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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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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공자(海東孔子) 최충의 문헌공도는 우리나라 사학의 효시조선시대에 262명이 과거급제,3대(代)에 걸친 재상최윤의(崔允儀)가 지은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은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본<보안집>의 저자인 대제학(大提學) 최 자.국가의 원호 최유엄해주최씨(海州崔氏)는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유명한 최충(崔沖)의 아버지 최온(崔溫)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최온(崔溫)은 해주의 목민관(牧民官:수령)으로 선정을 베풀었으며 문명(文名)이 높아 뒤에 판이부사(判吏部使:판상서이부사로 재신이겸임)를 역임하고 해주의 수양산(首陽山)아래서 세거하여 해주최씨(海州崔氏)의 문호를 열었다.해주최씨는 수양산 밑에서 시조 이후의 후손들이 오랜동안 세거하였기에, 그곳의 별칭인 고죽군을 따서 '고죽최씨'라고도 한다.해주최씨(海州崔氏)는 특히 고려시대에 많은 학자와 명신(名臣)을 배출하였으며,조선시대에도 문과 급제자 49명 등 총 262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최씨는 오랜 역사를 지닌 성씨의 하나로 신라시대 이래 많은 인물을 배출해온 뿌리 깊은 명벌(名閥)이다.특히 해주최씨는 고려시대에 가장 빛을 발한 가문으로 일부 역사가들은 "고려의 역사는 곧 해주최씨의 역사"라고 까지 말하기도 했다.해주최씨는 황해도의 대녕군(大寧郡:해주의 옛 이름)에서 조상 대대로 학문을 숭상하고 행실을 돈독히 하여 마침내 시조 최온(판이부사 지냄)대에 이르러 문명을 떨쳐 세상사람들은 장자(長子)라 칭송했다고 한다.특히 뒤를 이은 2세 최충(崔沖:문헌공)은 동방유학의 비조(鼻祖)로 추앙받는 인물이다.최충은 서기 1005년 (목종8) 20세의 나이로 갑과(甲科)에 장원급제하고 1013년(현종 4)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서책의 찬술과 편집 담당관)이 되어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실록편찬에 참여했다.이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내사문하성의 정3품 낭사),형부상서,중추사를 지내고 1047년(문종1)에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 정승)에 올라 고려 형법의 기틀을 다졌고 농번기때의 공역금지와 국가재정 낭비를 금 하도록 상소하여 이를 실행케 하였다.1053년(문종 7)에 궤장( 杖:국가에 공이 있는 70세이상 2품관 국가원로에게 궤장연에서 왕이 내리던 안석과 지팡이)을 하사받고,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종1품 문관 품계)로 수태사(守太師:3공의 하나로 정1품명예직)겸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 정승)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이어 상주국(上柱國:2품이상에게 내리는 최고의 훈호),1055년(문종9)에 내사령(內史令:종1품품계)으로 치사(致仕:벼슬을 사양함)한뒤 사숙(私塾:학문을 사사로이 가르치던곳)을 열어 수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그의 제자들을 문헌공도(文憲公徒)라 했다.그는 학문에 진력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개경의 송악산 기슭에 문을 연 9재학당(九齋學堂)은 수 많은 영재를 배출하였으며 마침내 해동공자(海東孔子)의 칭호와 함께 최고의 관작(官爵)을 받아 명성을 떨쳤다.9재학당은 우리나라 사학(私學)의 효시가 되어 4대 왕조 50여년간 권력과 유학의 중심이었으며 서기 1068년(문종22) 9월에 최충이 사망하자 시호를 문헌(文憲)으로 내리고 정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문헌공 최충(崔沖)의 아들 최유선(崔惟善)과 최유길(崔惟吉)형제 역시 당대의 뛰어난 인물들로 관직으로는 아버지 최충 못지 않은 명성을 떨친 인물들로 아버지 최충(崔沖)이 휴훈으로 남긴 계이자시(戒二子時)를 받들어 이 유훈은 현재까지 해주최씨의 정신적 규범으로 삼고 있다.최유선은 지공거(知貢擧:과거시험 감독관으로 학사가 겸임함)를 겸임하였으며 형부상서(정3품 장관)를 역임하였고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종2품)때는 회장사로 금나라에 다녀왔으며 문하시랑(門下侍郞:정4품 차관)을 거쳐 문하평장사(門下 平章事:문하부의 정2품부총리)에 이르렀다.그는 학문이 깊고 사리에 밝아 수태위 중서령(中書令:종1품 문하시중을 지낸사람이 맡음)에 추증되었다.최유길은 호부상서(戶部尙書:정3품 장관),태자빈객(太子賓客:동궁에 있는 정3품),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상서도성의 정2품 백관을 통솔함)를 거쳐 서기 1077년(문종31)에 수사공(守司空)으로 상서령(尙書令:6부를 관장하던 상서성의 으뜸 종1품)에 올랐다.최유길의 아들 최사량은 18세때문과에 급제하고 공부시랑(工部侍郞:정4품 차관)으로 사은사(謝恩使:나라에 호의를 베풀때 중국에 가던 사신)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와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왕명을 출납하고 궁중의 숙위를 맡던 중추원의 중추원의 종2품)로 지공거(知貢擧:과거시험의 시관)를 겸했고 1086년(선종3)에 중추원사(中樞院使:정령을 출납하던 중추원의 2품)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에 올라 명문 유학자로서의 전통을 이었다.동생인 최삼추는 서경부유수(留守:2품 지방장관)를 지내고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중추원의 종2품),좌산기상시를 비롯한 여러관직을 역임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한 종1품 정승)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그는 보정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예종때 중서령(中書令:종1품 문하시중을 지낸후 임명되는것이 보통임)으로 치사(致仕: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함으로써 3대에 걸쳐 재상(宰相)을 배출하여 유명하였다.이후 최약은 예부상서(禮部尙書:정3품장관)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를 지냈으며최원은 우복야(右僕射:상서도서의 정2품)에 올랐고 최관은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왕명을 출납하던 추밀원의 종2품),평장사(平章事:중서문하성의 정2품),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정2품)를 지내고 판삼사사(判三司事:종1품 재상이 겸하던 으뜸벼슬)에 올랐다.최주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정령을 출납하던 추밀원의 정3품),태자빈객(太子賓客:고려때 동궁에 딸렸던 태자소보 다음 정3품),병부상서(兵部尙書:정3품 국방장관)와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재신)를 역임한 후 1140(인종 18)년 판형부사로 김부식과 함께,시폐의 시정책을 상소하였고,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 부총리)에 올라 유명하였으며 태자태부(太子太傅:태자궁의 태자 스승 정1품)에 올랐다.또한 최충의 5대손으로 최약의 아들인 최윤의(崔允儀)는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부총리),판이부사(判吏部事:판상서이부사의으뜸으로재상이 겸임)를 지냈으며,그가 고종때 지은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50권)은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유명하다.최윤의의 손자 최자는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경연과 장서를 맡아보던 관아.대제학은 종2품)을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정2품부총리)를 지내고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 부총리)로 치사(致仕: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했으며 시문(詩文)에 뛰어난 당대의 문장가로 저서 <보안집>이 유명하다.고려시대에 해주최씨를 더욱 빛낸 인물은 평장사(平章事:중서문하성의 정2품부총리) 최자의 셋째아들인 최유엄이다.그는 명예를 탐하지 않고 성품이 담박하여 충렬왕이 그의 명성을 듣고 1274년에 즉위하면서 그를 감찰잡단에 제수하여 4왕조에 걸쳐 국가의 원호가 되어 대를 이어 명성을 떨쳤다.조선시대에 최황은 함경도 암행어사로 나가 지방의 구제대책 8조를 상소했으며 좌찬성(左贊成:의정부 종1품)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추증되었다.세종때의 문신이며 학자로 청백리에 녹선된 최만리(崔萬理)는 최충의 12대손으로 부제학(副提學:경서와 사적의 관리.문한의 처리 및 왕의 자문 기관인 홍문관의 정3품)이 되었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1444년(세종26) 훈민정음 창제시 6조목의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그밖에 선조때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를 지낸 최황(崔滉)등이 있고 조선시대에 영의정(領依政:정1품 정승)에 오른 최규서(崔奎瑞)가 있다.또한 선조 즉위년인 1567년에 진사(進士:소과와 진사과에 급제한 사람)로 식년문과(式年文科:식년마다 보던 과거 즉 3년마다보던 과거)에 급제하고 무주군수(郡守:종4품수령)로 재직시에 전북 장수 출신 주논개(朱論介)를 후처로 둔 최경회가 유명하다.최경회는 1590년에 모친상을 당하였고 3년 탈상전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그때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이 전사하자 상복을 입은채 '전라우 의병장'에 추대되었다.그해 10월에는 제1차 진주성 전투를 지원했으며 12월 개령전투를 지휘하여 공을세움으로써 공로가 인정되어 1593년 4월 21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節度使병마를 지휘하던 종2품 병사.절도사)로 임명되었다.그는 6월15일 진주성으로 들어왔다.6월21일부터 시작된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한 최경회는 김천일 등과 함께 9일간의 치열한 전투에서,결국 1593년 6월29일 성이 함락되고 약 3만명이 전사했다.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는 이곳에서 진주성 함락의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남편 최경회를 따라와 있던 부인 주논개는 진주성 함락의 책임을 지고 자결한 남편의 고결한 뜻을 이어 받고자 했다.혼자 죽는것은 무의미했다.왜병하나라도 죽인 다음 목숨을 끊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때 마침 진주성을 함락하는데 성공한 왜군은 성대한 전승 축하연을 계획했다.그리하여 왜군은 그때까지 살아남은 진주기생들을 총 동원 춤과 노래와 교태를 안겨줄 여자가 필요했다.이 사실을 알게된 논개는 하늘이 내린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이고 기생으로 가장했다.논개의 결심을 도와준 왜장은 우연스럽게도 용맹을 떨치던 게야무로 로쿠스케였다.왜의 장수 로쿠스케를 유인한 주논개는 술에 취한 그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 순국한다.주논개(朱論介:1574년 출생~1593년 7월7일)는 그간 알려진 것처럼 기생이 아닌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후실이다.서기 1593년 음력 7월7일 주논개는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忖六助)를 껴안고 남강으로 뛰어든 논개의 죽음은 침략군과의 목숨을 건 전쟁터에서 나타난 최고의 민족적 결단과 행위인 만큼 그 논의와 평가는 신중해야 한다.스스로 창기(娼妓)로서 받아야 할 오해와 모멸을 무릅쓰고 반외세 조국전쟁의 목적에 자원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고 근대적이다.그러나 논개의 충(忠)이 나라와 친정,시댁 모두로 부터 외면 당하자 진주의 민초들이 들고 일어나 순국의 현장에다 의암(義巖)이란 두글자를 새기고 사적비를 세워 가슴속의 애인으로 삼았다.논개의 의거 1백47년만에야 조정으로부터 의암부인(義巖夫人)이란 칭호가 내려졌다.주논개는 전북 장수군 내면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아버지는 주달문,어머니는 경상도 안의현이 고향인 밀양박씨 이며 논개의 본관은 신안이다.(자료 참고-시인 정동주)논개 6대조부터 경상도 안의현 서상면 방지마을에 정착했으며 할아버지인 주용일 때에 전북 장수현 내면 주촌마을에 이주했으며 현재도 경남 함양군 서상면 방지마을에는 신안주씨들이 살고있다.주논개의 죽음을 맨처음 기록한 문서는 류몽인의 <어우야담>이다.류몽인은 1593년 윤 11월 무군사(撫軍司) 관원으로 세자를 따라 삼남지방에 왔다.그는 진주전투에서 죽은 사람들의 명부 작성과 유족들에게 양식을 지급했다.이처럼 무군사는 군사 모집과 훈련외에 전몰가족의 조사와 위문하는 일도 겸했다.이듬해인 1594년,류몽인은 다시 삼도순안어사(三道巡按御使)로서 진주에 와서 진주사람들로부터 전해들은 주논개의 순국사실을 채록하여 작성한 것이 "어우야담"이다.해주최씨 인물로 조선조에 율곡 이이.구봉 송익필과 함께 <8문장>으로 일컬어 졌고 시와 문장에 뛰어났던 최경창(崔慶昌:1539~1583)은 당시(唐詩)에도 능하여 '삼당파'라고 일컬어졌다.그는 1568년(선조1) 증광시문과(增廣試文科:나라에 경사가 있을때 기념으로 보던 과거)에 급제하여 대동도찰방(大同道 察訪:역참에 관한일을 맡아보던 종6품)을 지내고 종성부사(鍾城府使:정3품)를 지냈다.1583년 방어사(防禦使:경기 이북지방의 각 도에 두어 병권을 장악하고 요지를 지키게 했던 종2품무관)의 종사관(從事官:군영의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44세의 아까운 나이로 죽었다.그는 시(詩)와 서화(書畵)에 뛰어났으며 피리도 잘 불었다고 한다.숙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문집에 고죽유고(孤竹遺稿)가 있다.최규서는 숙종때 별시문과(別試文科:나라에 경사가 있을때나 10년마다 중시에 보던 부정기 과거)에 급제하고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던 3사의 하나로 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을 지내고,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최규서는, 형조와 이조판서(判書:정2품장관)를 거쳐 소론(少論)의 영수로써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올라 가문을 크게 빛냈다.해주최씨는 고려.조선조에 걸쳐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해주최씨(海州崔氏)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사정공파(司正公派).교리공파.직제학공파, 문정공파(文貞公派).집의공파.대령군파(大寧君派).서운부정공파(書雲副正公派).전서공파.현감공파.좌랑공파(佐郞公派).생원공파(生員公派).진사공파.전한공파(典翰公派).현감공파.판사복시공파(判司僕寺公派).승지공파(承旨公派).진사공파(進士公‘윤망尹望‘파派).장사랑공파.진사공파(進士公‘윤탁尹卓‘파派).좌윤공파.감찰공파.사평공파(司評公派).소윤공파(少尹公派).전서공파(典書公,하파河派).해능군파(海陵君派).복야공파.현감공파(懸監公,우파瑀派)등으로 분파되었다.해주최씨(海州崔氏)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49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였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로 나뉘었음)에 46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시험)에 161명,역과(譯科:잡과의 하나.중국어.몽고어.일본어.여진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아 쓰기 위하여 보이던 과거)에 2명,의과에 2명,율과(律科: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던 잡과)에 2명 등 262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인구조사에 의하면 해주최씨(海州崔氏)는1985년 38,628가구 161,782명이었으며,2000년에는 56,592가구181,840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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