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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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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 선윤지 1382년(고려 우왕 8)에 사신으로 와 우리나라에 귀화무관(武官)으로 충절이 뛰어난 <선씨 5충신>의 명문우리나라 선씨(宣氏)는 중국 노나라의 대부 선백(宣伯)의 후손인 선윤지(宣允祉,호는 퇴휴당)로부터 대를 이어왔다.선씨(宣氏)의 시조 선윤지는 명나라때 문연각학사(文淵閣學士)로 서기1382년(고려 우왕 8)에 사신으로 와서 우리나라에 귀화하였다고 한다.그는 20세 약관(若冠)으로 대명전시책(大明殿試策:지금의 행정고시와 같음)에 장원으로 급제하자,원나라 황제가 불러 그 인품됨이 신인(神人)의 풍채 같다고 칭찬하며 서대(犀帶:관복에 두르는 띠)와 인검을 하사하고 문연각학사(文淵閣學士)에 임명하였다.선윤지는 성격이 총명하고 영리하여 13세때 벌써 문장(文章)으로 이름이 났고, 15세때 공자(孔子)의 대학지도(大學之道)에 통달하였다고 한다.대학지도(大學之道)에 가르치는 정심(正心),수신(修身)으로부터 격물치지(格物致知)에 이르렀으며,항상 선비된 자가 처세하는 데에는 충효(忠孝)를 첫째로 하고 무예(武藝)를 둘째로 하여야 하며,항상 효경(孝經)과 곡례(曲禮)와 내즉(內則)등편(等篇)을 외우라고 하였다.또한 활쏘기는 6례중(六藝)중의 하나라며,향례(鄕禮)에 있어서 불가불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당대에 이름난 선비들과 같이 확상이란 곳에서 회유(會遊)하며 하루종일 과녁에 맞힌 화살을 세어 보니 하나도 빗나간 것이 없었다고 한다.관중(觀衆)이 말하기를 선생의 덕(德)을 보려고 하면 이런 기회가 다시 없다고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하며 이것이 공자(孔子)의 부실정곡(不失正鵠)이라는 것이다.문연각(文淵閣)은 중국 궁성안에 있던 각(閣)으로 우리나라의 성균관(成均館)과 비슷한 관아이다.1382년 명나라 초기에는 문연각대학사(文淵閣大學士)라는 직명(職名)이 있었고 여기에 비적진서(秘籍珍書)를 보관 관리하였다.인구조사에 의하면 보성선씨는 1985년에는 총 7,651가구에 33,105명이었으며2000년에는 총 10,821가구에 34,842명이었다.<보성선씨 집성촌>보성선씨(寶城宣氏)가 대대로 세계(世系)를 이어 온 보성읍 봉산리(烽山里)는 주변의 나즈막한 산세에 둘린 채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봉산리(烽山里)는 총 170여 가구중 3분의 1가량이 보성선씨(寶城宣氏)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보성선씨(寶城宣氏) 가운데 특히 선전공계(宣傳公系)를 중심으로 이곳에 입향한 시기는 임진.병자(壬辰.丙子)양란후로 추정된다고 한다. 입향조는 11세손인 선이벽(宣以碧)으로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후이다.시조 선윤지이후 보성읍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보성선씨(寶城宣氏)들은 양란 이후 왜구(倭寇)들이 자주 출몰하자 이곳으로 이거해 왜구(倭寇)의 만행을 피했다고 한다.또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강매동(江梅洞)매화정(梅花亭)마을 입향시기는 1460년대로 추정하며 입향조는 시조의 6세손인 선계철(宣季鐵)이며 유성군(楡城君,선형 炯)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당하관)로 의성현감(義城縣監:종6품수령)을 지내고 자손이 번창하여 5백년이상 선씨가문(宣氏家門)을 이어가고 있다. 마을전체 100여호 중 60여가구가 보성선씨이며 평양공(平襄公,선형)의 사당(祠堂)을 건립하여 정월13일 평양공(平襄公) 선형(宣炯)을 배향(配享)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산으로 둘러져 있고 서쪽으로는 평야로 되어 마치 삼태기 안에 있는 형상으로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전국에서 제일 많은 가구가 집성촌(集成村)을 이루고 있으며,서울근교에서 몇 안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남아 있다.강릉시 대전동(大田洞) 송암리마을은 강릉 오충사(五忠祠)가 있는 마을로 이곳의 보성선씨 입향시기는 시조의 11세손인 선순하(宣舜河,자는 사도 士圖)이며 아버지는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지낸 선탁경(宣倬卿)이다. 그는 조봉대부(朝奉大夫)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냈다.그가 강릉에 입향한때는 1650年대이며 후손들이 1973年 강릉에 오충사(五忠祠)를 건립하여 강릉 유림(儒林)과 음력 3월22일에 배향(配享)하며 오충사(五忠祠) 주변에 5~60여가구가 모여 살다가 현재는 강릉시에 70여 가구가 흩어져 살고 있으며 몇몇 후손은 강릉시 연곡면 신왕리 마암터 마을에서 농촌체험마을을 운영하고 있다.울주군 삼동면 금곡리 마을도 보성선씨 집성촌이다. 시조의 3세인 선청유(宣淸裕,순무사공)의 후손으로 시조의 9세인 선극례(宣克禮,병사공兵使公)의 손자로 선무랑(宣務郞)에 오른 선대규(宣大規)의 입향시기는 1630년대로 추정되며 후손들이 번창하여 금곡리 마을은 15가구가 마을을 지키고 있으며 울산과 울주군에 100여 가구가 살며,일부 후손들은 김해,부산등지 에서 살고 있다. 마을에는 선명규의 공적비(功績碑)가 세워져 있으며,금곡리 마을에는 후손들이 건립한 선청유(宣淸裕).선극례(宣克禮).선대규(宣大規) 의 위패와 영정(影幀)을 모신 제실(祭室)이 있다. 후손들은 선극례(宣克禮,병사공兵使公)의 추모사업 등 많은 노력으로 울주군에 추모비(追慕碑),원모사(遠慕祠)을 건립하여 병사공(兵使公,선극례)의 위패을 모셨으며 2006년 5월10일 현판식 및 추모제를 지냈다.충남 논산시 연무읍 마산4리 마을도 보성선씨 집성촌으로 시조의 5세인 선효양(宣孝亮)이 전북 고산(高山)으로 이거 하였으나 실전되었다고하며, 9세손인 선의춘(宣義春)이 효종때 학사(學士)로 덕산현감(德山縣監:종6품수령)을 지낼때 순후치세(淳厚治世)하여 백성들의 칭송이 대단하였다고 한다.그는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와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당상관)로 이조참의(吏曹參議:정3품차관보)에 이르렀다. 이후 익산시 삼길면 서두리 원형골마을에 입향하여 이때부터 후손이 번창하였으며 서기1660년대에는 논산시 연무읍 마산리로 입향하였는데, 당시에는 60여가구가 집성촌(集成村)이었으나 현재는 20여 가구가 마을을 지키며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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