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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마 최초로 들여와 재배한 조 엄과 세도정치로 유명문과(文科대과)에 186명 무과(武科)에 15명 등 모두 599명 과거급제자조정(趙靖)의 임진란 기록은 임란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풍양조씨는 조맹(趙孟)을 시조로 받든다.문헌에 따르면 그의 초명(初名)은 바위(岩)였다.그는 풍양현(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숯을 구우며 천마산 기슭 바위동굴에 은둔해 살던 도인(道人)이었다고 하며 불가(佛家)에서는 "바우는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을 친견(親見)하였다"는 설도 전해 오고있다.지금으로부터 약 1,100여 년전인 통일신라 말엽 풍양현(豊壤縣:남양주시 진전읍 송릉리)의 독정이(현재의 독정리 獨井里)라는 마을 암굴에서 농사를 생업으로 하며 학문과 정신수양에 정진하던 "바위"라는 은자(隱者)가 있었다.당시 국운이 기울어진 신라와 망국 백제의 설분을 표방하고 일어난 견훤의 후백제,고구려의 회복을 내건 궁예의 태봉으로 정립된 군웅할거의 후삼국시대를 거쳐 태봉의 궁예가 잇따른 실정으로 민심이 이반하자 막하의 시중(侍中:종1품 정승)이었던 왕건이 왕으로 추대되어 고려(高麗)라는 국호가 탄생하기 직전 상황으로 신라.후백제.태봉간에는 하루도 쉴새없이 전쟁을 하던 시기였다.어느날 왕건이 신라를 정벌하다가 영해지방의 전투에서 신라에 크게 패하고 패잔병을 이끌고 철수하던 중 풍양땅에 이르게 되었다.이때 막하의 장수들은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꼭 이곳 풍양땅에 사는 "바위"도인을 찾아가 왕업을 이룰 계책을 상의함이 좋겠다"고 건의하자,태조 왕건이 직접 찾아가 제우(際遇:만남)하고 바우노인을 장군을 삼으니 그때 도인의 나이 70세였다. 그는 왕건과 같이 남정(南征)에 나섰으며 뛰어난 지략과 용맹으로 고려통일을 이루는데 공을 세워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태조 왕건이 그에게 맹(孟)으로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시조 조맹(趙孟)의 벼슬은 고려조에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문하부의 정2품 부총리)를 지내고 문하시중(門下侍中: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한 종1품 정승)에 이르렀다.그는 통합삼한벽상(統合三韓壁上:공신당에 초상이 새겨진 공신)개국공신으로 상주국(上柱國:고려때 2품에게 내리는 최고의 훈호)에 이르렀으며, 조맹이 죽자 자신이 수도생활하던 독정이 마을 천마산지맥에 묻혔으며 매년 음력 9월에 향사(제사)한다.지금도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3번지 천마산에는 왕건을 만났다는 암굴(巖窟)이 남아있으며 견성암(見聖庵)을 세워 그를 수호하고 있다.견성암(見聖庵)은 고려시대 풍양현(豊壤縣)이였던 이곳 진건면 송능리는 풍양조씨(豊壤趙氏) 시조의 유적지에 세워진 암자(庵子)로서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재궁(齋宮)이다.암자 뒤에 있는 석굴(石窟)은 신라말기에 후일 풍양조씨의 시조(始祖)로 받들어진 조맹이 은거하여 수양하던 곳이다. 조맹의 초명(初名)은 "바위"로 보첩(譜諜)상의 파회(破回)는 바위의 음역이다. 후삼국 통일을 앞두고 현자(賢者)를 물색하던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왕위에 오르기전 공(公)의 명성을 듣고 이곳의 "바위"를 찾아와 경국지사(經國之事)를 논(論)하고 한번의 만남으로 의견이 같아 즉석에서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그 길로 왕건(王建)을 따라 남방정벌에 많은 공을 세워 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이 되고 조맹(趙孟)이란 이름을 하사(下賜)받았고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하던 종1품 정승)에 이르렀다.한편 <풍양조씨 대종회>기록에 의하면 시중공(侍中公) 조맹의 묘가 조선왕조에 와서 커다란 곡절을 겪었다고 한다.조선의 제14대 선조에게는 공빈김씨(恭嬪金氏)라는 후궁이 있었으며 이 공빈김씨는 제15대왕이 된 광해군의 생모(生母)이다.서기 1577년(선조 10년) 공빈김씨가 죽자 그의 묘를 시중공 조 맹(趙孟)의 묘 뒤 약 30보쯤 떨어진 곳에 장사를 지냈다.당시의 국법으로는 왕실에서 능묘(陵墓)를 쓰게 되면 그 구역 내에 있는 사가(私家)의 묘는 이장하여야만했다.따라서 공빈 묘가 입장함에 따라 시중공(侍中公) 묘도 옮겨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그때 선조대왕은 "그분으로 말하면 과인이나 공빈에게도 외조(外祖)가 되는 터이니 이장은 하지 말라"는 왕명으로 간신히 수난을 면하였다.1608년(선조 34년)에 선조가 죽자 세자이던 광해군이 제15대 임금으로 즉위하게 되었으며, 임금이 된 광해군은 자신의 생모인 공빈김씨를 왕비의 지위로 격상하는 추존사업을 추진 마침내 1610년 광해군은 공빈김씨를 왕비의 지위로 격상시키고 그 묘에 성릉(成陵)이란 휘호를 가하고 봉릉도감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공빈김씨의 묘소가 성릉으로 격상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시중공 묘의 이장문제가 대두하게 되었고 이장은 불가피하게 되어 조정에서는 군.신(君臣)간에 여러 차례 논의가 되었으며,자손들은 이장문제에 따른 비용 염출을 위해 친손만으로는 부족해 외손에게도 도움을 요청하는 통문을 보내고 이장 예정지까지 정하였던 상황에서 당시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 이덕형의 의견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1품) 윤승훈.완평부원군 이원익.청평부원군 한응인등 여러 신료들과 지관들의 증언으로광해군은 왕명으로 이장만은 면하되 다만 봉분을 평평하게 하고 그 위에 나무를 심고 산을 꾸며 치산토록하여 자손들은 물론 보는 사람마다 상심하지 않는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623년(광해군 15년)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하자 성릉도 혁파되어 다시 공빈묘로 환원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풍양현(豊壤縣)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의 명칭이었다.시중(侍中)조맹은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松陵) 1리에서 태어났으며 묘는 세보(世譜)에 풍양 적성동(赤城洞)으로 기재되어 있는데,적성동이 송릉2리이며 산하에 '적성골'이란 동네 이름이 남아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는"풍양현(豊壤縣)은 주(州:양주 동헌(東軒)소재지)에서 동쪽으로 50리 지점에 있었다.신라때에 황양(荒壤)이라 고쳐서 한양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고려 때는 풍덕이라 고쳤고 1018년(현종9년)에 양주(楊州)에 귀속시켰다가 그후에 포주(抱州:포천)에 귀속시켰으며 1419년(세종 원년)에 다시 양주의 소속으로 삼았다."고 하였다.풍양조씨는 시조 조맹(趙孟)의 후대에서 조지린(趙之藺)을 중흥시조로 받드는 전직공파(殿直公派)와 조신혁(趙臣赫)을 중흥시조로 받드는 평장공파(平章公派)로 대별된다.이 두파는 뒤에 다시 분파되는데 전직공파는 호군공파(護軍公派).회양공파(淮陽公派).금주공파(錦州公派)의 3파로 나뉘고,평장공파는 남원공파(南原公派)를 이루어 현재의 풍양조씨는 이 4파의 후손들이다.이 가운데 (회양공파)가 조선시대에 벼슬을 많이 배출 하였고 인구도 과반수를 차지한다. 이 파(派)는 후에 한평군파(漢平君派:노론집)와 청교파(靑橋派:소론집)로 대별되는데 회양공파에서는 상신(정1품 정승) 6명,문형(대제학) 3명을 비롯하여 판서급이 30여 명이나 배출되었다. 남원공파 역시 "소론집"으로 상신1명과 문형 1명을 배출하였다.<조정(趙靖)의 임진란 기록>조정(趙靖:1555∼1636,자 안중(安仲),호 검간 黔澗,본관은 풍양)은 조선 선조.인조때의 학자로 정구.김성일의 제자이다. 임진왜란에 창의(倡義:병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킴)하여 국토 수호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상주.함창은 물론 경상도와 충청도 지역의 의병 및 관료들의 활동, 백성들의 동향과 고통상 및 왜적의 갖가지 만행을 구체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기록하여 상주 임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고, 나아가 한국 임란사 연구에도 소중한자료를 제공하였다.임란일기(壬亂日記)내용은 1592년 4월 14일에서 1592년 8월 24일까지의 일기로 2권,1592년8월25일에서 1593년 1월7일까지의 남행록 1권, 1593년 12월 25일부터 1594년 2월 4일 까지의 일기 부잡록(日記 附雜錄) 1권, 1597년 1월 24일부터 1597년3 월19일 까지의 서행일기(西行日記) 1권과 견문록(見聞錄) 1권등 6종 7책이다.이 기록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003호(서기 1592년 일기.1989년5.23일 지정)로 지정되었으며 경북 상주시 신봉동179-4번지에 있다.주요 인물을 보면 숙종때 우의정(右議政:정1품 정승)을 지낸 조상우(趙相愚),영조때 좌의정(左議政:정1품 정승)에 오른 조문명(趙文命)과 영조때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을 지낸 조현명(趙顯命),영조때 우의정(右議政정1품 정승) 조재호(趙載浩)가 회양공파이다.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로 효종 때 좌의정(左議政정1품 정승)을 지낸 조익(趙翼),현종때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을 지낸 조복양(趙復陽)은 남원공파이다.영조때 통신사(通信使:조선시대 일본으로 보내던 사신.수신사 修信使)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고구마 종자를 들여온 조엄(趙 )이 유명한데 조엄은 회양공파의 분파인 <한평군파>이다.한평군파는 헌종때 세도정치(勢道政治:세도는 정치의 권세이며 그 권세를 휘두르는 일)로 유명한 집안으로 풍양조씨의 주축이 되는데 조선 후기에는 안동김씨(安東金氏.신안동)와 쌍벽을 이루었다.조엄의 손자 조만영(趙萬永)이 문조(文祖.익종)의 국구(國舅:장인)가 되었는데 문조의 아들(조만영의 외손)인 헌종(憲宗)이 왕위에 오르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1839년(헌종 5)에는 조병현(趙秉鉉)이 형조판서(刑曹判書:정2품 법무장관)가 되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대규모의 탄압을 하여 기해교난(己亥敎難)을 일으키기도 하였다.한편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인물 중 고려때의 조운걸은 1357년(공민왕 6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홍건적의 침입으로 남쪽에 피난하는 왕을 시종하여 2등공신에 올라 3도 안찰사(按察使:지방장관 격으로 안렴사)를 지냈으며 1374년에 벼슬을 버리고 경북 상주에 은거하면서 출입할 때는 소를 타고 다녔다고 하며 "기우도(騎牛圖)"등의 작품을 남겼다.풍양조씨 가문이 세도의 기반을 이룬것은 조선 숙종이후로 상신(相臣:정1품 벼슬로 우의정.좌의정.영의정.정승)7명,대제학(大提學:정2품 홍문관.예문관의 으뜸 벼슬.문형) 4명,공신7명,장신 7명을 배출했다.숙종때 조도보는 조상경.조상강.조상기 등 아들 3 형제와 손자 8명이 있었는데 이들 중 5명이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이들이 영.정조시대에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세력기반을 다진 주역들이다.학당 조상강은 영조때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 국방장관)를 네차례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를 다섯차례나 지냈다.그의 증손자 조만영(趙萬永)은 순조의 외할아버지로 이때부터 풍양조씨의 세도정치(勢道政治:정치의 권세 그 권세를 휘두르는 일)가 시작된다. 영조때 통신사(通信使:조선시대에 일본으로 보내던 사신.수신사 修信使)로 일본에 갔다오면서 고구마 종자를 들여온 조 엄은 조만영의 할아버지이다.현종때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을 지낸 조복양(趙復陽)과 일제강점기때 상주에서 궐기하여 싸우다 일본 군경에 체포되어 순국한 조동범 등이 있으며, 현재 활약중인 바둑계의 천재기사 조치훈도 풍양조씨이다.경북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는 풍양조씨의 집성촌이다. 이 마을 대부분이 호군공파 후손들로 20여대를 이어 살고있다. 마을 입구에 자리잡은 퇴색된 단청 이끼낀 기와집이 3백년 마을의 역사를 말해준다. 마을 한가운데 야산 밑에 자리한 양진당(養眞堂)은 난중일기를 쓴 조 정이 여생을 보냈던 99칸 기와집으로 호군공파 후손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1982년에 문중에서는 이곳을 보존하기 위해 문화재로 지정받고 보수정화 작업을 시작했다. 풍양조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186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였으며 3년마다 실시됨)에 15명,사마시(司馬試:진사와 생원을 뽑던 과거시험)에 395명,의과에 1명,주학에 2명 등 599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인구조사에서 풍양조씨는1985년에는 25,894가구 109,434명,2000년에는 35,009가구 113,798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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