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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시조 천만리 왜군 상대로 대승 거두고 조선에 귀화천씨 후손들 병자호란 이후 대부분 은둔생활천수경의 <송석원시사>는 서민문단의 모체 한국 문학사상 큰 발자취영양천씨(潁陽千氏)의 시조 천암(千巖)은 중국 서촉(西蜀)의 천고봉 만인암(千古峰萬仁巖)에서 1325년에 출생하였으며 그 지명을 따서 성(姓)을 천(千)으로 하고 이름을 암(巖)이라 하였다고 한다.영양천씨매헌공가승보(潁陽千氏梅軒公家乘譜)의 기록에 의하면 천암(千巖)은 1368년(명나라 홍무 원년) 도총장(都總將)을 지내며 나라에 공훈을 세워 판도승상(版圖丞相:조선때는 호조판서 윗벼슬로 1품)에 이르렀고 후손들이 대대로 벼슬을 역임하며 영양(潁陽)에 살았기에 본관을 영양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그후 중시조 천만리(千萬里,자는 원지(遠之),호(號)는 사암(思庵), 군호(君號)는 화산군(花山君)이며 시호(謚號)는 충장(忠壯), 배위(配位:부인)는 보첩에 영영백(永寧伯:5등봉작 4번째작호)허언(許彦)의 딸로 기록되어 있음)는 명나라에서 서기1543년(가정 계묘년) 8월 1일 태어났다.아버지는 천종악(千鐘嶽)이며,어머니는 병부시랑(정4품 국방차관) 전탁(錢鐸)의 딸이다. 9세에 외삼촌 전륜(錢倫)에게 의탁되어 공부하였다.그는 1555년(명나라 연호 가정34) 황태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경과(慶科:나라에 경사가 있을때 보던과거)에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급제하고,황제를 알현하여 후한 상을 받았으며 1571년(명나라 연호 융경5)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고 1575년에는 총절사(摠節使)가 되어 북방의 몽고5부병(蒙古五部兵)을 섬멸시킨 공으로 내위진무사(內衛鎭撫使:내위사무를 맡아보던 진무영의 으뜸 벼슬)가 되었다.천만리는 서촉의 종북산에 살았고,반대파의 무고를 받아 8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으며 뒤에 풀려나 태청전수위사(太淸殿守衛使) 겸 병부대도독부(兵部大都督府:중국에서 군정을 맡아다스리던 관아)총독오군수(總督五軍帥:궁전 경비도 맡는 전군총사령관)에 승진되었다.서기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자 천만리는 황제의 명을 받아 총수사(總輸使) 이여송(李如松)과 더불어 조병영양사(調兵領糧使)겸 총독장(總督將:군사등 모든 통솔권을 감독하는 관직)으로서 두 아들 천상(千祥)과 천희(千禧)를 데리고,철기군(鐵騎軍:용맹한 기병) 2만명을 인솔하여 우리나라에 건너와 군량수송을 담당하였으며 평양.곽산.동래 등지에서 왜군을 상대로 대첩(大捷:대승)을 거두었다.이를 역사에서는 천장군(千將軍)의 삼전삼첩(三戰三捷)이라 칭송하고 있다. 왜란이 진압되자 중시조(1세조) 천만리는 명말(明末)의 쇠운과 자친(慈親)의 유훈(遺訓)을 심사숙고한 끝에 이 땅에서 뿌리내리기로 굳혔고,조정에서는 정란(定亂)의 혁혁한 전공을 치하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정2품 품계)로 봉조하(奉朝賀:2품의 벼슬아치가 치사한뒤에 특별히 시키던 벼슬)의 벼슬과 화산군(花山君)에 봉군하였으며 이어 사패지(賜牌地:임금이 내린땅) 30결과 충장(忠壯)의 시호를 내렸다.또한 자손의 세록(世祿)으로 두 아들 중 첫째인 천상(千祥)은 뒤에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품계)의 품계인 한성부좌윤(左尹:종2품 서울시행정부시장)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部都摠官:조선시대에 군무를 총괄하던 정2품)에 이르렀고,둘째아들 천희(千禧)는 행평구도찰방(行平邱道察訪:종6품 역참)에 이어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사헌부의 정4품)을 지내 형제가 가문을 빛냈다.또한 정유재란때는 울산(蔚山)등지에서 왜군을 섬멸했다.전란이 평정되자 명나라 장병들은 귀국했으나 천만리는 휘하 장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두 아들과 함께 조선에 남아 우리나라 천씨(千氏)의 시원을 이루게 되었다.후손들은 경남 고성군 동해면 장좌리(호암서원)에서 매년 음력 8월 1일에 향사한다.천만리의 저서 사암선생문집(思庵先生文集) 2권이 전하고 있으며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金池面) 방촌리(芳村里)에 있는 그의 묘는 천장군묘(千將軍墓)로 불리고 있다.<중시조 천만리 장군의 묘>는 풍수지리에 능한 명나라 이여송장군이 전북 남원군 금지면 방촌리에 위치한 환봉(環琫:고리봉)이라는 산줄기에 명당을 잡아 안장했는데 이 무덤자리를 풍수에서는 무자 천손지지(無子 天孫之地)라고 해서 '아들은 없는데 많은 자손들이 태어나는 묘자리'라고 한다.이곳 환봉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천장군묘의 지형은 아무리 추운 겨울날에도 이곳 무덤 주위에 이르면 마치 따스한 안방에 오는것만 같아 그렇게 세차게 불어오는 눈보라 모진 바람도 잔잔해진다고 한다.영양천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문관을 뽑기위하여 보던 과거로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로 나뉘었으며 3년마다 실시됨.대과)에 2명,사마시(司馬試:생원과 진사를 뽑던 과거 시험)에 5명 등 모두 6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영양(潁陽)은 중국 하남성 등봉현 영양진으로 고대 중국의 왕도였던 낙양과 정주 사이의 숭산 근처에 위치하며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서 깊은 곳이다. 영양 근처의 숭산은 중국 5대 명악중의 하나로서 소림사와 중악 묘가 있는 태실산과 소실산의 72개 봉우리가 숭산을 이루고 있다. 신기하게도 숭산에 있는 사찰의 수도 72개라고 한다. 이렇게 영양(潁陽)은 주위의 빼어난 산세를 두었고 이곳에서 영양천씨(潁陽千氏)의 역사가 시작되었다.인구조사에 의하면 영양천씨는1985년에는 총 20,278가구에 83,996명이었으며,2000년에는 23,014가구에 73,118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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