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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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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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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씨(唐氏)는 중국 진양(晉陽:산서성 기영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 본래 도당씨(陶唐氏)의 후손이 당나라 제후(諸侯)에 봉해져서 나라 이름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라고 한다.우리나라 당씨(唐氏)는 위나라 대부(大夫)였던 당저(唐雎)의 후손으로,송나라 휘종(북송의 8대 임금,1101~1125)때 승상(丞相:정승 직위의 중국 옛날 벼슬)에 올랐던,당각(唐恪)의 7세손(6세손 이라고도 함) 당성(唐誠:1337~1413)은 병란을 피해 고려에 귀화하여 뿌리를 내렸으며 조선개국 후 개국원종공신의 녹권을 하사 받았다.그는 조선개국초에 공조전서(工曹典書:정3품장관)로 외교문서(外交文書)를 전담 관장하였고 개국원종공신에 책록되어 녹권(錄券)과 상전(賞田) 15결(結)을 하사받았으며,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품계)로 개성유수(開城留守:2품)를 거쳐 공안부윤(恭安府尹:2품)에 이르러 밀양(密陽)을 사적(賜籍)받아 본적을 밀양으로 하게 되었다.특히 당성(唐誠)은 학문에 정통하여 문명(文名)을 떨쳤으며,야사(野史)의 기록에는 태종때 영의정(領議政정1품)오른 성석린(成石璘)을 위기에서 구해준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고려말에 왜구(倭寇)가 승천부(昇天府:강화도)에 침입했을 때,이를 격퇴시키고 개선한 양백연(楊伯淵)이 법률을 어기어 죽음을 당하자, 막료로 있던 성석린이 연루되었는데,도통(都統)최영(崔瑩) 장군이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하자,사평부평사(司評府評事:조선초에 전곡의 출납이나 재정(財政)을 맡아보던 관아)로 있던,당성이 말하기를 "죄(罪)는 법에 맞게 다스리는 것인데,법문이 이와 같거늘 법률을 고치라 하니 법률이 먼저요! 공(公)이 먼저요! " 하면서 성석린의 억울함을 알고 가볍게 다스렸다.그 은혜를 잊지 못한 성석린은 당 성이 세상을 뜨자 매우 슬퍼하며 "생전에 마땅히 갚아야 할 은혜를 죽었다고 어찌 잊을것인가 일생동안 다 못 갚아 죽어도 못 잊겠네" 라고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예부상서(禮部尙書정3품장관)박정수(朴廷秀)의 손녀를 아내로 맞이한 당성은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는데,큰아들 당몽현(唐夢賢)은 자헌대부(資憲大夫정2품품계)로 중추원사(中樞院使:왕명을 출납하던 중추원의 2품)에 올랐고,차남 당몽량(唐夢良)은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품계)로 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종2품)에 올라 가맥(家脈)을 이었다.당씨(唐氏)의 본관은 밀양.청주.남원.영광.경주 등 다섯 본까지 전하고있으나,모두가 세거하는 지명이라고 하며, 현재는 밀양당씨 한본만 전한다.밀양은 995년(성종16)에는 밀주로 개칭되었으며,1415년(태종15)에 밀양도호부가 되었다가,1895년(고종32)경상남도 밀양군이 되었다.1995년 밀양군이 밀양시로 통합되었다.밀양당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총 300가구에 1,013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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