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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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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충절의 명문,호당에 뽑혀 사가독서 후대제학을 6번 판서를 8번 역임한 김귀영상산김씨(商山金氏)는 신라 종성(宗姓)의 후손 김 수(金需)를 시조로 받든다.시조 김수(金需)는 고려 때 보윤(甫尹)을 지내고 수대에 걸쳐 상산(商山: 경북 상주의 옛 지명)에 살았으며 시조의 손자 김 식과 증손 김희일은 집사성(執事省:나라의 기밀과 서정을 관장하던 최고의 행정기관)의 으뜸벼슬인 시중(侍中:정승)을 지냈다.상산김씨대종회는 "시조 김수(金需)가 라말려초(羅末麗初)에 출생 고려조때 보윤(甫尹:지방관직)의 벼슬을 역임했으며 문헌 경인보(서기 1710년 간행된 상산김씨 족보)에는 벼슬이 시중으로 되어있으나 이를 상고(詳考)할 수 없다"고 밝히고,시조에 관한 기록은 세월이 오래되어 전하는 문헌이 부족해서 상세히 알지 못하나 다만 서로 전하기를 그 선세(先世)가 신라국(新羅國)의 김성(金姓)에서 나왔으나, "중간계통은 원근을 정확히 고증하기 어려워 후세로부터 출처를 소급(溯及)해서 추리하여 그 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통해 제반 사실을 참조 증험(證驗)할 뿐"이라고 기록하고있다.후손들은 김수(金需)를 시조로 받들고 상산(商山)을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으며 상주김씨(尙州金氏)라고도 한다.김수(金需)高麗甫尹 按庚譜諱(수)官侍中未知何攷 公之墓所歲久無懲故 檀紀四二九五年壬寅設檀建齋于尙州邑新鳳里九月山下酉坐原 每年三月十五日享祀焉 檀紀四三二○年丁卯后孫衆언意願公休日行祀故宗議改陽五月 五日享祀焉矣이상원문(以上原文)을 해석(解釋)하면 다음과 같다.고려때 보윤 벼슬을 하시고,경인보(1710년 간행된 내원령공파 파보)를 살펴보면,휘(諱)자는 수(수)벼슬은 시중(侍中)으로 되어있으나,알 수 없으니 어찌 상고(祥攷=考의 고자: 자세한 생각)하리요. 공(公)의 묘소는 세월이 오래되어 증거가 없는 고로 1962년(단기 4295년)임인에 상주읍 신봉리 구월산하 유좌에 설단하고 재사(봉의재)를 세워 매년 3월 15일에 향사하도다.단기 4320년 정묘(1987)많은 후손들이 공휴일 행사를 원하는 고로 종중에서 의논하여 양력 5월5일로 개정 향사하도다.(상산김씨세보)시조 김수(金需)의 현손(玄孫:고손자)인 김비궁은 찬성사(贊成事:문하부의 정2품부총리)을 역임한후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9세인 김일은 대호군(大護軍:오위의 종3품 건공장군)을 역임한후 여러벼슬을 거쳐,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으며,10세 김녹은 판사(判事:고려때 3품이상 벼슬)를 역임 후에 상성군(商城君)에 봉해졌다.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명신(名臣)을 많이 배출 한 상산김씨(商山金氏)는상성군(商城君) 김녹의 큰 아들 김득배가 1359년(공민왕8) 홍건적이 침입했을때 서북면도지휘사(군정장관 軍政長官)로서 이방실(李芳實),안우등과 함께 격퇴하여,그 공으로 수충보절공신(輸忠保節功臣)에 책록되었다.그는 이후 정당문학(政堂文學:중서문하성의 종2품)이 되었으며,1361년(공민왕10)에는 홍건적이 개경까지 쳐들어와 왕이 복주로 피신할 때 이방실,최영,정세운,이성계 등과 함께 반격하여 개경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웠다.고려 원종때 중랑장(中郞將:정5품 무관)을 지낸 김충은 문하시중(門下侍中: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한 종1품 정승)을 역임한 김치원의 손자로 '삼별초의 난'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웠고 1281년(충렬왕7) 일본을 정벌할 때 공을 세워 기성군(箕城君)에 봉해졌다.그의 증손자 김운보와 김신보 형제는 1353년(공민왕2) 왜적이 침입 했을때와 홍건적의 난 때 공을 세워,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증시(贈諡)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충렬왕 때 봉상시로 고쳤음,시사는 전의시의 정3품)와 봉순대부(奉順大夫:정3품 당상관 품계)에 올랐다.김운보는 조선조에 이성계를 도와 개국원종공신에 서훈되어 중추원부사(中樞院副事:정3품)겸 사복시(司僕寺:궁중의 수레와 말을 관리하던 관아의 벼슬)에 이르렀고,동생인 김신보는 벼슬을 버리고 전남 영광으로 낙향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한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함)의 절의를 지켰다.한편, 김운보의 아들 김덕생은 태조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낭장(?將:정6품)으로 있을 때 이방원이 사냥중 표범의 습격을 받아 위험에 처 하자 화살로 표범을 잡아 말을 하사 받았으며,이후에 호군(護軍정4품 장군)을 거쳐 세종때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원의 종2품)에 추증(追贈공이 많은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나라에서 그의 관위를 높여 주던 일)되었다.세종때의 무신(武臣) 김사우는 무용(武勇:싸움에서 용맹 스러움)을 떨쳤으며,1460년(세조 5) 한성부윤(府尹:종2품)으로 신숙주와 함께 두만강 밖 모련위(毛憐衛)의 야인을 토벌하고 판한성부사를 지낸 후 병조판서(判書:정2품국방장관)를 지냈다.정몽주의 문하(門下:스승의 밑,스승의 집)에서 수학하고 구경(九經).사서에 통달한 김우생은 성삼문.박팽년 등과 교류했으며,단종이 억울하게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진(自盡:병들어도 약을 머지않고 스스로 죽음) 한 절신이며,1547년(명종2)에 알성문과(謁聖文科:성균관에 왕이 거둥하고 알성하고 나서 보던 과거)에 급제한 김귀영은 호당(湖堂:재덕을 갖춘 유망한 젊은 문신을 뽑아 사가하여 오로지 글을 읽도록 하던곳 독서당)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한것)를 하여 이름을 날렸다.그는 여러 벼슬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장관)를 8번,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을 6번이나 지내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사신으로 북경을 9번이나 왕래하며 공적을 쌓아 1581년(선조14)우의정(右議政:정1품 정승)에 이르렀고, 평난2등공신(平難二等功臣)으로 상락부원군에 봉해진 후 기로소(耆老所:나이 많은 왕이나 정2품 이상의 70세가 넘은 문신을예우한 기구로 최고의 영예로 여겼고 1394년(태조3년)에 설치하였고 기로소에 든 왕은 태조,숙종,영조)에 들어갔다.이밖에 상산김씨는 대사간(大司諫:사간원의 정3품으로 왕에게 간언하던 일을 맡아보던 관청) 김홍미,1636년(인조14년)에 청백리에 녹선된 김여기,호조판서(戶曹判書:정2품 장관) 김연 등이 이름을 날렸고,숙종때 춘당대시(春塘臺試:창경궁에 있는 대(臺)에서 과거를 보는것)에 급제한 김동필은 대사간(大司諫:사간원의 정3품)을 지내고영조때는 한성판윤(判尹:정2품 서울시장)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 장관)에 올라 영조의 탕평책을 도와 당쟁완화에 힘을 썼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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