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하위메뉴 바로가기

세계 孝 중심지 향한 첫 발, 인성교육과 뿌리의식 - 孝 !World

성씨유래검색

  • 성씨

    오(吳)

    문중

  • 유래

    우리나라 오씨(吳氏)는해주오씨(총131,399가구422,735명).동복오씨(총17,317가구55,517명).보성오씨(총18,229 가구 59,914명).강화.경주.고성.고창오씨(총5,285가구에 인구는16,716명).공주오씨(1,279명).광주오씨(952명).군위오씨(22,408명).금산.금성.김해.나주오씨(인구25,546명).낙안오씨(9,135명).남양.남원.낭산.능성.대구.대전.동래.덕미.동부.두원.밀양.보령.보성.삼가.서산.성산.성주.수원.순흥.안동.안성.여산.여주.연안.연일오씨(시조는 오흡으로 고려 때 전서를 지냄,인구는 393명).연주.영광.영원(시조는 오사충:1327~1406,고려말~조선초의 문신으로 조선개국 3등공신으로 호조전서를 지내고 영성군에 봉해짐)인구는 62명).예안.온양.울산.의성.장흥오씨(3,564명).전남.전주.제주.진원.진주.창원.청주.충주.파주.평산.평택.평해오씨(1,099명).학성.함녕.함안.함양오씨(인구26,339명).함평오씨(인구는 2,845명).함흥.해남.해명.혜조.화순(3,032명).황해.흥양오씨등71본관에 인구는 지난 2000년 조사에서 706,908명이었다.우리나라 오씨(吳氏)의 기원에 대해서 문헌 및 <해주오씨 대종회>의 자료에 의하면 중국 양자강 주변 연릉사람인 태백이 세운 오(吳)나라에 부차(夫差)라는 사람이 있는데 부차의 손자 루양(縷羊)이 천자로부터 오씨성(吳氏姓)을 하사(下賜)받고 오나라의 왕(王)이 되어 오나라를 다스렸기에 오씨(吳氏)가 시작되었다.우리나라 오씨의 비조(鼻祖:처음 시조)는 태백왕의 25세손인 오기의 45세손인 오첨(吳瞻:무혜공 武惠公)이 서기 500년(신라 지증왕 원년)에 중국에서 신라로 들어와 귀화하였으며 왕명으로 왕족인 김 종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2남 1녀를 낳고 함양에서 21년을 살다가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는데 이때 둘째 오응(吳應)이 어려서 따라가지 못하고 함양에 살았다고 한다.또한 <동복오씨 대종회>의 기록에 의하면서기 500년(지증왕1년,경진)년에 오첨(吳瞻)이 중국으로부터 바다에 떠서 우리나라 해남땅에 이르렀는데 첨사(僉使) 이상보(李相輔)가 재화와 보물을 빼앗아 숨겼으며 후에 그 사실이 들통나 외국사람이 경내에 들어온것을 보고하지 않은 죄로 첨사 이상보는 목을 베이고 오첨(吳瞻)을 불쌍히 여겨 신라에 머무르게 하였다고 한다.뒤에 오첨(吳瞻)은 왕명으로 함양(咸陽) 김종(金宗)의 딸과 혼인하여 2남1녀를 낳았다.서기 522년(법흥왕 9)에 오첨(吳瞻)이 장남 오긍(吳肯)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가고 둘째 아들인 오응(吳膺)은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갈 수 없어 모부인 김씨와 자형인 석성(昔成)을 받들고 함양에 살면서 우리나라 오씨(吳氏)의 시원이 되었으며 오응(吳膺)은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문.무(文武) 벼슬을 대(代)마다 이어와 우리나라의 성족(盛族)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오씨(吳氏)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210본까지 기록되어 있으나,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에는 해주오씨.동복오씨.보성오씨.고창오씨.나주오씨.함양오씨.함평오씨 등을 비롯하여 20여본이 전한다.2000년 인구조사에서는 총 71본으로 조사되었으나,해주.동복.보성오씨에서 대부분 분적한 오씨(吳氏)로 그 뿌리는 같다.해주오씨는 크게 두파가 있다.신라 지증왕 500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오첨을 비조로 하여,서기1216년에 거란을 물리치고 해주군에 봉해진 오현보의 후손인 해주오씨와 보성오씨.동복오씨.나주오씨.연일오씨.장흥오씨.전주오씨.함양오씨.흥양오씨.낙안오씨 등 대다수가 오첨를 비조로 받들고 있는 같은 뿌리이다 .그후 오첨의 11세손인 오희(吳禧)는 3남1녀를 두었는데, 딸은 고려 태조의 왕비인 장화황후가 되고, 오희(吳禧)는 국구(國舅,장인)가 되어 다련군에 봉해졌으며,장화왕후는 고려 2대 임금인 혜종의 모후가 된다.또한 다련군의 아들은 각각 금성백(錦城伯).수양백(首陽伯).천령백(天嶺伯)에 봉해져 고려시대에는 수양오씨로 부르게 되었으며 문양공을 중시조로 여겼다.그후 오첨의 14세손 오광우가 족질 오우경과 980년에 송나라에 들어가 성도임앙(현 사천성)에 살았는데,후손 오연총(吳延寵:오첨의 18세손)이 1076년(문종30)에 다시 고려에 들어와 정착하여 살면서,예종때 원수 윤관과 함께 부원수로써 여진을 정벌하고,중서시랑평장사(정2품부총리)이르렀다.시호는 문양공(文襄公)으로 문무(文武)에 걸쳐 나라에 충성하여해주오씨 가문의 명예를 드높였다. 오연총(문양공)의 6세손인 오수권(吳守權)의 세 아들이 오현보(字:應夫),오현좌(字:應儒),오현필(字:應男) 3형제가 1216년(고종3) 거란을 토평한 공으로,오현보는 해주군,오현좌는 동복군,오현필은 보성군에 봉해져 각각 해주.동복.보성오씨로 분적하였다.해주군 오현보는 비조 오첨으로부터 24세손이며 관직은 1199년에 낭장(?將:정6품무관)으로 명주민란을 진압하여 공을 세웠으며,그뒤 상장군(上將軍:정3품)에 올랐고,1224년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참지정사(종2품재신)로 있을때 사망했다.또 한파는 오인유를 시조로 받드는 해주오씨다.오인유는 본래 중국 송나라때 이름 높았던 대학사(大學士:고려때는 보문각.수문전의 종2품 문형)로984년 고려에 들어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병기의 제조 등을 관장한 관청으로 1362년(공민왕11) 군기시를 개칭함.직제는 재상급이 맡는 도제조 1명,병조판서.참판중에서 1명,무장중에서 1명 등 제조2명으로 구성됨.검교는 벼슬앞에 붙이는 명예직)을 역임하였고,황해도 해주에 정착하여 살았으므로,후손들이 해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목록
만족도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

자료관리 담당부서 : 효문화마을관리원 > 뿌리공원과 > 뿌리공원담당 연락처 : 042-288-8312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