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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길씨(吉氏)는 경주.금산.부화.남원.성산.안동.의성 해평등 총10 본관에 2000년 통계청조사에서는 32,418명이었다.이중 선산길씨는 6.384명,해평길씨는 20.338명,경주길씨 1.990명,금산길씨 1.154명,남원길씨 346명,서산길씨 1.085명,성산길씨 949명 등이고우리나라 길씨(吉氏)의 본관은 해평(선산) 단일본이며,나머지는 세거지명이다.해평길씨(海平吉氏,선산길씨)조선 성리학 적통을 잇게 한 사림의 비조 야은길씨(吉氏)는 중국 풍익(馮翊)에 뿌리을 두고 있는 성씨로,당나라에서 귀화해온 8학사(八學士)중의 한 사람인 길당(吉塘)이 고려 문종 때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고려때의 정3품 문관의 품계)로 정당문학(政堂文學:고려 때 중서문하성의 종2품 관직으로 주요국정을 논의 함)을 지내고, 해평백(海平伯:해평은 선산의 옛 이름)에 봉해져 우리나라 길씨(吉氏)의 시조로 받들고 있다.우리나라 길씨(吉氏)의 본관은 해평길씨(海平吉氏)와 개성길씨(開城吉氏),하음길씨(河陰 :강화지방)과 여주길씨 등 28본으로 전하나 모두 해평길씨(海平吉氏,선산길씨)의 세거지명이며 관향은 해평길씨(海平吉氏) 단본이다.해평길씨는 해평백(海平伯) 길당(吉塘)의 후손에서 1백여년간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대대로 이어온 묘나 사적을 알수없게 됨)되어, 고려때의 성균진사(成均進士:소과에 급제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지는데,실제로 입학하지 않은 선비도 많다.따라서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한 선비를 성균진사라 함)인 길시우(吉時遇)를 1세조로 받들며 세계(世系)를 이어왔다.낙동강변에 터를 잡고,고려말부터 충절과 도덕가문으로 알려진 해평길씨(海平吉氏)는 해동(海東)의 절신(節臣) 야은(冶隱) 길재(吉再:1353~1419)가 가문을 크게 빛냈다.그는 포은 정몽주,목은 이색 등과 더불어 고려말 "삼은(三隱)"으로 잘 알려져 있다.고려말 1353년(공민왕2) 길원진(吉元進)의 아들로 태어난 길재는 박분에게 성리학을 배우고, 목은 이색(李穡).포은 정몽주(鄭夢周).권근(權近)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도학(道學)을 밝혔다.그가 여덟살때 금주지사(錦州知事,금산태수)인 아버지 길원진(吉元進)이 보성대판(大判)으로 임지(任地)에 나갈때,어머니 김씨(金氏:토산 김씨 희적의 딸)가 따라가면서 박봉으로 생활이 어려우므로,길재(吉再)를 외가에 맡겨두고 갔다고 한다.그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며, 남계(南溪)에서 놀다가,석별가(石鱉歌:돌가재 노래)를 지었다.길재는 외가 동네인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길재가 여덟 살때 이 동네에서 가재를 잡다가 지은 시가 석별가다."가재야 가재야 너도 어미를 잃었느냐. 나도 어미 잃었다 내가 너를 삶아 먹을 줄은 알지만,네가 어미 잃은 것이 내 처지와 같아 너를 놓아준다."하고, 물에 다 던져 주며 울고 있자,이웃 마을 사람들이 쫓아와서 끌어안고 감동하여 울었다고 한다.길재가 살던 봉계리(구미시 고아읍 봉한리) 마을 어귀에는 그를 기린 <삼강정려각>이 있다. 삼강정려각에는 봉한리 출신의 충신 길재,효자 배숙기(裵淑綺),조을생(趙乙生)의 처로 열녀 약가(藥哥)의 비와 현판이 있다. 봉한리 마을 안쪽 죽림사 위쪽에는 길재 유허비가 있으며, 길재의 초상은 구미시 도량동 밤실 사당내에 있다.길재(吉再,1353~1419.구미시 태생,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는 1386년(우왕12) 문과에 급제하고,1388년(우왕14)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성균관은 유교의 교육을 맡아보던 조선때 최고국립교육기관)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창왕때는 문하주서(門下注書:문하부(門下府)의 종7품 관직으로 문서.기록을 관장함)로 있었고,고려가 쇠망해가자,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조선 정종2년에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이방원(태종)이 그에게 태상박사(太常博士:태상시(太常寺)에 딸리어 제사 및 시호의 일을 맡아보던 정6품)의 벼슬을 내렸으나,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거절하고,고향인 선산(善山)에서 후배 양성에 힘썼다.세종 즉위원년인 1419년에 67세로 세상을 떠났다.그의 학통은 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에게 이어져 조선 성리학의 적통을 잇게 한 사림의 비조(鼻祖)가 되었다. 세종임금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등에 올려 신자(臣子)의 귀감으로 삼았고, 중종이후에는 포은과 함께 국가에서 묘지수호제사를 계속하고,숙종 어필시(御筆詩)등 역대왕의 찬시(撰詩)와 후대에 은전이 베풀어졌다. 야은 길재가 고려의 옛서울 개경을 둘러보고 고려를 회고하며 지은 시조 <회고가>가 지금도 전한다.<회고가>오백년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한필의 말)로 돌아드니산천(山川)은 의구(依舊:옛 모양과 다름이없음)한데 인걸(人傑)은 간 데 없네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어즈버--감탄사 "아~"의 옛말*태평연월(太平烟月)-세상이 평화롭고 안락함,연기에 어린 은은한 달빛으로 세상이 매우 태평한 모양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는 고려말을 대표하는 충신으로 꼽는다. 3은인 이들은 두문동 72현(賢)이지만, 개풍 광덕산의 두문동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두문동 72현은 고려 말의 충신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이다.길재(1353~1419)는 고려가 멸망하기 2년 전인 1390년(공양왕 2) 봄에 낙향했다. 그의 나이 38세로 벼슬은 종사랑(從仕郞)의 품계인 문하주서(門下注書:종7품)였다. 낙향의 명분은 "고향에 계신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였지만 실제로는 고려 왕조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는 가는 길에 황해도 장단현에 살던 이색(1328~96)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날밤의 대화를 이색은 <목은집>에 아래와 같이 남겨두었다고 한다."경서에 능통한 태학의 선비/ 귀밑털 새파란 급제(及第) 주서(注書)가/ 가족을 이끌고 고향 가면서/ 내 말을 듣자고 거듭 다지네/ 글을 읽으면 옛사람 따라갈 거고/ 책(策) 지으면 조정에 오를 걸세/ 벼슬은 뜬 것이니 서두르지 말게/ 저기 저 날아가는 기러기 보게나."이색은 젊은 길재에게 기러기를 가리켰고, 그 기러기에 마음을 실은 길재는 경상북도 선산의 금오산에 들어가 금오산인(金烏山人)이 되었다.창왕(昌王)때 문하주서(門下注書:종7품)가 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자 향리사람들이 그 효도를 칭찬하였다.조선이 개국한후 태종은 일찌기 태학관에서 시경(詩經)을 읽었던 동문인 관계로 그를 불러 정종(定宗)에게 아뢰어서, 봉상시박사(奉常寺博士:조선시대에 제향과 시호에 관한일을 맡아보던 관아로 박사는 성균관.홍문관.규장각 등에 딸린 정7품)의 벼슬을 주었으나,그는 사은숙배(謝恩肅拜)하지 않고 말하기를 "옛 정(情)으로 부르시니 왔을 뿐 벼슬하는 것은 재(再:길재)의 뜻이 아닙니다." 하니태종이 이르기를 "자네의 말은 삼강오상(三綱五常)의 불역지도(不易之道)이니, 그 뜻을 빼앗기기 어려우나 자네를 부른 사람은 나요 자네에게 벼슬을 준 분은 상(上:정종)이니 상에게 사의를 표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정종(定宗)이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우대하여 보내주고, 그 집에 대해서는 납세(納稅)와 부역(賦役)을 면제하여 주었다.세종이 즉위하자, 태종은 "길 재에게 아들이 있다 하니 불러서 등용시켜 길 재의 충성을 드러내도록 하라" 하여,길사순(吉師舜)을 불러 종묘부승(宗廟副丞:종묘는 조선조에 역대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왕가의 사당이며 부승은 고려때는 종3품에서 정9품이 맡아보던 관직임)에 제수하였다.길사순이 조정에 불려갈 때 길재(吉再)가 아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신하에게 먼저 예의를 베푸는 것은 삼대(三代:하.은.주나라)이후에 드문 일이다. 네가 초야에 있는데 임금이 먼저 부르니,그 은의(恩義:은혜와 의리)가 범연(泛然:차근차근한 맛이없음,데면데면함)한데 비할 것이 아니다. 네가 마땅히 나의 고려에 향하는 마음을 본받아서 조선임금을 섬겨라"하였다.특히 그는 김숙자(金叔滋1389~1456,시호는 문강.호는 강호산인.조선 전기의 문신.학자,1414년(태종14년)에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를 거쳐, 1419년(세종1년)식년문과(式年文科:3년마다 보던 정기 과거시험)에 병과로 급제함,세종 때 관직에 있다가 세조 즉위뒤인 1456년 벼슬을 버리고 밀양에 돌아가 후진양성에 전념함.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아 아들인 점필재 김종직에게 잇도록 하여 정주학을 발전시킴.김종직은 성리학의 종조)에게 성리학(性理學)을 가르쳐,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암조광조(趙光祖) 등으로 하여금 학통을 잇게 하여, 영남학파의 진수를 이루었으며,야은집(冶隱集)을 비롯한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충남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 소재의 청풍서원(문화재자료 제16호)에서는 야은 길재 선생을 배향(配享:학덕있는사람의 신주를 서원에 모시는것)하고 있다.충청도를 청풍명월(淸風明月)이라 하는 것은 청풍서원에 백세청풍비가 세워지며 그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또한 청풍사 앞쪽에 서있는 지주중류(砥柱中流)비는 야은 길재의 충절을 기리는 기념비이다. 이곳의 불이리(不二里)마을 이름도 야은과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야은이 불사이군(不事二君)으로 고려에 충절을 지킨 곳이라는 뜻이다. 야은은 경상도 선산에서 태어났지만,금산태수인 부친을 따라와 이곳에서 성장하여,이곳의 규수 신씨를 만나 장가를 들고 오래 머무른 곳이다.지주는 중국의 하남성(河南城)황하(黃河) 중류에 있는 지주산(砥柱山)을 말하는 것으로, 황하강이 범람할 때마다 탁류가 이 산에 부딪치나 쓰러지지 않는 데서,고려에 대한 충절을 굳게 지킨 야은 길재를 이 산에 비유하였다.경북 구미시 오태동에도 같은 "지주중류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 지정)가 류성룡의 형인 인동현감(縣監:종6품) 류운룡에 의해 세워졌으며, <지주중류> 네글자를 한강 정구 선생으로 하여금 중국의 "지주중류"비 묵본을 얻어와 음각하였다.처음의 비석은 해평군의 돌을 사용하였으나, 홍수로 매몰되어 193년 뒤인 1780년(정조 4) 경산군의 돌을 옮겨와 다시 세웠다고 한다."지주중류"는 중국의 명필 양청천(楊晴川)의 글씨라고 하며, 뒷면의 비문에는 당시 예조판서이던 서애 류성룡이 '야은선생지주비'를 음기하고,그 뜻과 후학에게 주는 교훈을 예찬한 글이 새겨져있다.해평길씨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한 토막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연대를 알 수 없는 길재의 영상(影像)에는 왼쪽 귀가 없다.선산(善山)에 은거(隱居)한 그에게 출사를 거듭 부탁하였으나 끝내 마다하자 임금은 사신에게 다음과 같이 하명함으로써 마음을 떠 보려했다. 응하지 않거든 목을 주거나 귀를 주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시켜 베어 오라고 했다.만약 귀를 베라고 선택하면 그것은 분명히 명분이 위선적인 불출사(不出仕)이니 목을 베어오고, 목을 베라고 선택하면 그것은 진실한 소신에 의한 불출사이니, 귀를 베어 오라고 은밀히 하명한 것이었다. 길재는 분명 불출사의 댓가로 목을 선택했기에 귀를 베어 갔다는 것이다.67살에 임종이 가까워지자, 부인 신씨(申氏)가 벼슬을 하고 있는 아들 길사순(吉師舜)을 불러 올 것을 권하자, "아비는 임금과 같은 것이다. 임금 옆에 있으면 아비 옆에 있는 것과 같아 아들은 없어도 있는 것이다."하며,쓸쓸히 일생을 마치고 경북 칠곡군 복삼면 오태동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묻혔다.그의 묘소 앞 강변의 단애(斷崖 :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에는 지주비(砥柱碑)가 있는데 중국 황하(黃河)의 탁류가 이겨내는 지주비를 탁본 떠와 그대로 전면(前面)에 새기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뒷면의 글을 지어 1587년(선조20)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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