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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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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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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는 강원도 남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677년(문무왕17)에 북원소경이었으며,757년(경덕왕 16)에 북원경으로 고쳤다.1895년(고종32) 지방제도 개정으로 23부를 실시함에 따라 강원도의 감영이 폐지되고 충주부 소속의 원주군이 되었다가,이듬해인 1896년에 도제(道制) 실시로 강원도 원주군이 되었다.1955년 원주읍이 원주시로 승격되고 나머지는 원성군이 되었으며 1995년 원주군이 원주시에 통합되었다.[원주변씨족보]와 문헌에 의하면 중국 송나라말에 고려 황주(黃州)에 귀화 한 변요의 아들 변여(邊呂)가 태천백에 봉해졌다.그의 현손(玄孫손자의 손자) 변순(邊順)은 서기1268년(원종9) 사신 탈타아를 수행하여 원나라에 가서 심양의 장수로 있다가 심양후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변양(邊諒)이 이를 계승하였다.변안렬(邊安烈:1334~1390,호 대은)은 변 양(邊諒)의 둘째 아들로 원나라의 원수(元帥:군대를 통솔하던 주장 主將,군인의 가장 높은 계급)로 있다가 노국공주(또는 심양에 있던 공민왕을 호종하여 왔다고도 함)를 배행(陪行:윗 사람을 모시고 따라감)하고 귀국하였으며 서기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을 격퇴시켜 이등공신으로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고려 때 소부감의 3품 벼슬)에 올랐고,이듬해 경도를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추성보조일등공신에 책록되고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고려 때 밀직사의 종2품)가 되었다.1376년(우왕2)에는 '추충양절선위익찬보조공신'로서 이성계,유실 등과 함께 운봉,부령 등지에서 왜구를 소탕하여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1369년(공민왕 18)공민왕이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자주적 노력으로 기존의 첨의찬성사를 고친 문하부의 종2품).문하평리(門下評理:공민왕 18년(1369)에 참지문하부사를 고친 것으로 고려시대 문하부에 속한 종2품)에 올랐다.그는 한방언과 함께 단양과 안동에 침입해온 왜구를 격퇴시켜 원주부원군(原州府院君)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삼사의 으뜸벼슬로 재신이 겸임함)에 이르렀으나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고 쫓겨난 우왕을 복위 시키려다가 김 저와 함께 죽었다. 그는 공민왕의 인척인 원주원씨(原州元氏)의 딸과 혼인하여 원주에 정착하였다.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받들고 원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변안열[邊安烈,1334(충숙왕 복위 3)~1390(공양왕 2)]은 고려말의 무신으로 자는 충가(忠可),호는 대은(大隱)이며 심양(瀋陽)사람이다. 원나라 말기에 병란으로 당시 심양에 가 있던 공민왕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 원주(原州)를 본관으로 하사받았다.1380년(우왕 6) 충남 서천과 전라도 남원 구례 쪽으로 왜구들이 대거 침입해 들어왔을 때를 역사의 기록에는 황산대첩으로 불리는데 당시 변안렬 장군은 양광. 전라. 경상 3도를 관장하는 도체찰사(都體察使정1품)였고 휘하의 이성계가 3도 순찰사(정2품)였다.그해 9월 운봉 월인역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치고 변안렬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개선하자 임금은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 정승) 최영으로 하여금 천수문(天壽門채색한 누각)을 설치하게 하고 백관들을 도열시켜 장군을 맞도록 했다. 그때 변안렬은 이성계와 함께 금 50냥을 상으로 받았다.부원수가 되어 최영과 함께 제주를 평정한 뒤 지문하부사,문하평리(종2품)가 되었으며 우왕 때 '추충양절선위익찬공신'에 책록되었고 양광.전라도 도지휘사 겸 조전원수로 있을 때 나세,조사민,유실과 함께 부령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쳐 문하찬성사(정2품)로 승진되었다. 1380년 양광.전라.경상도 등 3도 체찰사가 되어 도순찰사 이성계와 함께 운봉과 횡산에서 왜적을 크게 물리친 뒤 정방제주가 되었으며 단양과 안동에서 왜적을 물리친후 원천부원군에 봉해졌고 판삼서사, 영삼사사가 되었다. 1389년(창왕 1) 대호군 김저 등이 이성계 제거와 우왕 복귀를 모의한 일에 연루되어 우현보,이색 등과 함께 한양으로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다. 그가 한양유배소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읊은 시 4수가 전하는데 그 중에 "내가 고려에 거주한 지 40년 정충직절을 홀로 펴기 구하였노라. 화산의 인월역에서 개가를 전하고 위화도 탐라에서 의로운 깃발 올렸노라. 새 임금을 대대로 모시어 하늘의 은총 오래되니 훈공 1등에 명망이 새롭구나. 어찌하여(이하 5자 결) 아직도 중흥을 생각치 않으니 누가 본 떠 따르겠는가" 라고 읊으니 그의 일편단심 우국충정을 표하고 있어 높은 기상을 알 수 있다.특히 이방원의 "하여가"에 답하여 정몽주의 "단심가"와 더불어 김천택의 <청구영언>에 전해오는 "불굴가"가 그의 시로 밝혀졌다. 변안렬의 묘는 경기도 진건읍 용정리에 있으며 그의 신도비 이수에는 일월도가 그려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불굴가(不屈歌) 변안열(邊安烈)의 시(詩) 가슴팎 구멍뚫어 동아줄로 마구꿰어 앞뒤로 끌고당겨 갈켜지고 쓰릴망정 임향한 그 굳은뜻 뉘라서 굽이랴.원주변씨는 별좌공파.참의공파.첨추공파.남부령공파.호군공파.참판공파.감찰공파.군수공파.부마공파.사용공파.중랑장공파 및 여러 소문중으로 나뉘어졌다.원주변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31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로 3년마다 실시되었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였음)에 40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68명,역과(譯科:중국어.몽고어.일본어.여진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아 쓰기 위하여 보이던 과거)에 32명,의과 29명,음양과(陰陽科:천문.지리.명과학(命課學)에 밝은 사람을 뽑던 과거)에 5명,율과(律科: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던 잡과의 한가지)에 3명,주학 3명 등 모두 211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원주변씨는1985년에는9,698가구에,39,605명이었고,2000년에는 11,503가구 37,505명이었다.시조 변안렬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 704-1에 있으며묘역은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16호로 지정되었다.변수(邊脩:1447~1524)묘에서 출토된 묘지(墓誌),요선철릭당시의 상.장례풍습 연구 및 복원유물로서의 가치가 높아 중요민속자료 제264호>로 지정되었다.1997년 11월 경기도 양평읍 창대리에 있던 변수(邊脩:1447~1524)묘에서 목우(木偶) 22점이 출토되었다. 변수묘는 원주 변씨의 선산을 양평읍이 신시가지 조성 계획에 따라 도로로 수용하여, 이곳에 있던 20여기의 분묘를 이장하기 위해 파묘(破墓)하였다. 회곽(灰槨)에 싸인 외곽(外槨)과 내관(內棺)이 출토되었으며, 외곽과 내관 사이에서 22점의 목우가 출토되었다. 이들 목우는 1997년 출토된 복식 유물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할 때 함께 기탁되었다. 변수는 1447년(세종 29년)에 태어나 1524년(중종 19) 78세로 사망하였으며 변수묘는 변수와 그의 아내 밀양박씨(密陽朴氏)의 합장묘이다.출토 당시 이들 목우는 외곽과 내관 사이 운삽과 함께 놓여져 있었고 매우 축축하게 목재가 젖어 있었다.이들 목우는 6~10cm되는 작은 목재를 정교하게 깎아 만든 것으로 관복을 입은 남자 2점, 평상복 차림의 남자상 7점,여자상 4점,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여자상 4점,소녀상 1점과 말 4점으로 이루어졌다. 의복과 관모, 머리모양,옷의 선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당시의 복식 규모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하는 여자상은 조선시대 향악(鄕樂)의 변천 및 그 변화 과정을 알 수 있다. 흔히 명기(明器)라고 하면 나무로 만든 것보다는 자기나 토기 등으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매우 드물다. 지금까지 보고된 명기로서의 목우는 그 예가 매우 희소할 뿐 아니라 제작 연대의 추정도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변수 묘에서 출토된 목우는 그 수량에 있어서는 물론이거니와 그 종류 역시 다양하여 기존의 도기나 토기중심의 명기 연구와 다른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목우(木偶)는 나무를 깎아 만든 사람모양의 인형으로 명기의 일종이다. 명기는 죽은 사람의 내세 생활을 위해 무덤에 함께 부장하는 기물을 말하며, 작은 크기로 만든 동물이나 사람, 각종 그릇, 악기, 기구 등을 총망라한다. 사람 모양의 명기는 특히 명기비자(明器婢子)라고도 부르며 사람 대신 무덤에 넣었던 것이다. 변수묘 출토 유물(일괄)은 피장자(묘주) 변수의 생몰년(1447~1524)과 피장시기가 명확하며, 16세기 초의 복식, 목인형 명기, 묘지(墓誌) 등 다양한 부장품으로 이루어져 당시의 상.장례풍습 연구 및 생활상 복원 유물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국립민속박물관은 국내 처음 실물로 발견된 조선초 사대부 복식인 "요선철릭"을 포함한 변수(1447~1524)묘에서 출토 된 기증유물 7점을 지난 2000년 박물관 상설전시장에서 일반에게 선보였다.전시된 유물은 지난 1997년 12월 경기 양평균 창대리에 있던 조선초 사대부인 변수의 묘에서 출토된 것들로 그의 후손인 원주변씨 원천군 종친회(기증자대표 변병철)에서 기증받은 것들로 보전처리를 거쳤다.이들 복식은 시대가 분명할 뿐만 아니라 조선초 사대부가 일상생활에서 입었던복식과 함께 상장례에 특별히 사용한 염습옷 및 염습구까지 들어있어 당시의 복식문화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전시유물은 단령과 담호, 모자, 도아, 악수, 멱목. 요선철릭이다.이 중 요선철릭은 남자 겉옷의 일종으로 허리에 선장식이 있는 윗도리와 치마가원피스처럼 연결된 포(袍). 철릭은 허리 아랫부분을 주름치마 형태로 만들어 말을타거나 사냥할 때 등에 사용되던 것으로 이런 옷 중 하나인 요선철릭이 실물로 확인되기는 처음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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