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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손씨(孫氏)는 문헌에는 총 118본이나 2000년 인구조사에서는 경주손씨(78,450명).밀양손씨(274,665명).개성(4명).경기(5,469명).과천(13명).과촌(2명).광주(1,099명).구례(1,526명).김해(1,152명).나주(1,657명).남원(1,081명).달성(4,252명).대구(2명).밀성(10명).보성(1,319명).부령(238명).비안(423명).아산(2명).안동(24,187명).안협(6명,시조는손관(1024~1109년)).영천(36명).월성(47명).전주(922명).진주(962명).창녕(1,049명).청주(1,432명).충주(457명).평안(449명).평양(212명).평택(315명).평해(12,831명).포천(7명).한양(3명).함평(1명).해주손씨(463명)등 총 35본관이었으며 인구는 총 415,182명이었다.손씨(孫氏)중에서 안동손씨(일직손씨)를 제외한 모든 손씨는 경주손씨(慶州孫氏)를 대종(大宗)으로 하는 같은 뿌리의 분파로 알려져 있다.경주손씨(慶州孫氏)가 큰 집이고(일설에는 큰집은 밀양손씨이며 경주손씨는 부모를 모셨기에 '본가'라고도 함) 밀양손씨와 평해손씨는 경주손씨에서 분적하였으며, 나머지는 이들 3본에서 분파했다고 한다.(새로운 학설(學說)은 밀양손씨는 경주손씨에서 분파된 것이 아니라 "경주지방에 거주하다 밀양으로 이주한것 뿐인데,그동안 경주손씨에서 분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 이라는 주장도 제기됨)안동손씨 이외의 모든 손씨(孫氏)의 도시조(都始祖)는 신라 6촌(六村) 중 대수촌(大樹村:牟梁部)의 촌장인 구례마(俱禮馬)이다.한편 전주손씨(全州孫氏)는 조선시대에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1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과거)에 1명 등 2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으며,인구조사에 의하면 전주손씨는 2000년에는 총 280가구 922명이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옛날 진한(辰韓)에 6촌 중의 하나인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의 촌장 구례마(俱禮馬)가 처음 이산(伊山,구미산)에 내려와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동국사략(東國史略:1403년(태종3) 권근.하륜.이첨 등이 단군조선부터 삼국시대까지의 내용을 담아 편찬한 역사서로 대전광역시 대덕구 중리동 165-1에 있으며 대전문화재자료 제18호에 지정)에는 조선백성이 동해빈(東海濱)에 사는데 6촌(六村)으로 나뉘어 진한의 육부(六部)가 되었다고 하였다.그 6부의 촌장들이 알천(閼川)에 모여 의논 하기를 나라에 임금이 없어서 백성이 방종하고 무례하니 유덕한 사람을 왕으로 선출하기로 하고 박혁거세를 옹립하여 서라벌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이때가 기원전 57년(단기 2277년)이다.또한 동국통감(東國通鑑조선 성종때 서거정.정효항 등이 왕명을 받아 고려34대 공양왕에 이르기 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책.56권 28책)에는 "서기 32년(단기 2365,신라 유리왕 9년)에 6부의 명을 고쳐서 대수부(大樹部)를 모량부(牟梁部)로 하고 시조 구례마(俱禮馬:호는 충렬군,문의왕(文義王)에 추봉됨)의 손자 손직이 신라 유리왕에 의하여 성(姓)을 손씨(孫氏)로 사성 받았다" 고 전해진다.손씨(孫氏)는 서라벌 6부 촌장의 한사람인 무산대수촌 촌장 구례마의 후손으로 효자 보응의 주인공인 국효(國孝) 손순(孫順:자는 사구,호는 문효)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시조 손순(孫順)은 경상북도 건천읍 출신으로 아버지 손학산(孫鶴山)이 세상을 떠나자 아내와 함께 노모를 극진히 봉양했다.문효공 손순(孫順,자(字)는 사구 士久)은 신라 모량부(牟梁部) 사람으로 태자사인(太子舍人: 태자를 모시는 시관. 후한때는 태자소부에 속하여 궁중의 숙위를 담당)을 지낸 학산(鶴山)의 아들이다. 그는 우잠태수(牛岑太守) 백영(白永)의 딸에게 장가들어 취향산(醉香山) 아래에서 살았다.일찍이 부친이 돌아가고 가세(家勢)가 빈곤해지자 아내와 같이 품을 팔아서 어머니 운오(運烏)를 극진히 봉양하였는데 어린아이가 하나 있어 노모에게 드리는 음식을 매번 빼앗아 먹으니(每奪母食) 매우 민망하였다. 이에 백씨부인에게 의논하여 아해(兒孩)를 땅에 묻어버리고 효도(孝道)의 본분을 다하고자 한다고 하니 부군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였다.아이를 업고 취향산 북쪽 기슭으로 가 땅을 파니 삽 끝에 옥석(玉石) 소리가 나서 공(公)이 이상히 여겨 주위를 두루 파니 둥근 석종이었다. 시험삼아 두드리니 소리가 매우 아름다웠다. 처가 말하기를 “아이를 묻으려다 이것을 얻었으니 이것은 아들의 복이라 묻지 맙시다.” 했다. 손순공이 옳게 여겨 아이를 업고 종(鐘)을 가지고 돌아와 대들보에 매달고 두드리니 왕궁(王宮)까지 종(鐘)소리가 들렸다.왕(王)이 좌우(左右)에게 이르기를 서 쪽에 이상한 종(鐘)소리가 들리니 찾아 알아보라 하여 좌우 신하들이 집을 물어 찾아가 말하여 공(公)이 종(鐘)을 가지고 왕궁(王宮)으로 갔다. 왕이 내관(內官)에게 두드려보라 하고 이르기를 어떻게 이 석종(石鍾)을 얻게 되었는가 하자, 문효공(公)이 사유를 말한즉 왕이 말하기를 “기이(奇異)한 일이로다 곽거는 아들을 묻으려다 금솥을 얻었다더니 손순은 석종을 얻었으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로다.” 하고 명하여 종은 악부(樂府)에 소장하고 집 한채와 세급미(歲給米) 50석을 주게 하고 또 높은 벼슬을 내렸다.이 때가 서기 835년(통일신라 흥덕왕10년 을묘 乙卯)이다. 그리고 후에 월성군(月城君)에 봉(封)해졌다. 손순의 묘는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 모량촌에 있는데 사람들은 이 묘를 손묘(孫墓).손릉묘(孫陵墓)또는 효자릉(孝子陵)이라 한다.경상북도 경주시 소현면 남사리에는 <취산종골>이있다.이곳 종골(鐘谷)은 문효공 손순(孫順)이 아들을 땅에 묻으려 할때 살던 곳으로 후에 집터에 홍효사(弘孝寺)라는 절을 짓고 종을 보관하였으며 지금도 3층석탑과 절터가 남아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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