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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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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의정 김안로,선조의 장인 김제남문과급제자 163명,김익.김채찬 父子 영의정서울대 첫직선총장 김종운,부총리 김원기대법원장 김덕주,대법관 김용담,검찰총장 김각영연안김씨(延安金氏)는 신라김씨 도시조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고려조에서 국자감의 사문박사(四門博士)를 지낸 김섬한(金暹漢)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사문박사(四門博士)는 고려때 국자감에 딸린 교수직으로 사문학의 학생들에게 경학을 가르친 정8품관으로 정원은 2명이었다.국자감은 고려시대 국립교육기관으로 국가에서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고려시대의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이기에 시조 김섬한은 현재의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였던 셈이다.문헌에 의하면 시조의 선조 중에 이름을 알 수 없는 형제가 왕에게 직간하다가 형은 북빈경(강릉)으로 동생은 고염성(현재의 연안)으로 각각 유배되었는데 시조 김섬한은 연안으로 유배간 동생의 후손이다.연안김씨의 상계(上系)를 기록한 문헌 중 가장 오래된 서기 1514년(중종9)에 간행된 김안로(金安老)편저 초주갑인자본(初鑄甲寅字本) 안락당집(顔樂堂集)에도 연안김씨는 신라 종성(宗姓)으로서 형제 두 사람이 왕에게 직간(直諫)을 하였다가 도리어 왕의 미움을 사서 형은 북빈경(지금의 강릉)으로 유배되고,아우는 시염성(지금의 연안)으로 유배되었는데시염성으로 유배된 아우의 먼 후손으로 고려 명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국자감 사문박사를 지낸 김섬한(金暹漢)공이 연안김씨의 시조이며, 시조 박사공 이상의 선계(先系)는 오래되고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고, 시염성이 연안으로 개칭됨에 따라 연안(延安)을 본관으로하였다고 했다.기록에 의하면 박사공 김섬한(金暹漢)은 일찍이 학문을 좋아하여 그 명성이 관서지방에 진동 하였다고 하며, 당시(고려 명종조) 관서지방의 안찰사가 임기가 만료되어 귀경 할때 김섬한과 같이 상경하였다고 한다.김섬한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문과(文科) 을과로 급제하여 국자감 사문박사를 제수 받았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학문을 권장하니 학문이 날로 흥왕하고 문풍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김섬한은 상서(尙書:6조의 정3품 장관)를 거쳐 좌복야(左僕射:상서도성의 정2품 재신반열)를 지낸 진극유(陳克柔)의 딸인 신번진씨(新繁陳氏)를 배(配,부인)로 맞아 아들 셋을 두었는데,큰아들은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6품) 김준구(金俊龜),둘째는 한림학사(翰林學士:한림원의 종3품.4품) 김준룡(金俊龍)이며,제3자는 대장군(大將軍:종3품 무관) 김준린(金俊麟)이다.시조의 5세손 김도(金濤)가 고려때 밀직제학(密直提學:고려시대에 정령을 출납하고 숙위와 군기에 관한 사무를 보는 관청인 밀직사의 정3품으로 본래 직학사 였는데 충렬왕 때 제학으로 바꿈)을 지냈으며,그의 첫째아들 김자지(金自知,시호는 문정文靖)는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를 지냈다.개성부는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뒤 고려때 개성부의 기능과 업무 등을 대부분 답습하였는데,1405년(태종 5) 개성을 유후사(留後司)로 하여 유후,부유후, 경력(經歷),도사(都事) 각 1명을 두고 개성현령은 폐지하고 소관지역을 독립시켰다.또한 둘째아들 김여지(金汝知, 시호는 문익文翼)는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정2품 벼슬),제3자 김치지(金致知)는 예빈시윤(禮賓寺尹:예빈시는 고려.조선때 빈객의 연향을 맡아보던 관아),제4자 김학지(金學知)는 황해도 도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 겸 해주목사(牧使정3품)를 지내 4형제가 이름을 날렸다.연안김씨는 시조의 8세손에서 분파(分派)하여 22개파 약8만 종원이 경향각지에 산거 하면서 저마다의 책무를 다하며 종훈(宗訓)인 숭조(崇祖).돈목(敦睦).계후(啓後)의 구현 실천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옛 문헌에"예부터 문벌을 말 할 때에는 으레 연김(延金)을 들추었다"고 하였으니 연안김씨는 국중화족이요 영락세족으로 번창해 온 거족명문으로 일컬어졌다.특히 김자지의 후손에서 김전(金詮).김근사(金謹思)등이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을 지낸 김감(金勘),영의정을 지낸 김안로(金安老), 선조의 국구(國舅:임금의 장인) 김제남(金悌男)등을 배출해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김안로(金安老,1481(성종12)∼1537(중종 32),자는 이숙(蓬叔), 호는 희락당(希樂堂), 용천(龍泉), 퇴재(退齋) 저서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는 참의(參議:정3품 차관보) 김흔의 아들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그는 서울 중구 남대문로5가 1번지에 거주했으며 1506년(중종1)별시(別試: 조선때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10년에 한 번 당하관을 대상으로 한 중시(重試)가 있을 때 시행한 부정기시(不定期試).문과.무과의 2과만 있음) 문과(文科:대과) 갑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典籍:정6품)에 임명되었다.그뒤 홍문관 수찬(修撰:서책을 편집.찬술하던 정6품).사간원 정언(正言:봉박과간쟁을 담당하던 정6품).홍문관 부교리등을 역임하고 1511년 사가독서(賜暇讀書:조선 시대에 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호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로 세종8년(1426)에 시작하여 세조때 없앴다가 성종24년(1493)에 다시 실시함)후 직제학(直提學:홍문.예문관의 정3품,집현전의 종3품).부제학(副提學:홍문관의 정3품).대사간(大司諫:왕에게 간언하던 사간원의 정3품)을 역임했다.경주부윤(종2품지방장관)으로 외직에 나갔다가,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때 조광조(趙光祖)등과 연루되어 귀양갔다. 1522년 부제학(副提學홍문관의 정3품),1524년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이 되고 그해에 아들 김희(金禧)가 효혜공주(孝惠公主:인종(仁宗)의 누이)에게 장가 들어 연성위(延城尉)에 봉해지자, 이조판서(判書:정2품 장관)로 영전되었다.이후 권세를 독차지하여 정사를 어지럽히고 권력남용이 잦아 영의정 남곤(南袞).대사헌 이항(李沆) 등의 탄핵을 받고 경기도 풍덕(豊德)에 유배당했다. 1527년 풀려나와 1531년에 도총관(都摠管:오위의 으뜸 정2품)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거쳐 1534년 우의정(정1품정승),이듬해 좌의정(정1품 정승)에 이르렀다.역사서에는 천성이 간사한데다가 글재주가 있는 작어 벼슬에 있을 때부터 간특한 사람으로 지목되었다. 귀양에서 돌아온 후 종친(宗親).공경(公卿:3공(영의정.좌의정.우의정) 및 6조판서)이라도 정적이면 축출하거나 큰 옥사를 일으켜 살해하는 등 전횡무도한 공포정치를 하던 끝에 1537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중종의 밀령을 받은 윤안임(尹安任)과 대사헌 양연(梁淵)에 의해 체포되어 유배되었다가 이어 사사(賜死)되었다.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과 함께정유삼흉(丁酉三兇)으로 일컬어지며 옥수동 한강변에 보락당(保樂堂)을 호화롭게 지었다.이밖에 부자(父子) 영의정(領議政:정1품정승)으로 유명한 김익.김재찬(金載瓚)과 우의정(右議政:의정부 정1품정승)에 오른 김유연(金有淵),정난공신에 책록되고 판서(判書:정2품 장관)를 지낸 김효성(金孝誠)이 있다.<백지 편지 보낸 정승 김익>조선 정조 때 무관(武官) 이창운(1713∼1791)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창운은 어영대장(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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