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하위메뉴 바로가기

세계 孝 중심지 향한 첫 발, 인성교육과 뿌리의식 - 孝 !World

성씨유래검색

  • 성씨

    탁(卓)

    문중

    탁(卓)

  • 유래

    탁씨(卓氏)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광산(光山)을 비롯하여 광주,남양(南陽),안산(安山),양근(陽根),가평,용인탁씨 등 32본까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 광산 탁씨(光山卓氏)의 세거지명이며 현존하는 관향은 광산 단본으로 알려져 있다.지난 2000년 조사에서는 광산탁씨(15,691명)등 총 19,395명이었다.탁씨가 문헌에 등장한 것은 전국책(戰國策)에 초(楚)나라 대부(大夫) 탁활(卓滑)이며, 그의 후손 태부(太傅:정1품 명예직)를 지낸 탁무(卓茂)는 후한의 초대황제 광무제(기원전 6~57년)에 의해 포덕후(褒德候)로 봉해진 사람이다. 그의 후손 탁왕손(卓王孫)에게 탁문군(卓文君)이라는 딸이 있었다. 전국책(戰國策)은 전한시대의 유향이 기원전(475~222) 전국시대의 제후국 전략가들의 책략을 모아 집록한 자료이다.당시 촉군성도(蜀郡成都) 태생의 사마상여(司馬相如)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전국시대에 뛰어난 정치가였던 인상여(藺相如)를 흠모하여 후에 이름을 상여로 고쳤다고 한다.사마상여(司馬相如,기원전 179~117년)는 자(字)는 장경(長卿)이라 했으며 촉군(蜀郡) 성도(成都, 현재사천성성도군) 출신이다. 그는 말더듬이었으나 부작(賦作)에 뛰어났다고 하며 경제(景帝)때는 무기상시(武騏常侍)가 되었으나 경제가 사부를 좋아하지 않아 병을 핑계로 양왕(梁王)의 문하가 되었다.그는 친구 왕길(王吉)이 현령으로 있는 임공(臨 )에 찾아가 머물러 살기로 했다. 왕길의 소개로 임공의 제일가는 갑부 탁왕손(卓王孫)을 알게 되었는데 탁왕손은 가동만 8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어느날 탁왕손의 집에서 연회를 차리고 고을의 유명인사들을 초청했다.사마상여도 초대한 잔치에서 이때 사마상여가 거문고로 연주한 유명한 곡이 봉구황(鳳求凰)이다.봉구황은 한나라 문인 사마상여와 탁문군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다. 제목은 사마상여가 탁문군을 그리는 마음을 수컷 봉황새가 암컷 봉황을 찾는 것에 비유해 쓴 시의 제목이다.<봉구황>봉(鳳)이 고향에 돌아와황(凰)을 찾아 천하를 날아다녔구나.때를 만나지 못해서 여태 찾지 못했으나오늘밤 여기에 올 지를 어이 알았겠는가.아름다운 여인이 규방에 계시나니 방은 가까운데 사람은 멀어 애간장을 태우는구나.어떠한 인연이면 그녀와 한 쌍의 원앙이 되어함께 저 높은 하늘을 날 수 있을까황이여, 황이여, 나를 따라 둥지를 틀어다오꼬리를 비비며 영원한 짝이 되리니정을 나누고 몸이 통하고 마음이 하나되니깊은 밤 서로 따르며 좋게 지낸들 그 누가 알리오두 날개를 활짝 펴고 높이 날아올라서더는 나를 슬프게 하지 마오.임공갑부 탁왕손에게는 탁문군(卓文君,원명은 문후 文后)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천하 절세미인에다가 시와 문장, 그리고 음악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17세때 혼례식을 올리고 몇달못가 갑자기 신랑이 죽어 졸지에 과부가 된다.탁문군의 오빠 탁문웅의 친구인 사마상여는 손님으로 혼례에 참석했었는데 탁문군의 비극을 듣고 그녀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된다탁왕손이 연회를 벌릴 것을 사전에 안 사마상여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방법을 꾀했다. 가사 중 마지막 세 구절은 사실 탁문군에게 야반도주하자는 요청이었다.음률에 정통했던 탁문군은 사마상여의 <봉구황>을 듣고 바로 그 뜻을 알 수 있었다.이로 말미암아 그녀는 상여의 재화(才華)와 기도(氣度)에 빠지게 되었다.그날 밤 탁문군과 상여는 밤을 새워 사랑을 확인하였다.두 사람은 주위 사람들이 모두 잠든 틈을 이용하여 역사적으로 그 유명한 성도(成都)로의 야반도주를 하게 되었다.자기 딸이 다른 남자와 함께 달아났다는 것을 알게 된 탁왕손은 크게 화가 나서 자기 딸에게는 한 푼의 돈도 주지 않았을 뿐더러 평생 동안 다시는 상봉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원래 가난했던 사마상여는 탁문군을 데리고 성도(成都)로 갔으나 결국은 생활고에 못이겨 다시 임공(臨 )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조그만 상점을 내어 옷가지 등을 팔아 연명하다가 결국엔 조그만 주점을 하나 차리게 되었다.하지만 그들의 생활은 간신히 허기만을 면할 수 있을 정도로 여전히 가난하게 살아야했다. 탁문군도 손수 손님을 접대하며 술을 팔았고 사마상여는 짧은 바지를 입고 주점 내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장사를 해야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탁왕손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고 다시 수치심이 극에 달하여 두문불출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친한 친구가 찾아와 탁왕손에게 충고했다. "자네가 딸에게 돈을 주지 않아서 체면을 잃고 있는데 그건 자네의 체면도 잃는 게 아닌가 사정이 어떻든 자네 딸임에는 부인할 수 없으니 딸에게 돈을 주게나,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아닌가 " 탁왕손은 할 수 없이 훗날 딸에게 많은 재산을 주고 주점을 거두게는 했으나 그래도 딸과 사위의 내왕은 허락하지 않았다.상속으로 부유해진 사마상여는 7대 황제 한무제의 총애를 받게 되었으며 궁정문인으로 많은 명작을 남겼다. 탁문군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한나라 최고의 문인(文人)으로 등극한 이들의 사랑이야기는 유명하다.지금도 사천성 공래현( 崍縣) 성내의 문군공원(文君公園) 경내에 문군정(文君井)이란 우물이 있는데 이것이 당시 사마상여와 탁문군이 주점을 차렸을 때 사용하던 우물이었다고 전해진다.당나라 문헌에는 호부상서(정3품 장관)를 지낸 탁득경,학자인 탁위,탁종,탁유,화가 탁적,시인(施人) 탁운,탁자신 등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우리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탁씨 성을 가진 인물은 고려 경종(976~981)때 탁사정(卓思正)으로 알려졌다.그렇다면 탁사정은 광산탁씨 시조의 선조가 된다. 광산탁씨 대종회보에도 탁사정공으로 표현하며 시조 이전의 연원을 추정하고 있다.탁사정은 현종 2년(1011년)에 어사중승(御史中丞:중승은 어사대의 종3품으로 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어사대가 사헌부로 바뀌면서 어사중승으로 불렀으며 1308년에는 정3품으로 승격되었고 1401년(태종1)에 집의로 바뀌었음)이 됐으나 강조(康兆)의 무리였다는 이유로 유배되어 은거하였다.탁사정으로부터 시조 탁지엽이 등장하기까지 90여년 동안은 공백으로 있는데,이는 탁사정이 유배됐던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광산탁씨(光山卓氏)의 시조 학포(學圃) 탁지엽(卓之葉)은 고려 선종때(1083~1094년) 학행(學行)으로 널리 알려져 종유(宗儒)로 추대되고 한림학사(翰林學士:한림원,수문전의 3품에서 4품으로 뛰어난 문신중에 임명함)를 거쳐 태사(太師정1품)에 이르렀다. 탁지엽(卓之葉)의 자는 옥립(玉立), 호는 학포(學圃)이며 광산 탁씨(光山卓氏) 세보에 의하면 그 선계(先系)는 중국인으로 한나라 때 포덕후(布德侯)에 봉해진 인물이라고 한다.그는 태사(太師:정1품)에 이르러 광산군(光山君)으로 봉해졌으며 문성(文成)이란 시호(諡號)를 제수(除授:추천을 받지않고 임금이 벼슬을 바로 내려줌)받았다.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을 광산(光山)으로 하고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특히 고려조에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시켰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목록
만족도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

자료관리 담당부서 : 효문화마을관리원 > 뿌리공원과 > 뿌리공원담당 연락처 : 042-581-4445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