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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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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서(楷書)에 일가를 이룬 당대의 명필 안지,정인지와 함께 용비어천가금자법화경(金子法華經)써,임진왜란때 조선왕조실록과 어용(御容)을 내장산에 봉안한 안의(安義)탐진(耽津)은 전라남도 강진군(康津郡)에 속해 있던 옛 지명으로,통일신라 경덕왕이 탐진현(耽津縣)으로 고치고,고려때 영암,장흥 등으로 이속되었다가,1417년(태종17) 도강현과 합하여, 강진으로 고쳤으며,1895년(고종32) 강진군이 되었다.탐진안씨(耽津安氏)는 순흥안씨에서 분적한 계통으로,고려 공민왕때 대제학(大提學:고려때는 종2품,조선때는 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이라함)을 지내고,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진 안목(安牧:시호 문숙 文淑)의 넷째아들 안원린(安元璘:시호 문열)을 시조로 받든다. 시조 안원린(安元璘)은 순흥안씨(順興安氏)의 시조 안자미(安子美)의 7세손 3형제 <안원숭.안원형. 안원린> 가운데, 큰 아들 안원숭(安元崇)은 순흥안씨를 계승하고, 둘째 안원형(安元衡)은 신죽산안씨(新竹山安氏)를 셋째아들인 안원린(安元璘)은 탐진안씨의 시조가 되었다.한편 탐진안씨를 '강진안씨'라고도 하나, 탐진은 강진의 옛 지명이므로 같은 본관이다.기록에 따르면 시조 안원린은 고려조에서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중서문하성의 종2품재신)과 검교중추원사(檢校中樞院事:고려때 왕명의 출납과 숙위.군기등을 맡았던 관청으로 종2품,검교는 벼슬앞에 붙이는 명예직)를 역임하고, 나라에 공을 세워 탐진군(耽津君)에 봉해졌으며, 후손들이<순흥 안씨>에서 분적하고, 탐진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그 후 시조 안원린의 아들 안우(安祐)가 공민왕때 군부판서(軍簿判書:고려 병부(兵部)의 장관 명칭으로 문종 때에는 병부상서(兵部尙書:정3품)로서 1명을 두고 정3품으로 임명하였다.1275년(충렬왕1) 원나라의 간섭에 의해 군부판서로 개칭하였다가,1298년에는 병조상서로 고침)와 상호군(上護軍:정3품 상장군이 고쳐진것).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정령을 출납하고 궁중을 숙위하던 추밀원의 벼슬)를 거쳐,홍건적(紅巾賊)이 침입했을 때 전공을 세웠으며,찬성(贊成:조선때 의정부 종1품 좌찬성과 우찬성을 아울러 이르는 말)안사종(安士宗)의 아들 안지(安止)는 조선 태종때의 명신(名臣)이다.특히 안지(安止)는 시문(詩文)에 능하고, 해서(楷書)에 일가(一家)를 이루어 당대의 명필로 명망이 높았고, 세종때는 정인지등과 함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 왕에게 바쳤으며, 태종을 위하여 금자법화경(金子法華經)을 썼다고 한다.안지는 공조판서(工曹判書:정2품 사도공이라 함),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조선시대에 칙령과 교명을 기록하던 관청 대제학은 정2품 문형)에 이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정1품 무관 최고벼슬)에 올랐으며,봉조하(奉朝賀:2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치사(致仕)한 뒤에 나라에서 특별히 시키던 벼슬)에 이르렀다.그는 안평대군의 문교(文交)를 거절했던 일화로 유명했으며, 세조가 그의 학문을 중하게 여겼으나 민수의 사옥(閔粹史獄:세조 2년에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이어 문과에도 장원급제한 사관 민수가 <세조의 실록>을 편찬할때인 예종때, 사초에서 양성지에 관한 사초를 수정하고, 초고본을 불태워서 생긴 사옥)에 그가 제조(提調:도제조의 다음가는 벼슬)로 있었기 때문에 연루되어 강진현(康津縣)으로 좌천되었다.세조는 전라감사(監司관찰사로 종2품)에게 글을 내려, "진상하는 음식물을 봉한 나머지는 안지(安止)에게 주고 답례하는 글을 받아서 아뢰라."고 하였다.전하는 말에 의하면, 성종때 어느날 신숙주와 한명회를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조회에 늦게 나와, 조반(朝班)에 참석하지 못하고 왕에게 사죄를 드리기를 "마침 옛 벗이 먼 곳에서 왔으므로 찾아가서 함께 이야기 하다가 늦게 되는 줄 몰랐사오니 죽을 죄입니다."하였다.성종이 "그 이가 누구인가"하고 묻자 그들은 대답하기를 "안지(安止)입니다."하였다.성종이 기뻐하면서 "나 역시 그를 보고자 하니 빨리 불러 오라. 그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리라"하고 종일토록 즐겼다고 <소문쇄록>에 기록되어 있다.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었던 안우(安遇)가 학행으로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전생서는 궁중의 제향에 사용할 양.돼지 등을 기르는 일을 맡아보는 관청으로 주부는 종7품)에 천거 되었으며, 이후에 현감(縣監:종6품 수령)을 지냈고 효행으로 유명했다.찰방(察訪:각 도(道)의 역참을 관장하던 종6품 외관직(外官職)으로 마관(馬官).우관(郵官)이라는 별칭이 있음)을 지낸 안기(安沂)의 아들 안극가(安克家)는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삼가 현감(縣監:종6품)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고, 낙동강변에 정자(亭子)를 지어 호호정(浩浩亭)이라 이름하고 학문을 닦으며 풍월을 즐겼다.탐진안씨는 조선시대에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로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였음)에 1명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7명 등 8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인구조사에 의하면 탐진안씨는 1985년에는 총 2,399가구에 10,023명이었으며 2000년에는 총 3,558가구에 11,033명으로 우리나라 안씨의 1.7%를 차지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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