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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국기를 확립한 서필 우리나라 생활권을 압록강의 자연적인 경계로 확정짓게 하는 기틀을 마련한 서희 제자백가에 통달한 조선의 천재 고청초로 서 기를 배출한 전통의 명문우리나라 서씨(徐氏)의 대종(大宗:대종가의 종손으로 이어지는 계통)인 이천서씨(利川徐氏)는 신라의 아간대부(阿干大夫:신라의 관계(官階) 중 아찬과 같은 6등위로 6두품 신분층이 오를 수 있는 최고직)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받든다.서신일(徐神逸)은 대부분 서씨(徐氏)의 도시조(都始祖)로 받들어진다.문헌에 따르면 도시조 서신일은 기자(箕子:중국 은나라의 왕족으로 은나라가 망하여 부하들을 데리고 조선으로 왔다고 함)의 40세손 기준(箕準: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재위기간 20년)의 후손이라고 하며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왕(王)인 기준이 9세기 중엽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겨 지금의 이천시 서아성(徐阿城)에 정착하게 되어 우리나라 서씨(徐氏)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또 다른 기록에는 예맥(濊貊:한민족의 뿌리가 되는 민족)의 추장인 여수기(余守己)의 아홉아들이 각각 여러 고을의 장(長)이 되어 많은 치적을 쌓았으므로 백성들이 여(余)자에 중인변을 붙여서 서씨(徐氏)의 성(姓)을 선물하였다고도 한다.서씨(徐氏)의 대종(大宗)인 이천서씨(利川徐氏)의 시조(始祖) 서신일(徐神逸)은 신라효공왕(孝恭王:제52대 임금.재위:897~912년)때 아간대부(阿干大夫:신라의 관계 중 아찬 이라고도 하며 6등위로 6두품 신분층이 오를 수 있는 최고 직)를 지내다가 국운이 다 함을 예견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의 효양산 기슭에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은거하면서 스스로 처사(處士:거사.세상밖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묻혀 사는 선비)라 하며 후진교육에 여생을 바쳤다고 한다.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기록에는 시조 서신일은 신라 창업의 원훈(元勳:나라를 위한 가장 큰 공훈)으로 아성대장군(阿城大將軍:고려때는 종3품)을 지낸 서두라(徐豆羅)의 후손으로 천품이 인자 중후하여 화살을 맞고 사냥군에게 쫓기는 사슴을 구해 주었는데 그날 밤 꿈 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감사의 말을 전하기를 "낮에 당신이 구해 준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 사냥군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된 것을 다행히 당신의 은덕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으니 당신의 자손 대대로 재상(宰相:정승)이 되게 하리라"하고 사라졌다고 한다.나이 80세가 넘도록 후사가 없었던 그는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얻으니 그가 바로 고려초기에 국기를 확립했던 서필(徐弼)이다.고려 광종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최고 행정기관의 장으로 종1품)이었던 서필은 항상 솔직한 간언(諫言:간하는 말,충고하는 말)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특히 그는 광종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귀화한 중국인 쌍기 등을 우대하는 폐단을 시정했고 왕이 신하를 죽이려 하자 "공자(孔子)가 마굿간에 화재가 났을 때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사람의 희생 여부를 물었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왕에게 간(諫)하자 이를 용서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한번은 광종이 아끼던 금배(金盃)를 하사하자 그는 '신이 이 금 술잔을 쓰면 전하는 장차 무엇을 쓰시겠습니까'하며 사양하였다는 군신지미담(君臣之美談)도 전한다.고려 성종때 뛰어난 외교관이자 정략가(政略家)로 유명했던 서희(徐熙)는 서필(徐弼)의 아들로 거란의 침입 때 <서희의 담판>으로 유명한데 그는 전략적인 화술(話術)로 거란을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우리나라의 생활권을 "압록강의 자연적인 경계로 확정짓게 하는 기틀을 마련"하여 역사적인 업적을 남겼다.서희(徐熙)의 아들 서눌(徐訥:덕종의 비(妃)가 서눌의 딸)은 여러 벼슬을 거쳐 덕종때 문하시중(門下侍中: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하던 종1품 정승)에 올랐으며 이어 삼중대광(三重大匡:고려때 정1품 문관 품계)으로 내사령(內史令:고려때 내사문하성의 으뜸으로 문하시중(종1품)을 역임한 사람이 임명됨)에 이르렀다. 서눌의 후손에게는 영업전(永業田고려시대에 직역(職役)을 세습(世襲)하는 대가로 국가에서 지급하던 토지의 명칭으로 본래 당나라에서 균전제를 실시하면서 지목(地目)을 자손에게 상속하는 영업전)이 하사되었다.또한 우복야(右僕射:정2품 부총리)에 오른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등 네명의 아들도 명성을 떨쳤다.선종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정2품 부총리)로 상주국(上柱國:2품 이상에게 주어진 공신 최고의 훈호)이 되었던 서정(徐靖)은 우복야(右僕射:정2품 부총리) 서유걸의 아들이며,그의 손자로 서순(徐諄)이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에 올라 유명했으며 서유위의 현손(玄孫:손자의 손자) 서견(徐甄)은 절신(節臣)으로 이름났다.이천서씨는 조선조에서 서백윤이 고종때 문과(文科:대과)에 장원급제한것을 비롯 문과(文科:대과)에 24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33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44명 등 101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했다.시조의 묘는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효양산에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1일에 향사(享祀:제사) 한다.이천(利川)은 경기도 남동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475년(장수왕 63)에 남천현(南川縣:일명 南買縣)이 설치되었다. 568년(진흥왕 29) 신라에 의해 남천주(南川州)로 바뀌고, 604년(진평왕 26)북한산주(北漢山州)로 개칭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 황무현(黃武縣)으로 개칭하여 한주(漢州:광주)에 속하게 하였다.935년(고려태조18)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할때 이천군(利川郡)으로 하였으며,1389년(공양왕10) 남천현(南川縣)으로 바뀌었다가,조선시대에 다시 이천현으로 되었다.1444년(세종26)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한때 강등되어, 1623년(인조1)다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1895년(고종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충주부(忠州府) 이천군으로 되었고,1914년 군.면 폐합으로 음죽군이 폐지되어 이천군에 합병되었다.1996년 이천시로 승격되었다.인구조사에 의하면 이천서씨(利川徐氏)는 1985년에는 34,157가구에 144,205명이었으며,2000년에는 53,407가구에 172,072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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