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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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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자 손조서(孫肇瑞)의 문하에 조선의 <동방5현> 김굉필(金宏弼).정여창 배출경상북도 안동시에 속해있는 일직(一直)은 신라의 경덕왕이 일령으로 고쳐서 고창군의 영현으로 삼았다가, 고려초에 다시 일직으로 개칭을 하고, 현종 9년(1018년)에 안동에 편입하여, 지금도 안동시에 속한 일직면으로 되어있다.안동손씨(安東孫氏,일직손씨)는 고려때 송나라의 난세를 피하여, 우리나라에 귀화해온 손응(孫凝)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시조 손응은 원래 성(姓)이 순(筍)이었는데, 고려 현종의 이름인 순(詢)과 음이 같다 해서 손씨성(孫氏姓)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한편 일직손씨 대동보에는 1)시조 손응은 원래 순(荀)씨인데, 고려 태조가 고려 창건때 왕으로부터 손(孫)으로 사성받았다는 설과, 2)신라의 석씨조(昔氏朝)때 순응(荀凝) 이 사성 받은 설, 3) 고려 현종 때 순응이 중국에서 난을 피해서 고려로 들어와 손씨로 사성받았다는 설, 4)신라 왕을 수행한 간(幹) 선조가 안동 일직현에 정착하였다는 설, 5)무오보에는 조선시대의 성리학자 남명(南冥)조식(曺植)이 친구인 참봉 노수민 부인 묘갈(墓碣)을 짓는데, 고려 태조때 왕에게 사성된 것이라 기록 되어있음을 밝히는 등 여러 설이 있다.일직손씨는 안동손씨라고도 칭하며 선계(先系)는 손응으로, 그는 고려초 중국 송나라의 제2대 위(魏)왕 제3대 기(冀)왕때 황제등극을 두고 내란이 일어나자, 왕족과 귀족세력이 고려로 망명 귀화해왔다.고려에서는 제7대 목종이 시해되고, 제8대 현종이 왕이 되자, 현종의 이름이 순(詢) 이어서 왕과 발음이 같다 해서 손씨(孫氏)로 바꾸었다.그러나 시조 손응 이후의 세계가 명확하지 않아, 고려때의 장군 손간(孫幹)을 중시조로 받들며 복주(福州:안동 일직)를 세거지로 삼았다.일직손씨는 고려 무신정권 말기에, 고려가 원나라 지배를 받는 혼란기인 충선왕때 과거에 급제한 시조의 4세손 정평공(靖平公) 손홍량(孫洪亮:복주부원군)이 유명하다.그는 여섯 왕을 섬기고, 추성보절 좌리공신(推誠保節左理功臣)으로 책록되어,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 품계)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종1품의 재신이 겸하던 삼사의 으뜸 벼슬)에 이르렀으며, 영의정을 끝으로 65세에 치사(致仕:벼슬을 스스로 그만둠) 하였다.홍건적의 칩입으로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왔을 때는 그가 평민으로 왕을 수행하여 난국수습을 건의하자, 공민왕은 손홍량의 충의에 감탄하여 자성일직지인(子誠一直之人) 즉 "경은 한결같이 곧은 충신이다"라고 치하 하였다. 정평공의 큰 아들 손득수(孫得壽)는 밀직사(密直司:정령을 출납하던 관아)의 좌대언(左代言:왕명을 하달을 맡아보던 벼슬)을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초계군수(郡守:종4품수령)를 지낸 아들 손웅발(청백리)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으며, 둘째 아들 손득령은 전공판서(判書:정3품장관)겸 집현전 대제학(大提學:2품문형)을 지내 명성이 드높았으나, 조선의 개국으로 역성혁명의 시련을 겪었다. 그의 6대 손으로 거유(巨儒)이며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손처눌(孫處訥:모당공 慕堂公)이 유명했는데, 그는 약관 17세에 과거에 급제 인조반정으로 단성현감(縣監:종6품수령)을 지냈다. 정묘호란때의병장으로 활약한 손린[孫燐,호는문탄聞灘,자는 계진:1566년(명종 21)~1628년(인조6)]은 손조서(孫肇瑞)의 5대손으로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다.1606년(선조39)에 과거에 급제하고,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子외교문서 검토와 교정,교서관의 서적 교정과 제향의 축문 필사.검토를 맡아 보던 정9품)로 재직할때 권신 정인홍(鄭仁弘)의 교만함을 직설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610년(광해 경술년)에 성균관 박사에 오르자, 정인홍이 회제(晦齋)이언적(李彦迪),퇴계(退溪)이황(李滉)을 문묘에 모시지 못하게 함을 정면으로 공박하다 파직을 당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단성현감(丹城縣監:종6품 수령)에 복직하여, 10여년간 누적되어온 의혹사건을 해결하자 모두들 감복하였다.1627년( 인조정묘) 정묘호란때 우복(憂伏) 정경세(鄭經世)의 추천으로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많은 공적을 쌓았으며,1628년(숙종무진년) 향년 63세로 별세하였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만사(慢詞:100자 전후 또는 그 이상의 자수(字數)로 된 장편사(長篇詞)로 심정을 술회한 것)에 "용맹스러운 말과 강직함은 누구와 더불었는지, 바른 말로 성난 세상과 다투었도다."하며 애도하였다.대구의 봉암사에 제향되고,1971년 밀양 혜산서원 숭덕사(崇德祠)에 배향하였다. 저서로는 문집 4권이 있다.이밖에 영조때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여 경상좌도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각 도에 두었던 수영의 정3품 외직 무관 절도사)에 이른 손명대(孫命大) 등이 유명하다. 시조의 8세손으로 조선전기의 대학자 손조서가 유명하다. 손조서(孫肇瑞)는 김숙자의 문인으로 문하(門下)에 조선의 <동방5현>인 한훤당 김굉필(金宏弼)과 일두 정여창 등 거유(巨儒)를 배출한다.단종 원년에 김숙자와 손조서가 두문(杜門)사직 후 6년 뒤에 김숙자의 아들로 영남사림파의 종조(宗祖)인 점필재 김종직이 출사하게 된다.기록에 의하면 일직손씨는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가통을 지켜왔으며 특히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투사가 유난히 많았으며 국가에 변란이 있을때나 사문(斯文:유교의 문화)에 불행이 있을때는 항상 정도와 정의를 사수해 왔다.조선시대에 안동손씨는 문과(文科:문관을 뽑아쓰던 과거로 시험은 3년마다 실시됨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로 나뉘었음.대과)에 2명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로 3년마다 실시되었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였음)에1명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2명 의과에 1명 등 6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인구조사에 의하면 안동손씨는 1985년에는 5,289가구 22,215명이었으며2000년에는 총 7,714가구에 24,187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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