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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씨

    설(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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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씨(薛氏)의 시조는 설호진(薛虎珍),또는 설거백(薛居伯)이라고도 했다. 그는 신라 개국공신 6부촌장의 한 사람으로 법흥왕3년 무신(武信)으로 시호(諡號)되었고 무열왕때 장무왕(壯武王)에 추봉되었다. 그는 당시 진한(辰韓)땅이던 경북 월성군 천북면(川北面).화산(花山).물천(勿川).동산리(東山里).안강읍(安康邑) 일대인 명활산(明活山)고야촌(高耶村)을 다스리던 촌장이다.기원전 57년 금산가리(金山加利, 경북 월성군 감포읍 양남.양북면 일대), 무산대수(茂山大樹, 月城郡 見谷面 일대), 취산진지( 山珍支:慶州市 進峴洞, 月城郡 外東邑 일대), 돌산고허(突山高墟,: 慶州市 拜洞, 慶南 蔚州郡 斗西 斗東面 일대), 알천양산(閼川陽山":州市 東方, 仁旺, 九黃, 路東, 路西, 東部, 城東, 城乾洞 일대) 촌장과 함께 알천(閼川) 언덕에 모여 난생(卵生)의 전설을 지닌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신라 초대 임금으로 추대하여 신라를 세운 것으로 전한다. 이후 신라3대 유리왕(儒理王)이 이들의 공로를 기려 성(姓)을 하사할때 설(薛)씨가 탄생하였다. 우리나라의 설씨(薛氏)는 경주설씨.순창설씨.개성.결성.광주.밀양.순천.옥천.진주.창원 등 총 10개의 본관이 있으나 <경주와 순창>을 제외한 본관은 대부분 세거지명이다.설씨의 인구는 2000년 조사에 의하면 총 38,766명이었으며, 경주설씨가 6,060명,개성설씨가 787명, 결성설씨가 6명,광주설씨는 1985년에는 없었으나 2000년에는 2명이었고, 밀양설씨는 601명, 순천설씨는 1,582명,옥천설씨는 1,070명,진주설씨 421명,창원설씨 243명, 순창설씨가 가장 많은 27,926명 등이었다.경주설씨(慶州薛氏.순창설씨)불교사의 종합과 실천에 노력한 정토교(淨土敎)의 선구자 고승 원효대사이두(吏讀)의 창시자로 민족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 설총경주설씨의 시조는 설거백(薛居伯,호진 虎珍)이다.시조 설거백은 신라의 개국공신으로 법흥왕 3년에 무신공(武信公)으로 시호(諡號)가 내려졌으며 무열왕 때 장무왕(壯武王)에 추존되었다.그는 진한(辰韓)땅 이었던 지금의 경북 경주시 천북면과 화산.물천.동산리, 안강읍 일대인 명활산(明活山)고야촌(高耶村)을 다스리던 촌장이었다.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69년 3월 금산가리(金山加利).무산대수(茂山大樹).자산진지( 山珍支).돌산고허(突山高墟).알천양산(閼川陽山)등 다른 5촌장과 함께 나라를 다스릴 왕을 추대할 것을 의논하고 알천(閼川)언덕에 모여 제례를 드렸는데 경주 남산 밑의 '나정'이라는 우물 옆 숲에서 백마(白馬)가 빛을 발하며 하늘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표주박 같은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오니 박 같은 알에서 아이가 나왔다 하여 성(姓)은 박(朴), 세상에 빛을 발하며 나왔다며 혁거세(赫居世)라 하여 소중히 길렀다.이와같은 난생(卵生)의 전설을 지닌 박혁거세(朴赫居世)를 6촌장들은 혁거세가 13세가 되던 기원전 57년에 왕으로 추대하여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였다.설거백은 군국정사(軍國政事)가 되었으며 서기전 55년에는 대사마대원수가 되었는데 혁거세(赫居世)가 설거백에게 "도성 안은 과인이 맡을테니 도성 밖은 경이 맡으라"하고 [개국도임관대보 좌명공신]에서 좌보승보(左輔承輔)로 옮겼다.이후 서기 32년(유리왕 9년)에 6촌을 6부로 개편하고 명활산 고야촌은 습비부(習比部)로 고쳤으며 유리왕(儒理王)이 촌장들의 공로를 기려 성(姓)을 하사 하였는데 설거백의 아들 지덕(支德)에게 설씨(薛氏)로 사성(賜姓:왕이 성을 내림)하게 되어 설씨의 가계(家系)가 시작 되었다.최초의 본관은 14세 설곡(薛 )이 경주(慶州)로 삼았는데 신라 진흥왕 때라고 한다. 그뒤 36세 설자승(薛子升)이 순화백(淳化伯:순화는 순창)에 봉해져 순창(淳昌)으로 개관되었는데 그때가 고려 인종2년이었다. 그래서 경주(慶州)가 원적(原籍)이 되고 순창(淳昌)이 본적(本籍)이 된다고 설씨2년사(薛氏二千年史)에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순창(淳昌)이 곧 경주(慶州)이고 경주(慶州)가 바로 순창(淳昌)이라는 것이다. 경주(慶州)는 신라의 옛 수도이나 고려 태조18년에 경순왕이 신라를 고려에 손국하자 나라는 없어지고 다만 경주라 칭하였다. 성종때는 동경유수(東京留守:2품지방장관)였고,현종때 강등시켜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로 하였으며 신라복귀 반란을 꾀하였다 하여,관내의 주.부.군.현을 빼앗아 안동(安東),상주(尙州)에 나누어 예속시키기도 하였다.조선 태종때 경주라는 옛 이름을 다시 썼고 1895년에 군(郡)이 되었으며 1955년 경주시(慶州市) 설치와 더불어 나머지 지역은 월성군(月城郡)으로 되었다. 순창(淳昌)은 백제의 도실군(道實郡)인데 신라때 순화군(淳化郡)으로 개칭하였고 고려조에 순창(淳昌)으로 고쳐 남원부(南原府)에 소속시켰다. 고려 명종5년에 감무(監務:작은현에 중앙에서 파견한 감독관)을 두었고 충숙왕1년에는 승(僧) 국통정오(國統丁午)의 고향이라 하여 군(郡)으로 승격시켰는데 조선때도 그대로 따랐다.설씨(薛氏)는 참판공파(參判公派),문숙공파(文肅公派),참의공파(參議公派),대사성파(大司成派),진사공파(進士公派),옥천군파(玉川君派),군수공파(郡守公派),삼지당공파(三知堂公派) 등이 있다.설씨는 8파(派)로 나누어져 있지만 이는 족보를 편집할 때 편의 상 분류한 명칭으로 선조가 다른 것은 아니다.39세(世) 설신(薛愼)의 두 아들인 40세 설공검(薛公儉).설인검(薛仁儉) 형제가 처음으로 문양공파(文良公派)와 문숙공파(文肅公派)로 나뉘어졌고, 그 뒤 문양공파(文良公派)는 44세(世) 설응(薛凝).설풍(薛馮)형제가 암곡공파(巖谷公派)와 참의공파(參議公派)로 나뉘어졌다.암곡공파(巖谷公派)는 45세 설훈(薛燻).설위(薛緯).설즙(薛緝)3형제가 증옥천군파(贈玉川君派),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진사공파(進士公派)로 나뉘어지고 증옥천군파(贈玉川君派)는 설효조(薛孝祖).설계조(薛繼祖).설영조(薛榮祖).설순조(薛順祖) 4형제가 참판공파(參判公派),옥천군파(玉川君派),군수공파(郡守公派),삼지당파(三知堂派)로 나뉘어졌다. 옛날 족보에 나오는 문간공파(文簡公派)는 옥천군파(玉川君派)이고 목사공파(牧使公派)는 삼지당파(三知堂派)이다.문숙공파(文肅公派)는 고려 충렬왕 때 합천부사(陜川府使:정3품 합천군수)와 사재시경(司宰寺卿:현 해양수산 교통부장관 급)과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정2품 행정자치부장관 겸 부총리)를 역임한 설인검(薛仁儉)이 문숙(文肅)으로 시호를 받았기에 그의 후손을 문숙공파라 한다.참의공파( 議公派)는 고려말 충신 설빙(薛馮)은 조선 태종이 병조참의(兵曹參議:정3품 국방차관보)를 두 번이나 제수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절의를 지키었다. 설빙의 뜻을 숭모하여 그 후손을 참의공파라 한다.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는 세종때 문과(文科:대과)에 장원급제한 설위(薛緯)가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국립대 음악 예술대 교수)와 사성(司成:국립대에서 경전을 가르치던 교수).대사성(大司成:정3품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설위의 관직이름을 따서 대사성파라 한다.진사공파(進士公派)는 대사성 설위의 아우로 세종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은성군수(銀城郡守:종4품 수령)를 지낸 설집(薛緝)을 추모하여 관직이름을 따라 군수공파라 해야 하나 옥천군의 아우 태안군수공파와 겹치므로 1912년 임자보때 재편에 따라 진사공파라 한다.(구보에는 군수공파라 되어있음)참판공파(參判公派)는 세조때 제주목사(정3품수령),공조참의(정3품차관보)와 호조참판(戶曹參判:종2품 차관)을 지낸 설효조(薛孝祖)의 후손을 참판공이라 하나 무후(无后:절손)하다.옥천군파(玉川君派)는 세조때 정난3등공신에 추대되고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국방장관)를 지낸 설계조(薛繼組)가 옥천군(玉川君:옥천은 순창의 별호이며 옥천군은 순창지방의 통치권자로서 조세권과 병권을 장악)에 봉작되어 설계조의 후손을 옥천군파라 한다. 군수공파(郡守公派)는 옥천군 설계조의 아우로 세조 때 태안군수(泰安郡守:종4품수령)를 지낸 설영조(薛榮組)의 관직이름을 따라 군수공파라 한다. 삼지당파(三知堂派)는 군수설영조의 아우로 세조와 성종때 제주,광주,성주,김해,순천,상주,황주 목사(牧使:정3품수령)를 지낸 설순조(薛順組)의 당호(堂號:별장이름)가 삼지당(三知堂:지진 知進:나아갈 줄을 알고,지지 知止:그칠 줄을 알며,지족 知足:만족할 줄을 안다하여 당호를 삼지당이라 했다함)이라 하여 설순조의 후손을 삼지당파라 한다.(옛 족보에는 목사공파라 했으나 1912년 임자보 때부터 삼지당파라 재편함)순창설씨(淳昌薛氏)의 상계(上系)는 경주시를 비롯하여 경북 월성군 대에서 살았으며, 36세 설자승(薛子升) 대(代)에 하동(河東)을 거쳐 전북 순창(淳昌)으로 정착한 이래 순창에 세거해 오면서 조선 중기부터 다시 설자승(薛子升)의 후손들이 번창하여 경기,충청,경상,함경도로 북상(北上)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다가 문숙공파(文肅公派)는 일부가 조선 세종때 설홍필(薛弘必)의 대를 전후하여 경주시로 옮겨갔다가,강원도 영월(寧越)에 정착했으며, 일부는 인조때 설수일(薛壽一)의 대 이래로 전남 나주(羅州)에 살게 되었다. 진사공파(進士公派)는 세조때 설집(薛緝)의 대에 충남 대덕의 회덕(현 대전광역시 대덕구)에 살았으며,군수공파(郡守公派)는 순창(淳昌)지역과 성종때 설서보(薛瑞保) 이래로 전북 고창에 살았다고 한다.참의공파(參議公派)는 중종때쯤 설신손(薛信孫), 설귀창(薛貴昌)이 각기 경기도 안성의 죽산(竹山)과 개성시(開城市)로 옮겼으며 성종때 설승손(薛承孫), 설당손(薛唐孫) 형제가 충북 옥천(沃川)에, 명종때 설인주(薛仁周)의 대에 밀양(密陽)에 후손들이 옮겨가 이 무렵부터 이들 지역에 산거했다고 한다.안성(安城)에 정착했던 후손들 중에서 설정국(薛定國)의 후계(後系)가 광해군 때에 용인(龍仁)으로, 인조때 설우소(薛遇素)의 후계(後系)가 전남 진도(珍島)로, 설춘경(薛春景)의 후계(後系)는 대구(大邱)로, 설마려(薛磨礪)의 후계(後系)는 의창(義昌)으로 옮겨 갔고, 충남 서산에도 일부 자손들이 옮겨가 그곳에 터를 굳혔다.그밖에 1456년경 설의조(薛義祖)대(代) 이래로 함남 이원(利原)과 단천(端川)등지에 일부 자손들이 정착했다.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는 명종때 설세현(薛世賢)이래로 곡성(谷城)에 선조때 고흥(高興).하동(河東)에, 광해군때 설재도(薛載道) 이래로 보령 등지에 산거했으며 숙종때 설성규(薛聖圭).성옥(薛聖玉)의 대를 전후하여 영광(靈光),순천(順天),정읍(井邑),청도(淸道),충무(忠武) 등지에도 자손들이 산거했다.옥천군파(玉川君派)는 성종때 설계조(薛繼祖)대(代) 이래로 경남 의령에서 살다가 중종때 충남 논산.기도 시흥(始興)에,명종때 경남 창녕에,선조때 장성(長城).고령(高靈)에 산거했으며,영.정조때 이래로 밀양(密陽).공주(公州).고양(高陽).강릉(江陵)등지에도 일부 자손들이 살았다.그밖에 중종때 설함(薛 ) 대(代)이후로 경기도 광명에,순종때 설재수(薛在壽) 이후로 경북 봉화(奉化)에 자손들이 살았다.삼지당파(三知堂派)는 일부 자손들이 중종때 설건(薛健)의 대를 전후하여 전북 임실(任實)에 자리잡았던 것을 비롯해서 조선 정조이후에 해남(海南).담양(潭陽).완주(完州).순천(順天)등지에 산거했다.일제강점기때인 1930년대 이후 경주.순창설씨(慶州.淳昌薛氏)의 후손들은 경기도 개풍군 서면.면(西面.北面),장단군 소남면.장단면(小南面.長湍面),고양군 중면 마두리(馬頭里),광명시 가학동(佳鶴洞),전북 순창군 금과면(金果面),전남 진도군 지산면(智山面),고흥군 분천리(粉川里),경남 의령군 봉수면(鳳樹面),밀양군 가산리(佳山里),창녕군 장마면 월명리(月明里),의창군 북면 월백리(月栢里),충남 금산군 방우리(方佑里),충북 옥천군 청산면 덕지리(靑山面 德旨里),강원도 명주군 주문진읍 향호리(香湖里),평남 평원군(平原郡)일원,함남 이원군 동면(東面),단천군 하다면(何多面),함북 학성군 학성면(鶴城面)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문헌참고>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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