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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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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신씨는 문헌의 이설(異說)로 시조에 대하여 아주군(鵝洲君)에 봉해진 신익휴(申益休)를 주장하는 계통과 권지호장(權知戶長지방사무를 관장한 고을아전의 으뜸벼슬)을 지낸 신영미(申英美)를 내세우는 계통이 있다.최근에 중간된 "아주신씨본원록"에는 신익휴를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신익휴가 공을 세워 아주군(鵝洲君)에 봉해졌다는 내용은 화해사전(華海師全)에 기록되어 있는데,이 화해사전은 정민 교수 등이 주장하듯이 위서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 부분은 신영미의 윗대와 관련되는 부분이므로 그 사실 여부에 대하여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아주신씨 대종회>는 아주신씨 근원에 대하여 권지호장 신영미를 시조로 하는 일부 가첩(家牒)도 있었지만,가첩(家牒)은 전기전파(轉記傳播)하는 과정에서 여러 형태로 변형되어 전파될 수 있으므로 온전히 믿을 것은 못되고,다른 여러자료와 새로 발굴되는 자료를 연계시켜 연구 검토할때 참작할 자료는 될 수 있다며, 서기1819년(순조19년 을묘)에 안동파(安東派)에서 최초로 편찬한 아주신씨족보의 효시인 을묘보(乙卯譜)에 아주신씨의 상계(上系)를 평산신씨 장절공 신숭겸을 아주신씨의 비조(鼻祖)로 삼고,그 12세손 신익휴를 분관(分貫) 1세조로 하여 발간하여 그 후 각 파보(派譜)를 발간할때 안동파보(安東派譜)의 예(例)에 따라 "아주신씨는 평산신씨에서 분관되었음을 밝혀왔었다"고 천명하고 있다.그러나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아주신씨의 시조는 고려때 아주현의 권지호장(權知戶長)을 지낸 신영미(申英美)라고 기록되어 있다.호장(戶長)은 고려시대 향직의 우두머리로 호장의 일반적인 직무는 호구장적(戶口帳籍)의 관장과 전조(田租)및 공물(貢物)의 징수 상납,역역(力役)을 동원하는 일 등을 수행하였다. 그 밖에 군사적 기반과 전투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궁과(弓科)시험을 거쳐 주현일품군(州縣一品軍)의 별장(別長)에 임명되어,지방 군사조직의 장교로서 주.현군을 통솔하기도 하였다. 호장(戶長) 신분은 대체로 세습되었고,그 자손에게는 지방교육의 기회와 더불어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고, 과거를 통한 중앙관료로의 진출이 가능하였다.나말려초 지방호족들이 조직하였던 지방 관반(官班)의 최고위직인 당대등(堂大等)을 983년(성종2) 호장(戶長)으로 개편하였는데,이때부터 토호적 성격을 띠고 독자적으로 그 세력을 유지하던 호장세력은 독자성을 상실하고, 지방통치체제에 흡수되었다.호장의 종류에는 권지호장(權知戶長).섭호장(攝戶長).상호장(上戶長).수호장(首戶長).안일호장(安逸戶長).정조호장(正朝戶長)등이 있는데,그 임무를 조금씩 달리하였고, 권지호장은 섭호장과 흡사한 것으로 제반 지방사무를 섭행하였다.시조 신영미는 신익휴의 아들로 고려말에 거제군 소속 아주현(鵝洲縣)의 권지호장(戶長고을 아전의 맨 윗자리)을 지내고,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태자태사는 정1품이며 검교는 명예직)에 이르렀다.아주신씨는 고려 개국의 대업(大業)을 이룩하여,개국원훈(開國元勳)으로 대장군(大將軍:종3품)이며, 공산 동수동에서 후백제 견훤(甄萱)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위왕대사(爲王代死)한 신숭겸(申崇謙:초명은 능산 能山)를 비조(鼻祖)로 하고,12세손에 이르러 신익휴(申益休)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1076년에는 문산계 29계중 제3계,1361년에는 정2품)로 문하시랑(門下侍郞:문하부의 정4품차관)에 올라 공훈(功勳)을 세워,아주군(鵝洲君)에 봉군(封君)되어 자손들이 아주(鵝洲)를 본관(本貫)으로 정하고,신익휴(申益休)를 1세조로 받들며 계대(系代)를 이어 오고 있다.아주신씨(鵝州申氏)가 세상에 드러나 빛을 보게 된 것은, 고려말 퇴재공(退齋公) 신우(申祐)의 청렴함과 효행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부터라고 한다.권지호장 신영미의 현손(玄孫:손자의 손자)이라는 신우(申祐,판도판서 신윤우의 아들)는 고려말에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여,사헌부 장령(掌令: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정4품)과 전라도 안렴사를 지냈다.그는 효행으로 유명하여 아버지가 죽자, 여막(廬幕:궤연옆이나 무덤가까이에 지어 상제가 거처하던 초막)에서 3년간 조석으로 호곡(號哭:소리내어 슬피 움)하여 무덤 앞에 쌍죽이 솟아나,나라에서 정려(旌閭:충신.효자.열녀 등에 대하여 그들이 살던 고을에 정문을 세워 기리던 일)를 내리고,상주 관할 구역의 단밀현에 작은 돌비석(小石碑)이 길 좌편에 서 있는데 ‘효자리’라고 새겨져 있다. 그가 살던 이 마을 이름을 효자리(孝子理)로 불렀으며 그의 행실은 동국여지승람과 "삼강행실록"에 등재되었다.신우(申祐)는 이성계와도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으나,고려가 망하고 조선개국후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여, 형조판서(刑曹判書:정2품법무장관)로 불러도 나가지 않았으며,의성군 다밀면 망경산에 내려가 불사이군(不事二君:한 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함)의 충절(忠節:충성스런 절개)을 지켰다.신우의 아버지는 아주신씨 의성 입향조(入鄕祖)로 판도판서(判圖判書:호부상서로 고치기전의 판도사 정3품장관)를 지낸 신윤유(申允濡)다. 신우(申祐)는 출사하였을 때에는 직분을 수행함에 소홀함이 없었고, 려말(麗末)극도의 관료 부패시대에 불의를 쫓는 무리들과 뜻이 맞지 않아 스스로 물러난 일도 있었다. 그는 노령의 어버이만을 섬겨왔으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지금의 구천면 청산리에 장사 지내고 3년을 하루같이 시묘하였다.아주신씨는 조선조에 들어 문과급제자 9명을 배출하였는데 3공6경(三公六卿:영의정.좌의정.우의정 및 6조의 정2품 판서)보다는 주로 조정의 청환직(淸宦職:조선시대에 학식이나 문벌(門閥)이 높은 사람에게 시키던 규장각.홍문관.선전 관청 등의 벼슬)에서 활동하였고,효행(孝行)으로 가문을 빛낸 자손이 많이 나왔으며,선조때의 왜란(倭亂)과 인조때의 호란(胡亂)으로 나라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하였을 때는 창의(倡義:나라위해 의병을 일으킴)하는 등 충효(忠孝)를 겸전(兼全)한 가문(家門)이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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