며, 봉군지인 양주을 관향으로 삼았다.묘소는 경기도 개성에 있고 향사일은 10월 1일이다. 양주낭씨는 진주낭씨 등을 같은 뿌리로 생각하며 세계(世系)하고 있다고 한다.낭씨는 도곡총설(陶谷叢說)의 기록에는 없으며, 1930년 일제강점기때 국세조사에서 36가구로 조사되었으며, 당시 서울.경기에 29가구,충남 예산.충북 충주.강원 홍천에 각각 1가구 나머지는 함남 갑산에 살고 있다고 했다.2000년에는 총 111가구에 서울에 129명.경기도에 133명.인천에 20명.대전에 5명 등 341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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